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 10시 5분 판문점 북쪽으로 역사적 송환
호텔 마당에 취재진, 가족, 그간 함께 했던 남쪽의 송환추진위원회 인사들이 아니라면 이들의 광경은 어느 노인정 효도관광쯤으로 여겨질 그림이었다.
이날 오전 6시 이른 아침 식사 후 호텔마당은 송환에 설레 뜬눈으로 서울의 마지막 밤을 새운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로 들떠 있었다. 한두 명씩 가족이 모여 마지막 안부를 하며 정말로 떠나는 이들을 붙들고 울고, 웃고 기념사진 찍고 남쪽을 떠날 역사적인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안영기씨는 "세시간 후면 조국 북쪽에 닿고 북녘 친지들, 존경하는 국방위원장 동지를 만날 것을 생각하니 기쁘기 그지없다"며 솔직한 심경을 내비쳤다.
홍명기씨도 "초저녁 잠시 눈을 붙이고는 잠이 안오데"라며 송환소감을 대신하였다.
노모와 헤어지는 신인영씨는 누이에게 "이번 장관급회담 100명 교환방문에 어머니가 포함될 수 있도록 신청해 보라"며 어머니와 부둥켜 안은 채 안타까와 했다.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꼭 다시 만납시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든 민가협 회원들이 나와 이들의 가는 길을 끝까지 따뜻이 환송했다.
이날 판문점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하기에 앞서 비전향 장기수들과, 후원회원, 가족들은 헤어지기를 못내 아쉬워 했으며, 마지막 기념촬영 자리는 끝내 울음바다를 이루고 부둥켜안고 잡은 손을 놓지 못하였다.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이들은 오전 8시 북악 파크텔에서 버스 3대와 앰뷸런스를 이용해 자유로, 임진각을 거쳐 판문점으로 이동했다. 6.15 남북공동선언에 명시된 비전향 장기수의 역사적 북송은 이렇게 조촐하고 다소 덤덤하게 진행되었다.
이들 송환 비전향 장기수가 가는 마지막 길목인 자유의 다리 위에는 50여명의 월북자 가족, 국군포로 가족들이 나와 북에 있는 가족의 송환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며 시위를 벌이는 소동이 있었다.
송환을 하루 앞둔 비전향 장기수
북악 파크텔에서 남쪽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
9월 1일 송환을 하루 앞둔 비전향 장기수들은 자신들이 출소후 머물던 집을 떠나 오후 1시경 평창동 북악 파크텔에 집결해 송환을 위한 통관절차를 밟았다.
이날 평소 중풍등으로 거동할 수 없는 류한욱씨와 일본과 일본인 납북문제로 미묘한 문제를 빚고 있는 신광수씨를 제외한 61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은 오전 일찍 서울, 과천, 광주, 대전 등지에서 자신들이 머물던 집을 떠나 호텔에 도착하여 그 동안 소장한 짐과 선물 보따리 등을 접수시켰다.
우용각씨는 "간다간다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서도 실감이 없었는데 짐을 부치니 이제야 가는구나 실감이 난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달도 하나, 해도 하나, 민족도 하나 선생님들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직접 제작한 현수막을 손에 들고 환영 나온 비전향 장기수 후원회 회원이라고 밝힌 최재기(55)씨는 이들의 송환에 대해 "정이 들어 섭섭하나 가시게 돼 매우 기쁘다"고 소감을 밝히고 "자신도 과거에 그 상황이었다면 그러했을 것이다. 역사의 희생자들께 배우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통일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
윤희보, 이경구, 김영달씨 등은 부인과 이별을 앞두고 못내 아쉬운 듯 "가슴이 아프다"며 말을 잇지 못하고 "몸 건강하게 지내면 곧 다시 만날 것"이라고 애써 위로하는 모습으로 이별하였다.
송환되는 장기수들의 화물은 대부분 자신의 소지품보다는 남쪽의 가족, 후원회 등 지인들로부터 받은 선물이 대부분으로 11.5톤 트럭 3대가 동원되었다.
광주 통일의 집에서 생활한 이재룡씨는 "자신의 짐이야 별 것 없고 감옥에서 읽던 일한 사전 등 사전 두 권, 사진, 주고받은 편지 정도와 옷가지가 전부이나, 광주의 따뜻한 이웃들이 선물로 준 냉장고, 텔레비젼 등이 있어 보따리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함께 광주에 살던 이공순씨는 "이러한 선물을 꼭 필요해서라기 보다 남쪽의 많은 분들이 우리를 도와주고 살펴줬던 정성을 받고 이 마음을 북쪽의 동포들에게 전하는 것이 남북의 화해와 통일에 커다랗게 기여할 것이라 믿어 거절하지 않고 다 받아가기로 했다"며 짐이 생각보다 많게 된 사연을 설명하였다.
비전향 장기수의 북송 준비
남북간 합의에 따라 9월 2일 북으로 송환될 비전향 장기수들의 하루하루는 매우 분주하다.
짧게는 15년 길게는 43년까지 복역한 후 출소한 이들은 남한에 가족이 있어 개별적으로 거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울 봉천동, 갈현동과 대전의 `만남의 집` 과천 `한백의 집` 광주 `통일의 집`등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북송을 사흘 앞둔 30일 오후 봉천동 만남의 집에서는 장기수들이 짐을 싸느라 어수선했다.
