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남 노동당 비서를 단장으로 한 북측 ‘특사 조의방문단’이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에 조문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하는 등 2박 3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23일 낮 돌아갔다.

이번 북측 특사조문단은 적극적인 당국간 대화 의지를 보였고, 22일 현인택 통일부 장관과 김양건 통일전선부 부장과의 면담에 이어 23일 청와대를 예방해 이명박 대통령을 만났다.

북측 특사조문단은 이번 방문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가 담긴 구두 메시지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등 강력한 남북관계 개선의지를 보여줬고, 우리 정부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설명하는데 주력했다고 발표했지만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화해모드 전환 예상보다 빠르고 광폭”

무엇보다도 이번 북측 특사조문단의 행보 중에서 눈길을 끈 것은 주도적으로 현 정부 들어 단절된 남북 고위 당국자 대화에 나서서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밝힌 점이다.

김기남 비서는 도착 첫날인 21일부터 “남측의 누구라도 만날 사람은 다 만나겠다”고 적극적인 대화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고, 22일 현인택 장관과의 면담도 “북측이 우리 당국자를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 면담이 성사됐다”는 후문이다.

특히 김양건 부장은 현인택 장관 면담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구두 메시지 전달을 위해 이명박 대통령을 접견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결국 체류 일정을 하루 연장해 가며 23일 오전 청와대를 예방해 김기남 비서가 김 위원장의 메시지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하는 등 ‘특사’ 역할을 수행했다.

남측 정부의 대북정책에 특별한 변화가 감지되지 않은 상황에서 최근 현정은 회장의 방북을 시작으로 이처럼 북측이 남북관계 개선에 전격 나서고 있어 그 배경에 눈길이 쏠리고 있다.

홍익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올해 3,4월부터 북한이 전문가들 예측보다 2,3개월 빠른 행보에 나서고 있다”며 “4월 초 장거리로켓 발사 직후 5월 25일에 2차 핵실험을 했고, 남북 화해국면 모드 전환도 당초 예상보다 빠르고 폭도 광폭이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북측이 발빠르고 전격적인 남북관계 개선 행보에 나선 이유는 대체로 북미관계 개선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미국 조언 따라 김 위원장이 전략적 결단”
“남북 간에 미리 접촉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는 “이번 계기를 살려서 남쪽 의지를 확실히 타진하고 대화할 의지가 있다고 하면 할 것 같다”며 “가급적 조금 양보해서라도 대화로 가려고 하는 것은 2000년 상황과 유사하게 북미관계 타결로 가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를 압박, 고립시켜서 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유연한 방법을 취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90년대 중반 북미간에 핵 문제로 전쟁 일보 직전에 이를 정도로 첨예한 대결국면이 펼쳐지다 2000년 10월 조명록 차수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오가며 ‘북미공동코뮤니케’가 탄생하는 극적 반전이 이루어진 바 있다. 당시에도 북미간 전격 타결 전에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던 경험이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미국의 조언이 컸다고 생각한다”며 “북미관계 진전을 위해서 남북관계 진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미국의 조언에 따라 김 위원장의 전략적 결단이 이뤄졌을 것”이라고 봤다.

정창현 교수는 “클린턴 전 대통령이 평양에 갔을 때 한국과 일본 정부에는 자기가 다리를 놔주겠다고 말한 것으로 안다”며 “1999년 하반기에서 2000년부터 북한이 전방위 외교로 나왔듯이 지금 국면은 북이 북미관계를 축으로, 남북관계와 북일관계에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고 해석했다.

실제로 최근 퀴노네스 전 국무부 북한담당관은 <미국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과 일본이 막후채널을 가동해 서로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한 대북 전문가는 “남북 간에 미리 접촉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며 “원세훈 국정원장이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던 것도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남북 사전 조율설을 제기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8.15경축사에서 ‘신 평화구상’에 머물렀지만 애초엔 ‘신 평화체제 구상’을 검토했다는 후문이 있고, ‘재래식 무기.병력 감축’과 ‘남북 경제공동체 실현을 위한 고위급 회의 설치’를 제안한 점도 이같은 관측의 배경이 되고 있다.

또한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실패한 대통령'으로 남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중도'를 표방하고 경색된 남북관계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찾고 있다는 관측도 나돌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구두 메시지는 무엇?

북측은 최근 현정은 회장의 방북시 개성.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합의해주고 ‘12.1 조치’ 해제에 이어 ‘특사 조의방문단’ 파견 등 일련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발빠른 행보를 보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마침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구두 메시지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북한 조문단은 남북협력의 진전에 관한 김정일 위원장의 구두 메시지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민감성’을 이유로 밝히지 않고 있다.

소식통들은 일단 그간 현 정부 하에서 남북관계가 단절된 과거를 딛고 새로운 남북관계를 위해 노력하자는 뜻을 담았을 것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양무진 교수는 “구두 메시지나 서면친서나 내용상에 있어서는 새로운 국면 하에서 새롭게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고 화해협력을 활성화시키자는 메시지가 담겼을 것으로 본다”며 특히 “이를 위해 고위 당국간 회담이나 다방면 교류협력, 나아가서는 정상회담까지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담겼을 수 있다”고 관측했다.

