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야 한다, 만날 수도 있다는 류의 당위성 발언이 아니었다.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현실성 발언이었다. 김은혜 청와대 대변인의 ‘발언 수정’ 논란이 일 정도로 민감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이명박 대통령이 그렇게 언급했다. 무언가 추진되거나 확신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발언이다.
청와대에서는 “현재 구체적으로 추진되는 것은 없다”고 발뺌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 속에 더 확증적인 것도 있다. “열린마음으로 사전에 만나는 데 대한 조건이 없어야 한다”는 발언이 그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물밑 접촉이 진행되고 있으며, 그 물밑접촉에서 ‘정상회담 조건’으로 난항을 겪고 있음을 예상케 하는 발언이다. 즉 북측이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으며 남측은 ‘무언가’를 거부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밑 접촉에서 조건에 대한 공방이 있을 정도로 남북 정상회담 논의가 남북 당국 사이에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전 접촉에서 조건 논의를 한다는 것은 논의가 상당히 진척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상회담 발언이 있기 전부터 몇 가지 변화 조짐이 보였다. 위성락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19일부터 24일까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위성락의 방미에 대해 한 외교당국자는 25일 “(비핵화-평화체제 논의가) 서로 상보적으로 시너지를 내도록 적절한 시점에서 (평화협정 회담이) 시작되고 운영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우리가 (얘기하는 것이) 선 비핵화 요구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비핵화, 평화체제 협상 병행’을 시사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입장은 선 비핵화, 후 평화체제 협상이었다. 11일 북한 외무성의 평화회담 제안에 대해 12일 외교통상부 대변인이 “북한이 6자회담을 재개하고 북한 비핵화 과정에 진전이 있으면 9.19 공동성명에 명기한 대로 직접 관련 당사국들이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평화체제 협상을 할 수 있다”고 논평했다. 그런 입장이 위성락 본부장의 미국 방문 후 대폭 수정된 것이다.
위성락 본부장이 미국을 방문해서 어떤 논의를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위성락 본부장이 미국에 도착하던 1월 19일,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앞으로 수년 동안 정전협정을 영구적인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해 북한과 협상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평화회담 논의에 상당히 열린 자세로 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성락 본부장 미국 방문 전의 한국 정부 입장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해진다. 미국은 한국 정부의 입장 수정을 요청하기 위해 위성락 본부장을 미국에 불러들인 것이고, 결국 위성락 본부장은 미 국무부의 설명에 설득된 것이다. 아직 한국 정부가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한국 정부의 입장 역시 ‘평화회담 논의에 열린 자세’를 갖기로 한미 간에 양해가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짚을 것이 있다. 미 국무부 아태담당 차관보인 커트 캠벨이 이명박 대통령을 한껏 추켜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커트 캠벨은 지난 해 9월 이명박 대통령이 그랜드 바겐을 주장했을 때 “잘 모르겠다”고 발언하여 논란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으며,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의 아무개가 모른다고 하면 어떠냐”고 불쾌한 심정을 직접 드러내기도 했던 주인공이 커트 캠벨이었다. 그런 커트 캠벨이 “그동안 여러 정상회담을 지켜봤지만 지난해 1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만큼 생산적인 것을 본 적이 없다. 이 대통령으로부터 다른 외국 지도자로부터 받지 못했던 긍정적이고 신뢰감 있는 리더십을 느꼈다”고 발언한 것이다.
2월 2일 방한을 앞두고 워싱턴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방한을 앞두고 한국 특파원들 앞에서 나온, 다분히 외교적 발언이다. 중요한 것은 이같은 외교적 발언의 배경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추켜세움으로써 미국 정부는 한국정부로부터 ‘비핵화와 평화회담 병행’이라는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듣고 싶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위성락 방미 이후 한국정부의 논의가 촉발되고, 커트 캠벨 자신이 방한하고 돌아갈 즈음 그와 같은 입장 표명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혹 모를 일이다. 이미 이명박 정부의 입장 선회 입장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사의(謝意) 표명이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북핵 문제’에 대한 한미 교감이 상당한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이 글은 새세상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주간통일동향 [통일돋보기 20호]와 동시 게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