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 홍경선 선생님을 만나
[따라 살고 싶은 100인 - 홍문거]
회갑잔치했다고 해고당한 함세환씨
대전시 장대동의 한 허름한 집에서 함세환씨를 만날수 있었다. 31년생이니까 자식들이 있었으면 작년에 회갑을 치러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식이 없었다. 북에도 그의 자식은 있을리 없다. 이런 사정을 안 대전지역의 민주단체에서 조촐한 회갑연을 차려드렸나 보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그는 직장인 양계장에서 해고되었다.
사장이 야간조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자주 하더란다. 나가달라는 말로 생각하고 보니까 회갑연을 문제삼아 경찰이나 기관원들이 자주 사장을 방문하였고, 이를 성가시게 생각한 사장이 핑계를 대어 쫓아내려 한 것이다. 그가 구차하게 사정하지 않고 떠나자 새로 그 양계장에 사람이 들어와 계속 야간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사장의 진의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다시 보안관찰법에 의해 밥줄마저 끊겨버린 것이다. 그 후 그는 장대동에 보증금 30만원에 월3만원씩을 주고 셋방을 살면서 막노동을 하고 있다.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하지만 공치는 날도 많다.
그가 태어난 곳은 38선 바로 이남인 웅진이다. 바다에 가려면 10리는 나가야 하고 집은 소 작농이었다. 면 이름은 잘 모르고 도원리 함촌이 고향인데 38선은 직선거리로 5리 가량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남한의 최북단이 셈이다.
아버지는 함영건, 어머니는 김용곤, 위로는 세균이라는 이름의 큰형이 있었고, 중간에 누님들이 있었다. 작은 누님 함순례씨가 현재 공주군 유구면에 사는 것을 42년만에 확인하고 2년여 전에 만날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은 인물도 잘나고 학교 다닐 때부터 달리기와 높이뛰기 등을 잘해서 도 체육선수로 이름을 날리곤 했던 그의 형 세균씨였다. 그의 형님은 술과 담배, 도박은 조금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돌보는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그 형님이 해방 전부터 지하운동에 관여를 하여 해방 후에도 비합법적인 조직원으로서 징역살이도 한 덕에 그는 어릴 때부터 경찰의 탄압에 치를 떨어야 했다. 형님은 산에 숨어지내는 날이 많아졌고, 경찰이 한밤중에 자는 방도 거침없이 들이닥쳐 함세균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곤 했다. 그의 아버지도 걸핏하면 주재소에 끌려가 고생을 해야 했다. 또 학교에서도 좋은 선생님들이 형님의 편이었는데 급기야는 교무주임이 경찰의 총에 맞아죽는 일까지 생기게 되자 그는 자연스레 경찰과 그 끄나풀들을 증오하게 되었단다.
아무튼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형님의 덕분으로 일찍이 운동에 뛰어들었고, 전쟁이 나고는 서울에서 50년 7월 19삵의 나이로 의용군에 자진입대 했다고한다. 그로부터 다시 유격대에 편입되고, 속리산 일대에서의 사선을 넘는 유격투쟁이 가족이나 고향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 걸 생각하는 건 고통이기에 오히려 잊으려 했다는 갓 스무살의 빨치산 전사는 이후 자신이 생각도 못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는 유격전을 수행하면서 총알을 무려 12발이나 맞았다고 한다. 대부분 근육에 맞아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데 52년 4월 전투에서 맞은 카빈 총알은 지금도 그대로 배에 박혀 있다고 한다.
"어려울 때마다, 총을 맞고도 살았는데 까짓 것 하는 심정이 생기더라구. 매일매일이 사람과 죽음의 갈림길이었지. 배 안의 총알은 아무렇지도 않아. 지금 살아계시면 일흔이 되었을 형님께 조국통일을 선물하고 싶은데 그때 자랑이나 하지 뭐. 나는 크게 한 거는 없어도 총맞아 가면서도 이래 살았노라고."
