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 이별 북으로 가는 장기수 신인영씨
< 비전향장기수 재북 가족 >-안영기씨
송환 앞둔 비전향장기수 우용각씨
[비전향장기수] 일본인 납치의혹 장기수 신광수씨자료 일에 넘겨
정부는 일본 정부가 일본인 납치 의혹을 제기해 온 비전향 장기수 신광수(71)씨에 대한 수사 및 재판기록 사본을 최근 일본쪽에 넘겨주었다고 정부 관계자가 29일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일본 정부가 7월초 신씨에게 납치사건에 대한 진술을 청취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와 의사를 타진했으나 신씨가 협조를 거부해 이뤄지지 못했다”면서“일본쪽이 대신 85년 체포 당시 신씨에 대한 수사 및 재판 기록을 보내달라고 요구해왔다”고 설명했다.
신씨는 지난 85년 일본에서 북한노동당 공작총책으로 활동하던 중 남한을 방문했다가 간첩혐의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무기 징역으로 감형된 후 지난해 말 마지막 비전향장기수로 출소했다. 신씨는 다음달 2일 북송될 예정이다.
체포될 당시 신씨는 지난 80년 오사카에서 발생한 중화요리점 종업원 하라 다다아키의 여권을 소지하고 있어 일본 경찰은 그를 납치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해 왔다. 일본 경찰은 지난 85년에도 한국쪽의 협조를 얻어 신씨에 대한 조사에 공동 입회했으나, 신씨는 일본 수사관이 있다는 이유로 진술을 거부했었다.
한편 일본 수사관 5명은 전날부터 한국 정부의 협조를 얻어 신씨에게 포섭돼 간첩활동을 하다가 함께 체포됐던 김길욱(72)씨를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들은 김씨가 일본인 납치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85년 체포돼 전향서를 제출해 98년 출소한 뒤 제주도에 살고 있으며 이번 일본쪽의 조사 요청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한겨레 2000/08/29)
노모 이별 북으로 가는 장기수 신인영씨
“내년엔 다시 서울 와 어머니 만났으면”
북한에 있는 아내와 자녀를 만나기 위해 93살의 노모와 생이별을 해야하는 비전향장기수 신인영(71)씨. 그는 33년만에 북에 있는 아내와 자녀 등 가족을 만난다는 기쁨보다는 노구를 이끌고 옥바라지를 해왔던 노모와 헤어져야하는 까닭에 답답한 마음이 더하다.
그는 이에 골수암을 앓으면서도 매일 성남에 사는 어머니 고봉희씨를 찾는다. 북송을 앞두고 서신 정리, 각종 모임 참석, 언론과의 인터뷰 등 바쁜 와중에서도 그는 `이별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번에는 같이 북한에 가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더니 식사도 하지 못하시고 누워서 눈물만 글썽거리셨다”고 말하면서 29일부터는 모든 일을 제치고 어머니와 숙식을 같이하며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해야할 것 같다고 전했다.
-기다리던 북송일이 다가왔습니다. 요즘 무엇을 생각하시며 보내시는지.
=6·15 발표 때는 정말 가나 했는데 이제 날자가 다가올수록 내가 정말 북한에 가는구나 실감이 납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는데 골수암 치료하러 병원 다니느라 정리하지 못한 것이 쌓여 조급해지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어머니와 생이별해야하니, 정말 괴롭습니다.
-북송이 결정된 후 엄청난 생활의 변화가 있었을텐데. 그 이후 생활을 조금 소개해주시지요.
=제가 32년 동안 징역살이한 흔적이 편지입니다. 그동안 수양딸의 도움을 받아 거의 정리가 끝났습니다. 동창들과도 만나 회포를 풀었고 일가친척과 함께 고향 산소에도 다녀왔습니다. 남한에서 신세진 많은 사람을 만나 인사도 했습니다.
-유혹을 이기고 전향서를 안써 결국 북한으로 돌아가게됐습니다. 지난 세월을 후회하십니까, 아니 신념을 지켰다 자부하십니까.
=긍지를 느낍니다. 유교가정에서 자란 사람으로 타의와 폭력에 굴복하지 않은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통일을 염원해 싸워왔는데 왜 전향하느냐고 항상 다짐했습니다. 많은 회유가 있었으나 인간의 존엄성과,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외부압력에 의해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50년대 이후 진보세력이 모두 산으로 들어가는 등 죽어갔는데 나라도 등대 역할 해야되는 것 아니냐 항상 다짐했습니다. 변절자 조상을 가졌다는 불명예를 후손들에게 남겨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런 긍지 갖고 가족을 만난다니 기쁩니다.
-그래도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생활하지 못하고 영어의 생활로 뜻하는 많은 일을 이루지 못해 아쉬움도 많았을텐데.
=제일 어려웠던 순간은 감옥들어가서 1년동안이었습니다. 밖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면 우리 아이들 목소리로 착각하고 괴로워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신씨는 자녀 생각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더니 서재에 가 인터넷에서 따온 아내와 자녀 소식이 담긴 <연합뉴스> 보도를 읽기 시작했다.