자신이 입었던 옷과 소지품 등이 대부분인 짐꾸러미는 1인당 3∼5개 정도로 매우 간단했다. 그 짐 속에는 출소하고 만난 사람들과의 편지와 사진 등이 제일 소중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류운형(77)씨는 흐트러져 있던 사진들을 앨범에 끼워 놓으며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을 위해 애썼어. 참 고마운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의 마음을 꼭 담아 북에 돌아가고 싶어"라고 말하며 민가협 가족들과 찍은 사진을 쓰다듬었다.
거동이 불편한 한백렬(80)씨도 손수 사진을 정리하며 "남한에서의 내 삶이야" 라고 빙그레 웃으며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미 짐을 다 챙기고 외출 준비를 하던 신광수(72)씨도 감옥에서의 생활을 회고했다. 그는 "물리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의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의리를 지킨 사실만으로 주변에서 높게 평가해 주어서 부끄럽고 고맙다. 너무나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다"라고 마음을 전했다.
장기수들의 짐 속에는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지난 8월 14일 `장기수 환송대회`에서 민가협과 송환대책위로부터 받은 남한의 흙 항아리였다. 단일기에 싸여 있는 흙을 만지작거리며 홍경선(76)씨는 "이 흙을 지금은 가져가지만 곧 다시 밟을 수 있을 거다"라고 말했다.
김선명(75)씨 등은 그 동안 친분을 나눴던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고 집에는 없었다.
갈현동 만남의 집에서도 역시 남쪽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박완규(71)씨는 여동생에게 "몸 건강하게 잘 지내라. 그리고 꼭 다시 만나자"라는 편지를 쓰고 그 속에 자신의 사진을 동봉했다. 또한 박씨는 남쪽 사회에 대해 "민족적 형식에 내용은 사회주의적 사회"였으면 하는 바램을 말했다.
우용각(71)씨는 "한국 사회에서는 통일이 제일 중요하다. 자주적 노력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해 남북이 많이 노력하자"고 말했다.
한편 이 곳에서는 전향서를 썼던 장기수들도 만날 수 있었다.
강담씨는 "내 비록 고문과 옥살이에 못 이겨 전향서를 썼지만 북으로 꼭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며 북송되는 장기수를 한번씩 꼭 안았다.
김익진(70)씨는 북에 살고 있는 가족을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1일 평창동 북악파크넬에 모여 방북절차를 밟은 다음 2일 북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아직 교통편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으나 판문점을 통한 육로를 택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나친 보안 검색에 비전향 장기수들 강력 항의
비전향 장기수 북한송환 절차를 맡은 대한 적십자사와 세관, 관계기관은 통관 물품 접수를 시작하자마자 손발이 맞지 않아 허둥대었다. 특히 통관불허 품목에 대한 기준이 없어 자의적인 처리로 물의를 빚었다.
9월 1일 북악파크텔에서 진행된 송환 비전향 장기수들이 가져갈 소지품, 화물 접수 과정에서 관계기관이 공문으로 제시한 휴대금지 목록에 있지 않은 명함, 주소록, 필름, 사진, 편지 등을 불허해 비전향 장기수들이 통관 심사 접수를 거부하는 등 강력 항의하였다.
이두균씨는 자신이 소장한 사진 두장이 통관 불허되자 그 자리에서 항의 표시로 직접 사진을 찢으며 항의하고 우용각씨도 불허된 사진과 편지를 가족들에게 되돌려 주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은 지나친 보안검색을 성토하며 통관절차에 응하기를 거부해 2시간 가량 화물 접수와 검색이 지연되었다.
관계기관의 한 실무담당자는 "보안검색은 일반적 관행에 따른 조치이고 압수가 아닌 불허"라 해명하고 "호텔에서 실시하는 관계로 검색대가 없어 일일이 사람이 실시하다보니 생긴 일"이라며 변명하였으나 격노한 비전향 장기수들을 설득시키기엔 부족했다.
접수를 거부한 비전향 장기수 홍경선씨는 "한 맺힌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한을 품게 만드는 처사"라며 강력히 항의하고 권오헌 송환추진위원장도 "이런 보안 검색은 일반인들이 출국할 때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인권침해"라고 말하고 "이들이 가지고 가는 물품이 국가를 심각히 위협할 만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며 "화해와 협력을 위한 송환의 참뜻에 역행하는 처사"라며 관계기관의 무모함에 대해 비판했다.
송환되는 석용화씨의 조카 석규관(65)씨는 "송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일부 세력들의 명분 찾기식 행태"라고 격렬히 비난하며 "기관과 이들 세력은 대세에 순응해야 할 것"이라며 충고했다.
통관 접수 거부 사태는 관계기관과 송환추진위원회 대표간의 막후 협상을 통해 송환추진위원회를 대표한 2명의 참관인을 입회시켜 X-ray 보안검색대를 통과해 문제가 없는 경우 모든 소지품과 화물을 통관키로 합의하면서 일단락되었다.
협상에 참여한 한 관계기관 담당자는 "우리들도 통관절차를 간소화하라고 지시했으며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며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일선 담당자들의 실수"라며 유감과 사과의 뜻을 표했다.
이런 사소한 문제조차 쉽게 처리되지 않는 상황은 비전향 장기수 북송을 둘러싼 갈등이 우리 사회 내부에 엄존한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있을 수 있는 해프닝으로만 보기엔 불안을 지울 수 없는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연합뉴스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