수감. 석방. 재수감
스스로 조국을 위해 크게 한 일이 없다고 지금도 생각하는 그는 조선인민유격대 제6지대에 소속되어 참혹하기로 유명한 51년 겨울의 대공세를 견뎌내고 53년 6월 2일, 휘하에 다섯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속리산 하간평에 작전을 나왔다가 다시 총알을 네 방 맞고 급기야 체포되고 만다.
다른 네 명은 모두 전사하였고, 그중 둘은 명천과 논산 출신의 여성이었다. 이 대목을 이야기하면서 "죽음의 고비도 많이 넘겼는데 내가 죽고 그들이 살아야 하는 건데"라고 하면서 인솔자로서의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부하를 죽게 한 일을 최대의 과오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총 맞은 부상의 몸으로 그는 점촌 `중부지구사령부`에 수감되고 `안동특무대`에서 취조를 받고, `대구동촌육군본부`에서 "피고인 함세환은 나이가 어림에도( 당시나이 23세) 북한 괴뢰에 충실하였기에 사형에 구형함"이란 검사의 구형과 나이 어린 점을 감안하여 관대한 처분으로 무기에 처한다는 판사의 선고를 받고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0년 민주당 정권에 의해 20년으로 감형되었고, 73년 6월 25일 대전교도소에서 만기출소를 하게 된다.(감옥에서의 생활은 글의 성격상 생략함)
그 후 그는 대전갱생보호소에서 6개월 있다가 양계장에 취직을 하지만 75년 7월 비전향을 이유로 사회 안전법으로 청주보안감호소에 재수감되었다가 89년 8월 7일 출소하여 같은 양계장에 다시 취직했다.
이제 그는 60줄에 다다랐다. 개인의 행복은 전혀 추구할 수 없었던 그의 생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도 조국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그는 고향땅으로 가 부모님 산소를 찾아 따뜻한 술 한잔이라도 올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며 북에 살아계실지도 모를 형님께 아직은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오늘도 쓰고 있다.
민족이 살아낸 백년, 그리고 새로 맞이하는 백년 비전향 장기수 홍경선 선생님을 만나
신나는 세상을 자손만대에 물려주고 싶었던 거야
홍경선 선생님은 충청남도 천안에서 농부의 네 아들 가운데 둘째로 세상에 나셨다.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여 그 속에 비치는 자기들의 양심이 말하는 대로 74년을 살아온 선생님, 그 분의 눈에 다가오는 새 백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새로운 백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선생님이 살아낸 지난 백년이 사뭇 외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일찍이 항일운동에 뛰어든 형님, 그리고 일본 경찰의 모진 탄압에 시달린 동생들 사이에서 용하게도 선생님은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다. 선생님은 한문서당에서 글공부를 하고 초등학교를 거쳐 천안 농업학교를 졸업한다.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대전 농업시험장에서 일하던 스물 한 살, 그 시퍼런 나이에 선생님은 마침내 해방을 맞이한다.
"오랜 세월, 모진 삶에 주눅 들었던 인민들이 비로소 가슴을 펴게 된 거야. 그들은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그 신나는 세상을 자손만대에 물려주고 싶었지. 그게 바로 지방마다 자발적으로 일어난 ‘인민위원회’ 건설 열풍이야. 친일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서 자치를 시작한 거야. ‘농민에게는 토지를, 노동자에게는 노동 3권을, 온 국민에게는 민주주의를 주자’는 거였어. 당시 인민들에게 굳은 신뢰를 받던 사람은 일제와 싸운 항일 투사들이야. 그러니 감옥에서 풀려난 우리 선배들이 대부분 군 인민위원회를 책임지는 직책으로 뽑혔지.”
조급함과 주관적 판단은 정말 무서운 적
그러나 미군정은 우리 겨레의 건국운동을 철저히 탄압한다. 38선 이남의 유일 합법정부라고 스스로를 규정한 미군정은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엄벌에 처한다!’는 애초의 포고를 폭력으로 강제한다. 심지어 ‘세 명 이상 모이면 처벌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그리하여 한반도 남쪽에는 또다시 탄압의 모진 광풍이 몰아친다. 선생님의 동료, 선배들이 대거 검거되자 이제 선생님은 군 당위원회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47년 봄에 저들은 나를 검거하려고 혈안이 되어서 돌아다녔어. 충남에서는 논산과 군산, 특히 논산에서 활동가들이 많이 나왔어. 그러니 논산에 감시망이 쫙 깔렸지. 대학생 복장을 하고 철로로 걸어서 논산에 들어가는데 저쪽에서 경찰이 하나 올라오는 거야. 철길을 따라 걷고 있었으니 돌아서 도망갈 수도 없었지.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철길로 젊은 놈이 걸어가니까,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보따리 검사를 해야겠다며 시비를 거는 거야. 옥신각신 싸우다가 결국 잡혔어.”
