장창준 (새세상연구소 연구위원)
길고 길었던 교착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섵부르다. 몇 차례 터널을 지날 수 있다는 신호와 희망이 보인 적이 있다. 그러나 가다보면 터널은 다시 연장되었다. 대결과 정체의 터널은 길고도 길었다. 여전히 터널 속에 있다.
지난 해 8월 빌 클린턴 방북 이후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 했다. 우여곡절 끝에 보즈워스의 방북이 실현되었으며, 비핵화, 평화체제, 대북지원, 관계 정상화 등에 대한 배열(sequencing) 순서를 논의했다. 남북관계 역시 현정은 회장이 우여곡절 끝에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개성공단의 출입을 정상화시켰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때 북측에서 조문단을 보내 이명박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타진하기도 했다.
올해 초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자신의 입으로 밝혔던 것에서 드러나듯이 실제 남북 정상회담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정상회담은 없던 일이 되었으며, 보즈워스 방북의 효과 역시 사그라들었다. 김계관 부상의 미국 방문 일정도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다.
천안함 정국에서의 탈피 조짐
결정적인 것은 뭐니뭐니 해도 천안함이었다. 얼마나 진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은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북미 2차 양자회담을 추진할 것을 결정하고 이명박 정부를 설득하는 단계였다. 중국이 제안했던 3단계 해법이 실행되는 혹은 실행을 준비하는 단계였다. 그러나 천안함 이후 모든 것은 좌초되었다. 천안함 사건은 천안함만 좌초시킨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긍정적 정세 변화의 모든 것을 좌초시켰다.
이제 다시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특히 남북관계의 변화 조짐이 심상치 않다.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북측이었다. 대승호를 풀어주었다. 급기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회담을 먼저 제의했다. 남측도 화답했다. 대북지원단체들의 방북을 승인하는가 하면 쌀지원의 물꼬를 텄다. 정부 차원의 지원도 고민하고 있다.
남북관계가 왜 갑자기 이리 되었을까. 8월 중순 개성에서 남북간의 비밀 접촉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최근의 변화는 이미 8월 중순 개성 접촉 결과인지도 모른다. 누가 먼저 손을 내밀었을까.
남측이 대화의 손을 먼저 내밀었다고 보기에는 몇가지 난해한 점이 있다. 천안함 유엔안보리 결의안 이후에도 남측은 ‘천안함 올인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북측이 먼저 변화해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오바마 정부에게도 그와 같은 입장을 여러차례 통보했다. 천안함 출구 전략을 모색하던 미국이 여전히 MB에게 발목잡혀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었다.
북측의 평화.대화 공세
북측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보는 것이 여러 면에서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왜? 문제는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북측의 행동 패턴은 일정한 법칙성을 갖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를 동시에 발전시키는 패턴이었다. 1994년 지미 카터 방북으로 핵 문제가 극적으로 타결될 때 남북 정상회담이 합의되었다. 2000년 북미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할 때 남북 관계는 정점에 있었다. 2009년 빌 클린턴 방북으로 북미 교착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접점을 찾을 때도 남북 관계가 해빙 모드로 전환했었다.
북측의 이같은 행동패턴은 북측의 이해관계가 작용한 측면과 더불어 구조적 측면도 존재한다. 한반도 문제의 특성 상 북미관계는 남북관계의 뒷받침없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북측의 이해관계가 우선이냐 구조적 측면이 우선이냐 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 전개되는 남북관계 개선 움직임은 북미 관계의 전환 움직임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안함 사건이 터진 후 한달 만인 4월 23일 “우리는 단기적으로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보즈워스 대북특사는 ‘사라졌다’. 보즈워스 특사는 호조건을 만들어내는 역할이라기보다는 호조건이 만들어 졌을 때 그것을 상승시키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북미 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지면 그가 할 일은 없다. 천안함 이후 한미 간에 ‘천안함 대북압박공조’가 진행될 때 그는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런 나약한 지위를 갖고 있는 보즈워스가 동북아 순방길에 올랐다. 한국에 와서 "나는 머지 않은 장래의 어느 시점에 (북한과) 대화에 복귀할 수 있음을 낙관한다."는 또 다른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감은 존재한다. 보즈워스가 움직인다는 것이 호조건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대북정책결정권은 여전히 매파들이 쥐고 있어 보인다. 보즈워스 특사가 “우리는 지금 어떤 시간표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언급한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최근의 남북관계 개선 움직임, 보즈워스의 낙관적 전망은 장미빛에 그칠 수도 있다.
기지개 켜는 대북대화파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북대화파의 입지가 조금씩 강화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보인다. 보즈워스의 한일중 순방은 그런 입지 강화의 반영이다. 대화파의 입지가 강화되는 것은 즉 매파들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은 최근 북중 정상회담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북중 정상회담은 미국이 추진하는 대북압박정책의 중요한 동력을 상실케 했기 때문이다. 매파들이 대북압박정책를 정당화시키는데 결정적 한계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북측이 최근 내밀고 있는 손은 남측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위 북측의 ‘평화공세’, ‘대화공세’이다. 이같은 공세를 통해 한미 양국에 존재하는 그러나 아직은 나약한 대북대화파들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는 전략적 판단을 한 것이다.
이같은 전략적 판단은 최근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과 북중 정상회담과 연결지어 볼 때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지미 카터 방북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위원장은 일정대로 중국을 방문했다. 의미없는 대화는 갖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화를 위한 대화에는 관심이 없다”는 보즈워스의 13일 발언과 김정일 위원장의 속내는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후진타오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6자회담에 복귀할 의사를 표명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메시지였다. 보다 정확하게는 대북대화파에 보내는 메시지였다. “너희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의미있는 대화의 장을 만들면 협상에 나설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터널 통과 가능성 농후
만약 의미있는 대화의 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북중 간의 관계는 더욱 밀착되고 북미 간에, 미중 간에 갈등은 더욱 표면화될 것이라는 메시지 또한 북중 정상회담이 던진 것이다. 압박파들은 위축되었고 대화파들은 기지개를 펴고 있다. 도널드 그레그 전 대사가 작심한 듯 예사롭지 않은 발언을 내뱉고 있고 보즈워스가 칩거생활을 끝내고 한일중 순방에 나선 것은 이같은 상황의 반영이다.
결과적으로 북측의 평화공세가 최근의 상황을 만드는 데 결정적 작용을 했다는 것이다. 이제 북측은 당대표자회를 앞두고 있다. 당대표자회에서 후계체계를 구축하고 당조직을 정상화한다면 한미 대북압박파들의 지위는 다시 한번 흔들릴 것이다. 북측 정권과 체제가 그만큼 안정화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북측의 붕괴 혹은 급변사태를 전제로 했던 대북압박정책은 갈수록 효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상대적으로 대북대화파의 입지가 강화될 것이다.
당대표자회 이후 북측의 평화·대화공세가 어떤 양상으로 펼쳐질지 그리고 그에 따라 한미 양국의 정책이 어떻게 펼쳐질지 주목해야 한다. 당대표자회 이후 상황 전개에 따라 2년 넘게 통과하지 못한 교착의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지 여부가 확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새세상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주간통일동향 [통일돋보기 45호]에 동시 게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