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는 작년 10월29일 야당 의원들이 각 법률안 가결선포행위를 한 국회의장을 상대로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한데 대해 기각(신문법 6:3, 방송법 7:2)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헌재는 “절차상의 문제는 있지만 국회의 자율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법률 자체의 위헌 여부를 판단하지 않겠다” “법률안 심의 절차를 어긴 점은 인정되지만 입법절차를 무효로 할 정도의 하자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절차를 위법으로 보고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은 기각하는 모순된 판결이었다.
헌재는 이 판결로 한순간에 모든 권위를 잃고 말았다. 87년 민주화운동의 산물로서, 지난 20여 년간 시민사회의 수많은 갈등 해결의 길잡이 역할을 하며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해온 헌재였다. 그러나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사안에 대해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판결하고도 청구를 기각하는 비민주적 판결을 내림으로써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처지가 되었다.
후과는 만만치 않았다. 야당 의원들은 헌재 판결에 따라 국회를 열어 재논의(재입법) 하자고 요구했지만 여당(국회의장)은 각 법률안을 다시 본회의에 상정해 심의·표결 절차를 진행할 권한이 없다며 반발했다. 이 사이 방통위는 시행령을 의결했고, 지난 1년동안 미디어다양성위원회 구성과 종편사업자 선정 일정을 발표하는 등 동아.중앙.조선의 방송진출을 기정사실화 해놓았다. 이름 깨나 있다는 학자들은 아무렇지도 않는듯 종편 선정기준과 방식을 둘러싼 발언들을 쏟아내놓고 있다. 헌재는 시민으로 하여금 불법과 편법, 무력이 이성과 상식, 합리보다 더 위력이 있다는 처세를 경험케 했고, 오늘날 과정이야 어떠하든 결과에서 이기면 불법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약육강식의 세상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고 말았다.
심의․표결권을 침해받고도 국회 안에서 해결할 뽀족한 방안이 없는 야당 의원들로서는 부작위권한쟁의 청구가 불가피했다. 하지만 이날 변론 공방에서 확인된 헌재의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한 재판관은 “국회가 자율적으로 개선하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또 국회의장의 부작위가 청구인들의 권한을 침해했다는 결정을 받는다고 해서 청구인에게 특별히 무슨 실익이 있느냐”며 손사래를 했고, 헌재 소장은 “몇 달씩 고생하고 연구하고 고심하고 해서 결론을 찾아나가야 하는 대단히 선례가 없는 사건... 연구하고 또 연구해야 한다”며 진퇴양난의 곤혹스런 진술을 내놨다. 3개월을 숙고한 후 모순된 판결을 내렸고, 판결 후 2개월간 따가운 시선을 받았는데, 다시 7개월을 소요하고도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87년 민주화운동과 헌법정신을 헤아려 순리에 따른 간명한 판결로 구래의 권위와 명예를 회복할 것인지, 아니면 또다시 엉뚱하게 판결하거나 회피함으로써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갈 것인지의 기로에서, 선택은 물론 헌재의 몫이다.
2010년 7월 9일
언론사유화저지 및 미디어 공공성 확대를 위한 사회행동 (미디어행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