선생님은 지서에서 매를 맞고 징역을 살게 된다. 한 달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징역을 선생님은 50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나 겪는다.
선생님은 당신의 체험을 들어 활동가들이 빠지기 쉬운 조급성을 경계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신다. “네 번째 살고 나와서 집에는 못 가고 외숙의 집에 있었어. 선배들과 동지들은 거의 다 잡혀 모든 선이 다 끊어진 상황이었어. 탄압이 워낙 심하게 오니까, 49년 말에서 50년 초에는 모든 선이 다 끊어졌어. 한달 가까이 속 터놓을 사람도 없이 지내는데, 형사들이 매일 찾아와서 전향서를 쓰라고 회유하는 거야. 그거야 걔들을 교양시키는 일로 삼으면 그뿐이지만, 복잡한 정세가 펼쳐지는데 나 혼자서 답답하게 지내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안타까운 거야. 빨리 지도부를 찾아서 일을 해야된다는 생각이 간절했지. 그러고 있는데, 뻔질나게 드나들던 형사 놈들이 갑자기 발길을 끊은 거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지.” 선생님은 가짜 신분증을 내밀며 지도부라 자청하는 변절자에게 속아 그가 주는 ‘임무’를 수행한다.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그 사람 말만 듣고 성급히 믿은 것이 탈이었어. 천안지역의 조직을 복구하라는 임무를 받고 옛날 활동했던 사람을 설득하러 다녔지. 그 놈들은 나의 사상을 검증하고 천안에서 활동하는 사람의 사상을 검증한 거야. 그 때 사람들을 만들어내지 못할 조건이었으니 망정이지,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어.” 선생님은 거듭 강조한다. “운동하는 사람에게 조급함과 주관적 판단은 무서운 적이야.”
(이하 중략)
인생의 참 가치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분단이 산을 가르고 길을 막았다. 선생님은 이북에서 결혼을 하고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선생님은 개성에 있는 한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함경도로 옮겨 공장을 다녔다. 단철 마그네슘 공장이었다. 그러다 선생님은 67년에 남으로 나온다. 그리고 곧바로 구속된다. 67년 9월 17일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선생님은 그로부터 31년, 그 상상을 불허하는 길고 고통스런 겨울 감옥에 갇혀야 했다. 68년 4월 대전교도소, 73년 광주교도소, 78년 전주교도소, 80년 대구교도소, 82년 대전교도소 등 선생님은 싸움을 많이 한다는 이유로 자주 이감을 다녔다.
장기수들의 감옥생활은 다 거기가 거기이고, 이미 세상에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감옥에서 얻은 것이 무엇인지, 그것만 간추려 이야기하신다고 했다. ‘전향공작반’이 생겼을 때 선생님은 광주교도소에 있었다. “거기서 당했는데 테러지. 그 다음 대전에서의 테러도 극악했어. 사람도 많이 죽었지. 결국 내 감옥생활은 20년 동안은 혹독하게 매맞으며 버틴 거야. 고문기술자, 살인범 등을 내세운 놈들의 폭력과 회유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넘어갔어. 매맞아 죽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고, 놈들의 공작에 패해 전향서를 써서 죽었지. 끝까지 전향을 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 100명 정도 돼. 그 사람들을 비전향 장기수라고 하지.” 잔혹한 고문투쟁을 이기고 살아남은 사람은 ‘외유내강’이 아니라 ‘외강내강’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선생님 말씀이다.