`꽃을 유달리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꽃 속에 모시려고 화분들로 방안을 가득 장식하고 있습니다.` `신씨의 손자들도 할아버지 어서 오십시요라고 말하며 한번도 보지못한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냈다`
노모를 모시고 북한에 가지못해 안타까운 한편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해 아버지를 기다린다는 보도에 흐뭇함을 감추지 못한 신씨는 자녀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운 아내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평양방송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비전향장기수를 신념의 강자, 불굴의 투사, 참다운 인간, 애국자의 전형 등으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가면 상당한 대우를 받을 것 같은데요.
=그런 것 바라지 않습니다. 시기도 이인모 선생 갈 때와 다른 것 같습니다.
-전향서를 쓴 동료들은 이번에 북한에 가지 못합니다. 당국에 하고 싶은 말은.
=정말로 전향한 사람은 없습니다. 1만명중의 하나가 전향했을까요. 70년대는 무법천지로 중세기적 고문이 자행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이 죽고 자결했습니다.
-6·15선언에 따라 북한에 가게되는데 그 당시 텔레비전을 시청하셨습니까.
=남북은 55년동안 평행선을 달려오다 지난 6월 처음으로 접점을 찾았습니다. 민족의 위대성과 저력을 찾는 순간이었지요. 인류역사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역사로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한 시기에 옳게 결단했다고 봅니다. 우리 민족은 역시 위대합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며칠 전 납북자 가족이 북한가면 소식 전해달라고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북쪽에서 살겠다고 해서 북쪽에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오랜 세월 가족들과 헤어져 있던 사람으로 그들 가족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그들로서는 생사확인도 하고 싶고 서신교류도 하고 싶을 것입니다. 북한에 가서도 그들의 설움을 북한 당국에 이야기하고 편지도 전달하겠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북한에 가져갈 물건들은 무엇입니까.
=저로서는 마땅히 줄 선물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 옷감과 시계 등을 준비하고 있는 것같아요. 제가 부인에게 줄 첫 선물은 남한에 있는 우리 전가족 63명이 모여 찍은 사진입니다.
-긴 세월 전향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지요.
=역사발전 법칙에 따라 지금은 분열됐지만 결국 통일로 갈 것이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사회로 갈 것이다는 확신이 아닐까요. 독립투사 가정으로 변절자가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가족들도 넉넉한 마음으로 저를 편안하게 지켜주었습니다.
-기나긴 외로운 독방세월이 무척 힘들었을텐데.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초기에는 배고픈 것을 참기 힘들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물리적 고문을 견디기 힘들었지요. 가족들과의 면회를 차단하는 등 당국의 회유에도 고뇌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남한에 있는 동안 가장 기뻤던 순간은.
=석방 이후 그리웠던 어머님과 형제 자매와 만나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랜 세월 독방에 있었지만 남한에서도 많은 사람 만났는데 가장 기억나는 사람은 누구인지요.
=암으로 죽어가는 정치범 신인영을 석방하라고 애써주신 수많은 인권단체와 종교인 그리고 민가협 어머니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에게 혈육 이상으로 헌신적으로 힘을 주었던 수양딸 양계숙씨(28)도 잊을 수 없지요.
-교도소에 있는 동안 세상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교도소에 가기 전과 교도소를 나온 뒤의 변화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물론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등이 여전히 잘사는 등 역사에 있어 발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개인이기주의가 심각한 것 같고 도덕불감증 또한 심각한 것 같습니다. 양키문화가 들어오면서 정치인들은 윤리도덕이 없어지고 학생들도 자기이익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등 많은 모순이 내재하고 있는 듯합니다.
-독일 통일과 소련 붕괴 이후 많은 젊은이들은 이념이나 사상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고 인생은 즐겨야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은데.
=일제 하에서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노예생활을 했나 젊은이들이 몰라서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통일된 조국에서 행복이 보장되는 것임을 젊은이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에 가면 우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 암 치료에 주력하고 싶습니다. 금강산요양소에 머무르면서 병을 치료하는 한편 금강산 안내원을 하면서 봉사하는 것은 어떤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체험했던 남한의 모든 것을 북한 주민들에게 들려주는 등 통일을 위해 나름대로의 역할을 해야지요.
-북한이 남한에서 배울 점은 무엇입니까.
=기업경영활동 등 자본주의 실무면에서는 북한이 배울 것이 있다고 봅니다.
-통일이 언제쯤 가능하다고 보시는지.