이명박 정부와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야 하느니만큼 장관급이나 총리급 회담과 같은 고위 당국간 회담으로부터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고, 최고지도자의 결단이 무엇보다 중요한 남북관계의 특성상 특사 교환도 유력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특사 교환은 멀지 않은 시기에 제3차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 경우에 따라 엄청난 폭발력을 가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전한 메시지 내용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긴장완화나 경협 관련 예상치 못한 의외의 대남 제안이 담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 정부의 일관되고 확고한 대북 원칙 설명”

남측 정부는 내부의 분분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일단 북측 특사조문단의 대통령 접견 요구를 받아들였다. 북측 의도에 말려들지 모른다는 우려나 보수층의 정서에 대한 고려, 대통령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에 따른 불쾌감 등 걸림돌도 많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면담을 수용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 대통령은 우리 정부의 일관되고 확고한 대북 원칙을 설명한 뒤 이를 김 위원장에게 전달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전했다.

현인택 장관과 김양건 부장과의 면담에 대해 통일부 당국자는 “현 정부 출범 이후 일관되게 추진해온 대북 정책의 큰 틀을 설명했다”며 “원칙과 유연성의 입장에서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정부의 입장을 설명했다”고 전했다.

이 당국자는 “이번 면담이 우리 정부에 대한 북한의 인식전환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며 “북한도 우리 정부의 입장을 잘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도 내놨다.

겉으로 보기엔 현 정부의 상호주의에 입각한 ‘대북 원칙’을 강조한 것으로 보이지만 현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에 대한 나름의 ‘진정성’을 전달했다는 뜻으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현 정부는 ‘상생.공영의 대북정책’이 대북 강경정책이 아니라 대북 포용정책의 일환임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면서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대화 의지를 표명해왔다.

북미협상 진전시 ‘비핵.개방.3000’ 구상 현실로

이같은 맥락에서 현 정부가 ‘비핵.개방.3000’ 구상에 따른 ‘경제, 교육, 재정, 인프라, 생활향상 분야에 걸친 대북 5대 개발 프로젝트 추진’ 의향이 있고 국제적 지원을 포함한 400억 달러 재원투여를 거론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현 정부의 ‘일관되고 확고한’ 대북정책으로 평가되는 ‘비핵.개방.3000’은 북미 간에 핵문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공허한 슬로건이자 남북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하지만 북핵문제의 진전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어차피 북미 관계가 본격 협상 국면에 접어들면 현 정부가 선결 조건으로 내걸고 있는 ‘비핵화’ 문제가 급진전 될 수 있고 ‘비핵.개방.3000’에서 ‘3000’구상을 실행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아마도 우리 정부의 ‘상호주의’와 ‘선 핵포기’ 원칙을 전제로 한 ‘비핵.개방.3000’구상을 제시하면서 북측이 핵포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통해 대규모 남북경협의 기회를 가질 것을 제안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미 남측에서 제철과 조선 분야는 물론 SOC(사회간접자본) 등에서 대규모 경협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홍익표 전문연구원은 “이명박 정부는 위기국면에서 남북관계 책임론으로 굉장히 어려웠는데, 그런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북이 도와주는 셈이므로 북측의 의도에 호응해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남북관계 진전이 북핵 해결 진전 이끈다”

현 정부 집권기간 동안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일거에 해소되기는 어려운 만큼 당분간 밀고당기기가 이어지면서 점차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양무진 교수는 “북핵문제와 북미관계의 진전과 남북관계 진전 간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폭과 속도는 조절할 것으로 보여진다”며 “북한의 전략적 판단을 우리 정부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속도조절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산적한 남북관계 현안들도 해결을 위해 일정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현실적 문제도 있다.

당면해서 추석 이산가족 상봉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남측이 26-28일 금강산에서 열자고 제안해 둔 남북적십자회담에 북측이 응해 나와야 하고, 이번 특사조문단 방문을 계기로 다시 연결된 판문점 적십자 연락채널을 유지하는 문제 등이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

북측이 조사 중인 연안호 선원 석방과 금강산.개성 관광 재개 문제, 개성공단 활성화도 현안으로 대두돼 있다. 무엇보다도 이명박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한 비난이 잦아들 것인지도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다.

북측 특사조문단의 청와대 예방 직후 김기남 비서는 “좋은 기분으로 간다”고 밝은 표정을 보였다. 북한 관영 통신인 <조선중앙통신>도 23일 오후 특사조문단의 평양 도착과 이 대통령 면담 사실을 연이어 신속하게 보도했다.

공은 우리 정부에게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로 북한이 기존의 전략전술을 벗어난 행보를 보인만큼 우리 정부도 기존 대북 원칙에서 벗어난 유연한 행보를 보여야 할 것”이라며 “남북관계 진전이 북핵문제 해결의 진전을 이끈다는 전략적 마인드를 가지고 좀더 적극적 행보에 나서길 바란다”고 제언하고 있다.

청와대 당국자가 특사조문단 예방 뒤 “이날 면담은 미국, 중국, 일본 등 각국 조문단 접견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이라며 “이제 남북관계도 특수한 관계의 틀을 벗어나서 국제적인 보편타당한 관계로 발전해나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쓸데없는 '기싸움'을 벌이거나 아전인수식 자화자찬에 빠진다면 남북관계 개선의 절호의 기회마저 놓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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