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겨레의 만남`에서 흘린 눈물은 통한의 강이 되어 분단의 벽을 뒤흔들었다.
이어 9월2일에는 북송을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쪽으로 가게 된다. 북으로 가는 장기수들은 길게는 45년에서 짧게는 15년 동안 감옥에서 징역살이를 했는데, 63명의 복역기간은 도합 2011년, 개인으로 따지면 평균 32년이 조금 넘는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국가보안법 위반이 41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8명, 반공법 위반 2명, 형법 위반 1명이다.

전향 거부 철창속 32년

비전향 장기수들은 추위와 굶주림, 오랜 독방생활에서 오는 지독한 외로움을 감내해야 했으며, 전향을 강요하는 무자비한 폭력에 맨몸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전향 공작반 장정들이 포승줄로 사람을 묶어 지하 콘크리트 바닥에 누이고, 입에 숟가락을 넣어 재갈을 물린 다음 주전자에 담긴 소금물을 입 속에 부어 넣는 고문 방법으로 전향을 다그쳤다는 게 당사자들의 얘기다.(김동기,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

혼자 누워도 발이 벽에 닿을 정도로 좁은 0.75평 방에 12명이 들어앉아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고 얘기도 제대로 나눌 수 없는 살인적인 환경에서 40여일에 걸친 겨울을 보내야 했고, 그런 다음 한명씩 깡패방에 붙들려가 각종 고문을 당하면서 죽기 직전까지 맞은 경우도 있었다.(홍경선, <0.75평, 지상에서 가장 작은 내 방 하나>)

전향을 강요하는 혹심한 고문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도 있고, 고통에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정신이상이 된 사람도 많았다는 것이 장기수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이 장기수들이 전향을 한사코 거부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장병락씨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전향을 안한 것은 인간에게는 육체적 생명말고도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정치적 생명이 있고, 그런 `사람다움`을 강제로 포기하라는 폭력 앞에서 굴복할 수는 없었다.”(<양심수 후원회 소식, 통권, 99호>)

또 45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씨는 “무엇이 이 긴 세월의 고통을 참고 이겨내도록 했던 것일까. 내 평생을 바쳐 양단된 조국을 통일시켜야겠다는 꿈, 그 꿈이 아니었으면 그 긴 세월의 고립감과 외로움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고 밝혔다.(<0.75평>)한 장기수는 “조국이 나를 42년 동안 옥살이를 시켰지만 원망하지 않습니다. 분단된 조국의 비극일 뿐이죠”라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이종환, <끝나지 않은 여정>)

맞는 말이다. 비전향 장기수들이 당한 고통은 결국 분단에서 비롯된 것이고, 통일을 가로막고 사상의 자유를 빼앗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 분단정권의 잔혹한 억압행위의 한 단면이다. 그들이 지닌 공통의 꿈은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일이고, 그 꿈을 지켜내고 펼치기 위해 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외세와 분단권력에 맞서 인고의 세월을 살아왔다. 그들은 입을 모아 아무 한 일 없이 오랜 세월 감옥생활만 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에게는 감옥생활이 꿈을 실현하기 위한 일이었다. 비전향이 곧 꿈을 소중하게 보존하는 길이 되었다.

통일 꿈 펼치려고

며칠 뒤 북으로 갈 장기수들의 마음 속에는 그 꿈말고도 또하나의 바람이 새겨지지 않을까. 장기수 이공순씨의 수첩에 적혀 있다는 문병란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아/ 그대 손짓하는 여인아 은하수 건너/ 오작교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 딛고 다시 만날 우리들 연인아, 연인아/ 이별은 끝나야 한다/ 슬픔은 끝나야 한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김금수 /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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