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 정치장교 박문재
<비전향장기수 재북 가족> 박완규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자생적 사회주의자 석용화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최장 빨치산 송상준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정치장교 박문재

"저는 휴전선을 뚫고 돌아가지만 우리 모두는 휴전선을 걷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온갖 고통을 당하면서도 지켜온 제 신념의 근원에는 항상 고향을 향한 그리움과 통일에 대한 염원이 있었습니다."

인민군 정치장교출신 비전향장기수 박문재(78)씨. 그는 오는 9월2일 북한으로 간다. 두팔을 벌려 반길만도 하련만 그의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배어있다. 박씨는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고 비전향장기수의 북송이 추진되고 있으나 분단으로 강요된 아픔과 희생을 한꺼번에 걷어낼 유일한 희망은 통일입니다. 그러나 통일은 아직도 멀었습니다"며 그 슬픔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불가피한 개인간 생존경쟁과 황금만능주의가 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 요소라고 말했다. 통일을 위해서는 경제적 불이익과 사회적 불안정이 불가피한데 남한의 주민들이 이를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갖추질 못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

그는 개성출신으로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개성의 외갓집에서 자라다 37년 아버지의 친구를 따라 중국 장춘으로 건너가 신경실업학교(4년제)를 다니던 중 당시 유명한 카프계열 시인(일명 김려수)이자 "로동신문" 주필을 지낸 박팔양(88년 사망)씨의 양아들이 됐다.

해방 이후 김일성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하고 로동신문기자로 일하던 그는 한국전 발발 직후인 50년 6월28일 인민군 8.15유격부대정치장교로 전쟁에 참가했으나 인천상륙작전 이후 고립돼 빨치산활동을 벌이다 53년 3월 체포돼 비상조치령에 따라 15년형을 선고받았다.

4.19 당시 비상조치령이 폐지됨에 따라 63년 8.15 특사로 출소한 뒤 지난 66년 이모(68)씨와 결혼해 3남매를 낳았다. 그러나 지난79년 중학교 은사였던 재일동포가 삼천포 간첩단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되면서 그와 서신왕래를 한 것이 빌미가 돼 간첩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10.26 사건으로 사형 집행이 연기되는 바람에 무기형으로 감형됐다가 93년 3.6 사면으로 석방된 뒤 부산 사하구 괴정동 영생양로원에서 지내고 있다.

지난 79년 재수감되면서 부인 이씨와 이혼했고 큰 아들(32)과 둘째 아들(30)은 대학을 졸업한 뒤 현재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며 막내 딸(28)은 부산에서 생활하고 있으나 모두 박씨와 연락을 끊고 살고 있다. 박씨는 남한에서 마지막으로 아들 딸의 얼굴이라도 보길 원했으나 모두 아버지를 외면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씨는 미혼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북한이 있는 가까운 일가족은 양아버지 팔양씨 아들 형제 뿐이다. (부산일보 2000/8/21)


<비전향장기수 재북 가족> 박완규씨

헤어질 당시의 집터에서 35년간 남녘의 비전향장기수 노인을 가슴 아프게 기다리고 있는 60대 중반의 노인이 있다. 이 노인은 지난 67년 9월 간첩 혐의로 체포돼 무기형을 선고받고 33년간 복역하다 지난해 2월 석방된 박완규(72)의 아내 오덕실씨.

북한이 대남지하조직으로 주장하고 있는 한국민족민주전선(민민전)의 28일 방송에 따르면 그는 지금 평양시 용성구역 용성1동 54반에 위치한 아파트 2층 3호에서 맏딸 춘일씨와 살고 있다.

현재의 아파트는 오씨가 박 노인과 헤어질 당시 살던 곳에 건축된 것으로, 오씨는 평양시 당위원회와 용성구역 당위원회 간부들이 여러 차례 시내로 이사할 것을 권고했지만 매번 사양했다. 결혼 8년만에 헤어진 남편이 돌연 이곳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35년만에 이렇게 다시 당신을 다정히 불러보는 순간 눈물이 계속 앞을 가려 이 마음을 진정할 수 없습니다`고 말문을 연 오씨는 이러한 심정을 담은 편지를 민민전 방송을 통해 공개했다.

오씨는 이 편지에서 `수십년 세월 소식 한 장 없던 당신이 이인모 노인과 같은 비전향장기수라는 꿈같은 소식을 접한 그날 저와 맏딸 춘일이, 둘째 딸 춘옥이, 그리고 아들 명철이와 유복자 혁철이 모두 온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고 또 울었다`면서 `다시 만나게 될 그날까지 부디 몸 건강에 주의해 달라`는 심정을 전달했다.

그는 특히 자택을 찾은 민민전 기자에게 남편 박씨에게 수여된 `조국통일상` 증서와 `공화국영웅` 칭호증서를 일일이 꺼내 보이며 박씨와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음을 밝혔다.

40대 가정주부가 된 맏딸 춘일씨도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불고 했던 헤어질 당시를 그리면서 `네가 학교 갈 나이에 다시 오겠다`는 말 한마디 남긴 채 떠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다.

`아버지가 35년 동안 비전향장기수가 돼 남녘 땅에서 어렵게 살고 계신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나니 마음이 정말 아프고 쓰리다`는 춘일씨는 헤어지기 전 아버지와 함께 찍은 돌사진을 매일 밤 보고 또 보며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다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한편 오씨는 구역당학교 과정을 거쳐 공산대학을 졸업한 후 유치원 원장과 탁아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맏딸 춘일씨는 용성기술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용성구역 상업관리소에서 일하고 있고 그의 남편 역시 이 구역 행정경제위원회 간부로 일하고 있다.