=흡수통일과 적화통일은 민족이 공멸하는 길이 아닌가 합니다. 유일하고 합리적 방법이 이번에 남북이 접점을 찾은 국가연합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이를 높은 단계의 연방제로 발전시켜나가야할 것입니다. 단일체제 통일은 지금은 불가능한 만큼 후대에 맡겨야할 것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남한에 오면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1국2정부2체제 통일은 몇년 안에도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지난 55년간의 민족의 고통은 분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힌 신씨는 “그동안의 한과 갈등을 풀고 이념과 사상을 초월해 민족이 화합해 통일의 길로 나아갔으면 한다”며 “남북이 서로 헐뜯지말고 좋은 점을 서로 받아들여 통일조국을 건설했으면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신씨는 다시 남한에 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내년에는 다시 서울에 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답하고 “다시 남한에 와 어머님 등 남한에 있는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가능하면 이들과 함께 북한으로 가 백두산 묘향산 관광을 하는 것이 앞으로의 작은 꿈”이라고 밝혔다. (한겨레
< 비전향장기수 재북 가족 >-안영기씨
다음달 2일 비전향장기수 북송을 앞두고 안영기(72)씨의 북한 가족들은 그의 송환을 고대하고 있다고 북한 방송이 전했다.
북한이 남한의 친북주의자들이 설립한 단체라고 주장하고 있는 한국민족민주전선(민민전)의 `구국의 소리` 방송은 지난 26일 `30년과 그들의 소원`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에서 평양시 평천구역 안산동에 살고 있는 안씨의 북한 가족과 인터뷰한 내용을 내보냈다.
안씨는 김책공대 출신으로 종전 후인 지난 58년 평양의 명소인 `옥류관`등 평양 건설사업에 참여했다. 공작원(간첩)으로 남파된 후 붙잡혀 지난 62년 8월부터 99년 2월까지 37년간 복역했으며 경기도 과천 `한백의 집`에 거주하고 있다.
북한에는 60대 초반인 안씨의 아내 계용옥씨와 딸 란경.란희씨 등이 있다.
이 방송에 따르면 3살 때 아버지와 헤어진 란경씨는 남포혁명학원을 졸업하고 당 간부양성기관인 강반석혁명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평양 양말공장 초급당 부원을 거쳐 지난 98년 12월부터 평양시 평천구역 당위원회 부원으로 일하고 있다.
유복자인 란희씨는 새날혁명학원을 거쳐 강반석혁명학원을 졸업했다. 이어 평양봉학인민학교 책임 부원으로 일했던 그는 현재 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지동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란희씨는 `자나깨나 꿈결에서 찾고 찾던 나의 아버지가 비전향장기수라는 너무나도 꿈같은 소식을 접하던 그때 어머니와 저와 그리고 유복녀인 동생 란희도 서로 부등켜 안고 울었다`면서 `머지않아 저희들에게로, 조국의 품으로 다시 오게 될 아버지 생각으로 매일밤 잠못 이루고 있다`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다.
또 안씨의 아내 계씨도 `건강한 몸으로 가족의 품으로, 조국의 품으로 꼭 돌아오기를 멀리서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한편 북한 당국은 안씨에게 지난 98년 4월 `조국통일상`을, 99년 5월 `공화국영웅` 칭호를 각각 수여했다고 이 방송이 소개했다. (연합 2000/08/29)
송환 앞둔 비전향장기수 우용각씨
“정순택, 정순덕 동지도 우리와 함께 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남쪽 당국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대승적 차원에서 인도주의적 결단을 내리길 바랍니다.”
오는 9월2일 북한으로 돌아가는 세계최장기수 우용각(71)씨 등 송환대상 비전향장기수 45명은 21일 오전 서울 향린교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순택(79), 정순덕(67)씨의 송환을 촉구했다. 정부는 두 정씨 모두 전향서를 제출했다는 이유로 이번 송환대상에서 제외했다.
1958년 7월 남파되던 중 울릉도 근처 해상에서 체포된 뒤 41년7개월을 복역했던 우씨는 “먼저 땅에 묻힌 동지들도 함께 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데 그나마 함께 지내던 동지들마저 송환길이 막혀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두 분 다 전향서를 쓰기는 했지만 당시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상황에서 온갖 가해행위를 동반한 협박과 `전향하면 병을 고쳐주겠다`는 회유 끝에 본의 아니게 지장을 찍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정순택씨는 오랜 수형생활로 인한 환청증세로 보청기를 끼고도 잘 듣지를 못한다. `마지막 빨치산`으로 알려진 정순덕씨는 체포 당시 한쪽 다리를 잃은 데다 지난해 뇌출혈로 나머지 한쪽 다리마저 마비돼 거동을 못하고 있으며, 현재 인천 나사렛한방병원에서 투병중이다.
우씨는 “99년 2월25일 출소해서 정순덕 선생을 처음 만났는데 서울 봉천동 만남의 집에서 며느리처럼 수발을 다 해가며 헌신적으로 장기수들을 보살펴 준 고마운 분”이라며 “혈육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정씨의 간호를 위해서라도 북으로 보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6·15공동선언의 이행을 위해서라도 남조선의 모든 장기수들과 그 가족들이 조건없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씨의 진정한 바램은 “장기수 송환을 계기로 남북간의 새로운 화해의 문이 활짝 열렸으면 하는 것”이다. (한겨레 200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