선생님은 흠씬 두들겨 맞고 옥방에 들어와서도 상처를 벽에 문지르며 저항했다고 한다. “누가 시키는 것은 아니야. 같이 맞으러 가면 옆에 있는 사람을 보게 되거든.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옆의 동지를 연달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 내가 먼저 나서서 놈들의 기세를 꺾어야 동지들이 같이 살아나는 거야. 죽을 각오로 싸우면 살아. 그렇게 죽을 것을 각오하고 우리는 수십 번의 전향 공작을 이기고 살아난 거야.”
선생님의 말씀은 이어진다. “우리가 어디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인간양심은 모진 고문으로도 결코 꺾을 수 없고, 신념을 가진 사람은 죽기 전에는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 것, 우리 스스로 우리의 삶에 긍정과 자긍심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어.” 전향은 지장만 찍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그 간단한 일을 거부하기 위해 수십년을 피에 얼룩져 살아야 했던 것이다. “우리가 지킨 것은 직접 옆에 있는 동지와의 약속, 조직과의 약속을 지킨 거야. 한번 꺾이면 그 다음에는 동지와 조직을 바쳐야 해. 그리고 연락선을 불어야 하지. 저들에게 자신이 전향할 걸 믿게 하려면 계속 동지와 조직을 팔아야 하는 거지.”
송환문제가 해결돼도, 남쪽에서 할 일이 있으면 남아야지
98년에 세상으로 돌아온 선생님은 지난 2년간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선생님은 사랑하는 처와 지금은 56세가 되었을 장남을 비롯하여 두 딸, 그리고 두 아들을 북에 남겨 두고 있다. “잘 살텐데 뭐가 걱정이야. 어떻게 지내는지 짐작이 되는데 뭐. 체제 자체가 의식주를 보장할 테고 의무교육이라 돈 안 들고, 적성에 맞는 공부 잘 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걱정할 이유는 없어.” 그래도 보고 싶지 않습니까, 물었다. “그런 생각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제 자식들 안 보고 싶은 사람 어디 있겠냐 말이야. 그러나 ‘정치적 고려’가 나에게는 더 중요해. 내 가족 보고 싶다고 모든 것을 팽개칠 수는 없지. 통일을 위해 여러 가지 문제가 잘 해결되는 게 중요해. 그래서 이북에 송환되면 가는 거고, 그 날이 와도 남에서 내가 해야할 일이 남았다고 동지들이 말하면 여기 남아야지.” 선생님에게 송환, 그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조국이 통일되고 역사가 발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아직 남아 있는 삶도 선생님에게는 오직 조국을 위해 필요할 따름이다.
새 천년의 시작, 새해를 맞아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여기저기 다 다녀보고 유인물 학습도 해보면서 짐작하는 건데, 남한의 변혁운동은 방향을 잘 잡아야 해. 통일운동과 개혁운동, 통일운동과 변혁운동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잖아. 그런데 이것을 하나로 일치시켜 운동을 밀고 나가는데 부족한 점이 있어. 민중,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운동을 펼쳐가야 하는 거야. 역사적 생산력을 가진 계급을 중심으로 투쟁을 해야 하는 거지. 다시 말해서, 노동계급을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도 버릴 수 있다는 헌신성과 조직을 중심으로 단결하는 것은 그 어떤 현대무기보다 더욱 강력한 무기야.”
자연스레 선생님의 삶이 알려지고 그 분의 일생에 감동 받은 사람들이 존경의 마음을 보이기 시작했다. “돌아가실 때도, 운동하는 사람들의 참 삶을 알렸으니 여한이 없지. 통일장을 했으니 더 여한이 없을 거야. 영광스러운 최후를 맞으셨어. 돌아가시기 전날 의식이 없을 때도 친한 사람 11명의 이름을 다 불렀어. 그러기 어려운데 말이야. 의식이 없을 때에도, 백 번 물어봐도 ‘통일’돼야 갈 수 있다며 당신의 고향을 정확히 이야기했어. 통일을 못보고 간 것이 아쉽지만, 깨끗한 일생을 살다 간 거야.” 선생님은 당신 힘닿는 데까지 통일을 위해 살고 싶다고 거듭 강조하신다.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다 꺼내서 남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람, 그렇게 한평생을 바치느라 당신은 하나도 남긴 것이 없는 사람, 그러고도 행복에 겨운 사람. 우리에게는 그 분들이 온몸으로 개척한 아름다운 역사가 있다. 그리고 오늘, 그 분들의 삶을 이어갈 다짐으로 벌겋게 타오르는 새 아침의 태양이 우리에게 있다. (민 / 신향미 편지부장)
[따라 살고 싶은 100인 - 홍문거]
"나는 일하는 게 좋아요" 비전향장기수 홍문거 선생님
홍문거 선생님. 1921년에 나셨으니 올해로 여든. 고향은 대동강 가까운 평양 선교리. 세계 일주를 꿈꾸며 일찌감치 고등해양원 양성 교육을 받고 선원이 된다. 하지만 전쟁과 역사의 격랑에 흽쓸려 세계일주는 고사하고 파란만장한 생을 맞는다. 1955년 남하하여 체포된 뒤 감옥 생활 36년.
