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화와 조국의 통일에 평생을 바쳤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23일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민주화와 조국의 통일에 평생을 바쳤던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면에 들었다.

23일 오후 6시 57분, 김 전 대통령은 폐식을 끝으로 6일간의 국장을 마치고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안장됐다.

이로써 오후 3시 30분 국회 빈소를 떠나 민주당 당사와 동교동 사저, 서울광장, 서울역을 거친 3시간 30여 분 동안 진행된 대장정이 막을 내렸다.

안장식에는 이희호 여사를 비롯해 세 아들 홍일.홍업.홍걸 씨 등 유족 25명과 정세균 대표 등 민주당 의원 40여 명, 임동원.정세현.전윤철.한명숙.이해찬.손숙 등 국민의 정부 각료, 권노갑.한화갑.김옥두.한광옥.남궁진 등 전직 비서 10여 명과 함께 이달곤.유인촌 등 장의위 고문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 오열하고 있는 이희호 여사와 위로하는 3남 홍걸 씨. [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이희호 여사는 시종일관 고개를 떨어뜨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등 힘겨운 모습이었으며, 입을 가리고 소리죽여 울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장남 홍일 씨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이 여사는 오후 5시쯤, 영구차가 국립현충원에 도착하면서부터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며느리들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오후 5시 44분쯤 이 여사의 분향을 시작으로 아들과 유족, 장의위원장, 민주당 의원, 국민의 정부 각료, 전직 비서, 비서실 관계자 등 순으로 헌화와 분향을 마쳤다.

분향 도중 이 여사가 입을 가리며 계속 울자 뒤에 있던 셋째 아들 홍걸이 어깨를 주무르며 "울지 마시라"고 위로하기도 했다.

앞서 천주교를 시작으로 한 불교, 기독교, 원불교 등 4대 종단의 종교의식도 진행됐다.

▲ 김 전 대통령의 시신이 묘소 예정지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오후 6시 5분쯤, 이희호 여사 등 유가족들이 운구행렬을 따라 묘소 예정지로 이동했고, 곧바로 하관이 진행됐다.

이 여사는 하관하는 장면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계속 숙였고, 아들 홍걸 씨는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

관 위에 태극기와 봉황과 무궁화가 새겨진 나무판 7개가 올려졌고, 전남 신안군 하의도 생가에서 가져온 한 줌의 흙이 떨어지면서 이후 삽으로 흙을 뿌리는 허토 의식이 시작됐다. 묘소 곳곳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오열을 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김옥두 전 의원은 허토하며 오열했고, 비서진들은 "대통령님, 사랑합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박지원 의원도 입술을 깨물며 허토를 했다.

하관을 마치고 나서 명기와 지석 등을 묻고 흙과 석회로 광중을 채우고 흙으로 봉분 만드는 '성분'이 이어졌다. 관과 함께 묻힌 지석에는 고인이 숱한 역경을 이기며 살아왔던 일대기가 적혀 있다.

▲ 이희호 여사가 삽으로 흙을 뿌리는 허토 의식을 하고 있다. [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이 의식과 함께 조총 3발이 발사되고 묵념이 이어졌고, 진혼곡이 울려 퍼지면서 2시간가량 진행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안장식이 끝났다.

김 전 대통령의 묘역은 국가유공자 제1묘역 하단부에 자리를 잡았다. 묘역은 고인의 뜻에 따라 최소한 검소하게 마련됐으며, 봉분과 비석, 상석, 추모비 등을 포함해 264제곱미터, 가로.세로 각각 16미터다.

주변에 찾아온 시민 700여 명은 이희호 여사에게 "힘내세요", "건강하세요" 등을 외치며 위로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김대중 前대통령 지석(誌石) 문안(전문)>

公의 성은 金氏, 본관은 金海, 휘는 大中, 호는 後廣이다. 1924년 1월 6일(양력)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아버지 김운식, 어머니 장수금 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암서당과 하의도 보통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은 대중의 영특함을 살리기 위해 목포로 이사했고, 대중은 전학 간 목포 북교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939년 5년제 목포 상업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뒤 목포에 있는 해운회사에 입사했다. 사업에 성공하여 유망한 청년실업가로 명망이 높았다. 1945년 차용애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1950년 9월 목포형무소에 갇혔다가 인민군들의 무차별 학살극에서 극적으로 탈출, 살아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치와 부산 정치파동을 현지에서 겪으며 정치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54년 목포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6년 장면박사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듬 해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이다. 선거에서 거푸 낙선을 하다가 1961년 5월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5.16군사쿠데타로 의원의 꿈이 무산되었다. 1962년 5월 정치적 동지인 이희호와 결혼했다. 1963년 11월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집요한 낙선 공작에도 당선되어 이름을 떨쳤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대통령후보로 뽑혔으나 이듬 해 치른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했다.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 중 승용차가 대형트럭에 받혔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 1972년 10월 유신이라는 제2의 쿠데타가 일어나 망명길에 올랐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한국정보부에 의해 납치당해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국에 끌려와 오랜 기간 가택연금을 당했다. 1980년 5월17일 신군부 세력에 잡혀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미국 등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구명 운동으로 감형되어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1985년 망명 생활 2년 만에 귀국을 강행, 1987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하여 제1야당 총재가 되었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패배했다. 그해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여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을 설립하였다. 1995년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7년 다시 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1998년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5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열었고, 그해 12월 한국인으로는 처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03년 2월 퇴임하여 서울 동교동 사저에 머물며 남북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86세를 일기로 서거하시었다. 퇴임한 국가 원수로는 처음 국장으로 모셔졌고, 2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묻히셨다. 자손으로는 아들 홍일, 홍업, 홍걸이 있고, 손자와 손녀는 지영, 정화, 화영, 종대, 종민, 종화, 종석이 있다. 수많은 학위를 받았고, <옥중 일기>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자료제공 : 장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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