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巨人)이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습니다. 우리가 김 전 대통령을 ‘거인’이라 부르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는 이 나라와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라의 위기에 온 몸으로 항거했고 또 민족의 진로에 행동으로 증언했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 5년 반의 투옥과 3년여의 망명생활, 6년 반의 가택 연금 등은 그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3전4기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룬 수평적 정권교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 합의, 노벨평화상 수상 등은 그의 영예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그가 모든 공과(功過)를 멀리하고 피안(彼岸)의 세계에서 영면(永眠)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아직 부족하고 시행착오를 일으키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이기에 그의 몸은 고이 보내드리지만 그의 꿈마저 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거인의 고단한 육신의 영면을 바라지만 그의 뜻만은 살아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거인의 잠을 깨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꿈을 기억하고 실현하는 것입니다. 생전에 고인은 숱한 꿈과 이상을 설파했습니다. 모든 걸 다 열거하기조차 벅찹니다. 우리는 특히 그가 세상을 뜨기 직전의 행보에 주목합니다. 그는 올해 초 이명박 정부에 대해 이 나라가 “민주주의, 경제, 남북관계의 3대 위기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후 5월 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때나 6.15공동선언 9주년 특별강연에서도 민주주의 문제와 남북관계 문제를 집중 제기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를 단순한 정치적 반대자의 억견(臆見)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한 평생 민주주의를 신봉한 의회주의자이자 통일 문제에 심혈을 기울인 민족주의자의 충언으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김 전 대통령의 삶과 역경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한국적 현실에서 민주주의 문제와 민족 문제는 동등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마침 김 전 대통령은 세상을 뜨면서까지 남북관계의 다리를 놓고 있습니다. 북측에서 조문단 파견을 제의해 왔습니다. ‘조문외교’라는 말도 있습니다. 민족 간에 ‘외교’라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북측 조문객의 방문이 남북관계 개선의 전환점으로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것이 거인의 잠을 깨울 수 있고 그리하여 거인의 뜻을 기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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