" `희생`이죠. 냉전 틈바구니에서 희생됐다는 거 뿐이나 특출난 거 없어요. 징역을 산 것도 다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행동이지요. 후회나 미련 없습니다. 회한도 없어요. 이것이 내가 걸어온 길입니다. 미래를 밝게 보면 희망이 생겨요. 될 수 있는 대로 저는 밝게 보려 고 하지요. `새옹지마`란 말 좋아해요. 이제 북에 가게 됐잖아요. 비전향으로 버텨낸 결실이지요."
"전향 각서를 쓴 장기수들은 지금 속이 탈 거예요. 이 분들 중에도 고향에 가고 싶은 분 있을텐데 이번에 못 가잖아요. 전향 아니면 비전향, 이렇게 이분법으로 갈라진 것이 문제예요. 74년 무렵 한참 전향 공작할 때 몽둥이 찜질에 물고문을 기본이고, 아휴 말도 못하죠. 강제로 , 사람 가장 예민한 약점을 골라서 고문하는데… 교도소에서 뭐 한 장 썼다는 이유 하나로 지금 애가 몹시 탈 텐데. 그건 전향도 아니예요.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 지금까지 `비전향` 장기수들을 돌봐왔다면 앞으로는 `전향` 장기수들을 포용해서 돌봐줬으면 좋겠어요. 관용이 필요하지요. 넓은 아량이."
선생님은 93년에 감옥에서 나온 뒤 한번도 일을 쉬지 않았다. 출소 직후 대전에 살 때도 일용직으로 공원 같은 곳 청소를 했다. 과천에 옮겨와서 혼자 살 때나 `한백의 집`에서 다른 장기수 동지들과 같이 사는 지금도 과천시 별양동 동사무소가 관리하는 취로사업에 늘 나간다.
"아침에 7시에 일어나요. 8시 반까지 밥 먹고 치우고 9시 전에 동사무소 나가요. 주로 풀을 뽑거나 쓰레기를 줍지요. 12까지 일하고, 점심 시간엔 집에 들어와서 밥 먹고 다시 나가요. 1시부터 5시까지 오후 일하고, 정식 일 끝나고도 일을 더 해요. 우리가 직접 헌책방 운영할 때는 저녁 일고여덟시까지 아파트 단지 같은 데 책 구하러 다니고 그랬어요. 폐품이 될 만한 종이랑 신문지 모으고, 신문지는 한 키로(1Kg)에 80원. 헌옷도 수집했어요. 쌀 땐 한 키로에 150원 하는데 지금은 아마 200원일 거예요. 스텐리스 같은 쇠붙이도 모아 고물상에 넘기고, 저녁밥은 책방 끝나는 시간에 맞춰 보통 8시에나 먹었어요. 그러니 저녁밥만 먹고 나면 꾸벅꾸벅 졸아요. 하루 종일 앉아보지 못하고 서 있다가 집에 돌아와 저녁만 먹으면 쓰러지다시피 해요. 좋아요, 잡념 들 새가 없으니. 그래도 주말에는 좀 쉬면 좋겠어요. 밀린 신문이나 책을 읽고, 편지도 쓰고. 그런데 토·일요일에 행사가 많잖아요.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어요. 주말 드라마 한 편 못봤어요.(웃음) 교도소 있을 땐 영화도, 드라마도 많이 봤는데 밖에 나와서는 오히려 못봐요. 모순되죠."
