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지방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수백 만의 인파가 몰렸다. [사진-김대중 사이버 기념관]
"박정희 씨여! 당신에게 이 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일편의 양심이 있으면 당신에게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할 지각이 있으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3선 개헌 만은 하지 마라."

40년 전이다.

69년 7월 19일, 효창공원에 모인 시민을 향해 연설하던 김대중은 당시 민주주의에 대한 양심을 강조하며 국민과 역사에 호소했던 혈기왕성한 40대였다.

2009년 6월 11일. 휠체어를 타고 청중 앞에 나섰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힘이 실렸다. 40년 전,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그와 함께,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6.15공동선언 9주년 기념연설에서였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독재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그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의 입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여겼던 '악'의 이름이 나왔다. '독재정권'.

▲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6월 11일, 6.15공동선언 9주년 기념연설에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며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고 호소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김 전 대통령은 새해 벽두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를 쏟아냈다.

1월 1일, 신년하례 인사말에서 그는 "우리는 올해 민주주의를 지켜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흘리고 싸운 자만이 쟁취할 수 있고 목숨을 바쳐 지킨 자만이 계속 향유할 수 있습니다"며 "저는 우리 국민은 그것을 해낼 것이라고 봅니다"라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정부의 대북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근본적인 전환을 촉구하던 2008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2009년, 그의 문제의식은 수십 년간 쌓아온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었다.

서거 이후 21일 공개된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일기에서도 '독재'가 등장한다.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서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 (2009년 1월 16일)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지난 1월 20일, 생존권을 외치며 건물 망루로 올라간 철거민들이 농성을 벌이고 이를 진압하려던 중에 6명의 목숨을 빼앗는 대형참사로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의 절절한 마음은 당시 일기장에 그대로 나타났다.

"용산구의 건물 철거 과정에서 단속 경찰의 난폭진압으로 5인이 죽고 10여 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젊은 시절을 다 바쳤던 그였지만, 인생의 마지막 자락에 선 그에게 이 시대는 또다시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당한 검찰 수사를 견디지 못하고 지난 5월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가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그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의 단행본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 보낸 글에서 그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놓아 외쳤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만든 민주주의입니까. 1980년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1987년 6월항쟁을 전후해서 박종철 학생, 이한열 학생을 포함해 민주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 지난 5월 29일, 故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을 찾은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그런데 독재정권, 보수정권 50여 년 끝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이제 좀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경제가 양극화로 되돌아가고, 남북관계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꿈같습니다, 정말 꿈같습니다."

그는 국민에게 호소했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뒷일을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굳은 결심을 했다. "마지막 날까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하겠다"며 국민들과 약속을 했다. 군부 독재에 맞서 나라를 지켜가자고 했던 40년 전처럼.

그러면서도 그는 이 땅의 민주주의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얘기했다.

지난 6월 3일, 미국 공영 라디오방송사 NPR과 동교동 사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에 대해) 위기감을 가지고는 있지만, 반민주적인 시도를 굴복시키고 민주화를 확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가 향년 85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다.

평생의 절반이 넘도록 외쳤던 '민주주의', 눈 감기 전까지 염원했던 '민주주의'는 세상에 남긴 자들의 과제가 됐다. 40년 전 그가 온몸으로 끌어안았던 시대정신은 이제 우리에게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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