모란봉구역 북새동에 거주하고 있는 둘째달 춘옥씨는 평양의학대학을 졸업한 후 고려의학연구소 연구사로 근무하고 있고 남편 역시 김만유병원에 몸담고 있으며 맏아들 명철씨와 유복자 혁철씨도 광복거리와 통일거리에 거주하면서 중앙기관에 근무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0/08/29)


[남기고 싶은 이야기] 자생적 사회주의자 석용화씨

`통일돼 南가족 만날것`
미군정 친일파 득세에 회의, 평범한 농부서 사회주의 몰입
`신념 지키기 위해 북행 결심, 동의해준 두 딸, 아내에 감사`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 하나로 버텨온 54년이었습니다. 나를 지탱해 온 원동력과 같았던 그 믿음을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떠나는 겁니다."

헤어진 가족을 만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산가족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다시 헤어지려는 사람도 있다. 부산지역 비전향장기수중 유일하게 30년 가까이 가정을 꾸려 살아온 "자생적 사회주의자" 석용화(76.부산 동래구 안락동)씨.

혈육의 정도 결코 그의 이념을 녹이지 못했다. 다음달 2일 북송예정인 그는 여타 비전향장기수와는 다소 독특한 삶을 걸어왔다. 떠나기에 앞서 새삼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일 자체를 부담스러워 할 정도로 독자적인 은둔스런 생활을 해왔다.

다른 비전향장기수처럼 출소후 서로 연락을 하거나 인권센터의 도움을 받는 일 없이 지난 73년 결혼, 지금까지 부인(63)과 22, 26세된 두 딸과 함께 포장마차와 아파트 주차장 경비원 등을 하면서 생활을 꾸려왔다. 비전향장기수 북송 신청 때도 송환추진위원회를 통하지 않고 혼자서 8월초 통일부에 직접 낼 정도로 그는 혼자였다.

고향인 경남 양산에서 초등학교를 마친후 농사를 짓던 22세의 청년시절. 광복이 됐는데도 미군정이 민족주의자와 애국자들을 배척한 채 친일파를 모아 권력을 추스리는 모습을 보고는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해 쟁기를 던지고 사회주의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3.1운동과 조선해방" "맑스레닌주의""중국의 붉은 별" 등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탐독하던 그는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자생적 사회주의자"가 됐으며 마침내 46년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하게된다.

남노당에서 반미운동을 하다 난생처음 1년6개월의 감옥생활을 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남 양산 신불산으로 들어가 빨치산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52년 6월 국군토벌대에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장면정부가 들어서면서 20년형으로 감형받아 지난72년 출소했다.

그는 북송이후의 생활에 대한 기대도 평범하다.
"북으로 간다고 해서 나의 생활이 갑자기 변화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누군가 날보고 "초지일관"하며 살아왔다고 이야기해 주는 걸 듣고 싶어요."

그러나 그도 가장으로서 가족을 남겨둔 채 혼자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무겁다.
"얼마남지 않은 생을 나의 바람대로 살 수 있도록 동의해 준 가족들에게 너무 고마울 따름이지요."

그는 이제 가슴 속에 새로운 신념을 키우고 있다. 생전에 통일이 돼서 이번에 헤어지는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이 신념은 그를 새롭게 지탱시킬 원동력이 될 것이다. (부산일보 2000/08/25)


[남기고 싶은 이야기]] 최장 빨치산 송상준씨

부산지역 비전향장기수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빨치산활동을 한 송상준씨(73.부산 연제구 연산동). 그는 9월2일 북송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21일, 송씨는 자신이 20대를 보낸 경남 양산 신불산을 찾았다.

50년 전의 자신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간 자리에서 송씨는"오전 8시에 출발한 여행이 저녁 11시가 돼서야 겨우 끝났다"며 "옛날 같으면 바람같이 다녔을 곳인데 마음같지 않다"고 흘러버린 세월의 두께를 느껴야했다.

"지난 50년간의 투쟁과 아픈 세월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기겠습니다. 북으로 가더라도 7천만 겨레의 통일을 위한 작은 씨앗이 되고 싶습니다."

3년여의 빨치산 활동과 30여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송씨가 얻게된 제2의 삶을 위해 준비한 것은 옷 2벌과 양말 한 켤레가 전부.

송씨는 "내가 이곳에서 가져가야 할 것은 50년을 버틴 믿음과 통일에 대한 희망 뿐"이라고 말했다.

192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송씨는 지난 50년 7월 6.25전쟁이 발발하자 함양군 안의면 지리산자락에서 빨치산에 가담,휴전 이후까지 지리산과 신불산 구덕산을 오가며 빨치산 활동을 하다 54년4월 부산 구덕산으로 왔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그후 54년 12월 1심에서 사형선고,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송씨는 60년 4.19혁명으로 징역 20년으로 감형된 뒤 76년 12월 출소했으나 사회안전법에 의해 89년 5월까지 보호감호를 받았다.

32년여간 전향을 거부했던 송씨는 "전향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종이 한장에 불과한데 이 때문에 숱한 사람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며 "인간의 신념은 강요나 억압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고 말했다.

송씨는 출소 후 아내인 김태임(74)씨를 지난 90년 부산역 소각장에서 근무하면서 만났다. 아내 김씨는 남북을 통틀어 유일한 가족이다.

송씨는 "이산가족들이 조금씩 상봉하는 마당에 우리는 또다른 이산가족이 되게 생겼다"고 웃으며 "통일이 되기 전에는 만나기 힘들 것 같은데 아내와의 동행을 인정치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며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50년간의 고통과 그리움으로 단단히 담금질된 송씨에게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에 앞서 홀로 남겨질 아내의 모습은 무거운 짐인 듯하다. (부산일보 200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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