"밤낮으로 집회에 나가는 것도 물론 의의가 있지요. 하지만 나는 일하는 게 더 좋아요. 힘들기야 물로 힘들지만 덜 힘들어요. 서민들하고 사귀며 일하는 거, 사람들 고민이, 고통이 뭔지도 알 수 있고, 노동이란 게 원래 그래요, 사람다워요. 내가 즐겁기 위해서 취로사업을 합니다. 남들이 보면 구질구질하다고 할 지 모르지만 내 맘이 즐거우니까 나는 아랑곳 하지 않아요. 이 사회가 체면을 중시하는데, 그까짓 체면이 다 뭡니까"
몇 해 전에 선생님은 불쑥 민가협 사무실을 찾았다. 나중에 감옥에서 동지들 나오면 써 달라고 봉투 하나를 내 놓고는 금방 자리를 떴다. 고맙습니다, 하고 민가협 간사가 대수롭지 않게 열어 본 봉투 안에는 일금 천 만원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간사가 뛰어나가 선생님을 찾았지만 벌써 가 버리고 안 보이셨다. 정작 당신은 비 새는 지하골방에 살면서, 날마다 온갖 쓰레기를 줍고 거리를 청소하여 한 푼 두 푼 꼬박 모은 돈을 그렇게 훌쩍 건넨 것이다. 이렇게 작은책 지면에 그 사실을 밝히는 것도 선생님은 못마땅해 하시겠지.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을 떤다고, 선생님은 요즘도 돈 쓸 데가 많으시다.
"한 달에 사오십 만원 벌어요. 우리 동지들이 많이 아프니까 약에 보태쓰라고 돈을 가져가요. 결혼식도 많아요. 돌아가신 분 부조금도 내고, 돈이 많이 드니까 외식도 안합니다. 누가 나가서 사 먹자 그러면 그냥 집에서 해 먹자고 하지요. 그리고 우리 동네에 정말 불우한 집이 있어요. 애기 아빠가 한쪽 다리가 소아마비이고, 부인은 간이 나쁘고, 딸이 둘인데 고1과 초등학교 4학년이예요. 부인이 식당 일을 하다가도 오래 못하고 앓아 눕고 그래요. 저랑 같이 취로 사업을 하는데, 아무리 아이들 학비 면제에 무료 급식이 돼도 사오십 만원으로는 네 식구가 못 살아요. 그래서 고1 큰애한테 한 달에 10만원씩 장학금을 줬어요. 우리야 돈 쓸 데가 없나요 뭐. 고스톱도 안 치고, 몸 치장할 일도 없고, 제가 입은 이 옷도 다 주운 옷이에요. 세탁기에 깨끗이 빨아서 입은 거요!"
선생님은 북한에 아내와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다.
"제 심정은 한마디로 복잡하죠 뭐. 집 떠난 지가 워낙 오래 돼서. 그동안 비정의 세월이 너무 길었고, 잊어먹으니까 사람이 살 수 있는 거예요…. 여기서 함께 취로사업 하는 사람들이 다 식구예요. 같이 일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내가 이번에 북한 간다니까 자기 일처럼 기뻐해줘요. 우리, 아주 재밌게 지내고 있어요. 외려 북에 가면 서먹서먹할거야. 제가 여기 `과천 사람`된 거는 한지흔 선생 덕분이예요. 그 분 보면 내가 뭘 해야 하나 반성하게 됩니다. 고민하다가 사랑의 장기기증본부에 갔어요. 장기를 기증하고 싶은데 60세 이상 늙은이 것은 못쓴대요. 각막 까만 거, 고거 하나는 쓸 수 있다고 해서 고거만 떼기로 했어요. 이번에 (이북에) 가니까 그나마도 약속을 못지키게 됐는데, 북에 가서 기증하면 되죠 뭐. 그곳이 미국이라도 마찬가지일 테고, 큰 안목으로 볼 땐 마찬가지죠." (작은책 20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