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지역에 137일간 억류되어 있었던 현대아산 직원 유성진(44)씨가 13일 전격 석방됐지만 석방 협상 과정과 북측의 조사내용 등이 공개되지 않아 여전히 중요한 의문점들이 남아 있다.

이날 북측은 개성공단 내 북측 출입국사업부에서 자기측 조사결과를 낭독하고, 추방 형식으로 남측에 유씨의 신병을 인계했다.

하지만 정부는 북측의 조사결과에 대해 이후 확인 과정을 거쳐 밝히겠다는 입장이다. 천해성 통일부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이 조사결과라는 것은 유씨가 장기간 억류된 상태에서 북측이 일방적으로 조사한 결과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해 북측의 조사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또한 천해성 대변인은 "정부는 북한측에 석방과 관련해서 사과나 유감표명을 한 사실이 없다"면서 "현대아산측은 자사 직원이 장기간 억류된 사건이 발생한 것과 관련해서 북한 당국에 유감을 표명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유씨의) 석방과 관련해서 (북측에) 대가를 지불한 사실은 없다"고 덧붙였다.

남북 당국간 물밑 소통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의문점은 과연 정부의 발표대로 남측 정부는 유감표명이나 대가 지불도 없이 현대아산 만을 앞세워 문제해결을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라는 점이다.

먼저 남북 당국간 대화 통로가 끊긴 상황에서 현대아산을 매개로 남북간 의사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북측이 현대아산을 통해 남측 정부에 요구한 내용은 무엇이었을 지가 궁금해진다.

일각에서는 경제지원이 반대급부로 약속됐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지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대가 지불'을 부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측도 '시인'과 '사과', 그리고 '재발방지'를 우선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같은 북측의 기본요구가 먼저 충족됐을 경우, 경제지원은 협상타결의 윤활유가 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번 유씨 석방이 현대아산을 통한 남북 당국간 간접 의사소통 방식이 아니었다면, 남북 당국간 직접 물밑교섭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지금과 같이 냉냉한 남북관계에서 직접 물밑교섭이 가능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

물론 남북 모두 유씨문제라는 걸림돌을 치우는 과정에서 남북관계 개선의 고리를 풀어야 할 필요성은 있기 때문에 이같은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현실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또다른 남북 당국간 간접 의사소통 방식으로는 미국을 매개로 남북 당국간 요구가 조율됐을 가능성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북해 유씨 문제를 직접 거론했기 때문에 북측이 요구사항을 미국을 통해 남측 당국에 전달했을 개연성이 있다.

북측도 북미관계의 개선에 발맞춰 남북관계 개선을 관리할 필요성이 있는 만큼 현단계 주요 협상 파트너이자 남측 정부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미국을 통해 문제해결을 시도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마지막으로 이번 유씨 석방 과정에서 남측 당국은 사실상 배제되고 현대아산이나 미국 등의 역할 등이 결합돼 해결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남는다. 물론 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북측이 남측 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에 실망해 아예 남측 정부를 제쳐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유씨 석방 직후 남측 정부가 사과나 유감표명, 대가 지불 사실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점은 이같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공개적이거나 명시적 형식이 아닌 다른 우회적 방식으로 남측 정부가 사과나 유감표명, 상응한 경제 지원 약속을 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북이 제기한 유씨 혐의... '시인'했나?

지난 3월 30일 북측은 통지문에서 유씨의 혐의에 대해 "공화국의 정치 체제를 비난하고 여성 종업원을 변질·타락시켜 탈북시키려 책동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이와 비슷한 억류 사례에서 혐의사실에 대한 '시인' 과정을 거쳐 추방 또는 사면의 방식으로 석방하는 절차를 밟아왔다.

가깝게는 지난주 미국 여기자 석방 시에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무조건적인 석방을 요구하던 태도를 바꿔 '잘못을 시인하고 사면을 통한 석방'을 촉구하면서 해법이 마련됐다.

멀게는 1968년 1월 23일 북측 영해를 침입해 나포된 '푸에블로호 사건'도 '유씨 문제' 처리방식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당시 억류자들은 북한이 제기한 '영해침해, 정탐행위' 등의 혐의를 시인하고 자필서명을 한 뒤 북.미 당국간 협상에 의해 풀려났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들은 '북의 강요에 의해 혐의를 인정했다'고 뒤집는다.

유씨도 풀려나기 전에 북측이 제기한 혐의를 인정하는 각서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유씨의 억류가 예상보다 길어지자 유씨가 북측이 제기한 혐의 일부를 시인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공공연하게 떠돌기도 했다. 

'각서 작성'과 관련 천 대변인은 "아는 바가 없다. 확인을 해봐야 될 것 같다"며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유씨가 범법행위를 북측 조사과정에서 시인했다고 하더라도 '푸에블로호 사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강요에 의해 작성한 것'이라고 향후 번복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북측이 유씨에 대해 '현대아산 모자를 쓰고'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점에 비추어 유씨의 신분에 대한 북측의 판단과 남측 당국의의 부인 또는 시인이 어느 정도 선에서 양해됐는지도 궁금증으로 남아있다.

유감표명, 재발방지, 어떻게 처리됐나?

지난주 미국 여기자 석방 시에 북.미간 말이 엇갈렸던 부분은 '유감' 또는 '사과' 표명이었다. 북한은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불법 입국하여 반공화국 적대행위를 한데 대하여 심심한 사과의 뜻을 표명"했다고 보도했지만, 미 국무부는 '사과'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푸에블로호 사건' 당시에도 '사과 표명'과 '재발방지 약속'에 대해 미국이 부인했지만, 이후 공개된 문서에서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1968년 12월 23일 '미 합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미 육군소장 길벝 H. 우드워드'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앞'으로 제출한 문서에는 "엄중한 정탐행위를 한 데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이에 엄숙히 사과하며,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미국 함선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해에 침입하지 않도록 할 것을 확실히 담보하는 바이다"라고 적시돼 있다.

유씨 석방과 관련해서도 '유감 표명'과 '재발방지'는 언급이 됐다. 다만 정부는 이에 대해 유감 표명한 사실이 없고 현대아산이 유감을 표명하고 재발방지 입장을 밝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정부의 유감표명 없이 현대아산의 유감표명만으로 유씨를 석방시켰을 지는 의문이다. 현정은 회장의 방북과 함께 유씨 석방은 시간문제로 알려졌으나 남북 당국 간에 '재발방지' 문제가 막판 변수로 불거져 유씨 석방이 며칠 늦어졌다는 분석이 나온 점도 주목된다.

홍익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 연구원은 "민형사상의 문제라면 현 회장의 유감표명으로 수습될 수 있지만 북은 사실상 간첩죄로 보면서 책임을 우리측 정보기관에 두고 있다"면서 남측 정부의 유감표명 없이 석방했다면 북한이 그동안 주장한 혐의와 억류에 대한 명분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 '남북합의서에 따라 처리'... 범칙금 부과됐나?

북한은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지구의 출입 및 체류에 관한 합의서'에 따라 유씨를 조사하고 추방 형식으로 처리를 마무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 6월 남북당국간 개성공단 2차 실무회담에서 북한은 이 합의서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합의서 제10조 신변안전보장 2항에는 "북측은 인원이 지구에 적용되는 법질서를 위반하였을 경우 이를 중지시킨 후 조사하고 대상자의 위반내용을 남측에 통보하며 위반정도에 따라 경고 또는 범칙금을 부과하거나 남측 지역으로 추방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유씨 석방 과정을 살펴보면 북한은 137일간 유씨를 '조사'했으며, 이날 남측에 조사내용을 통보하고 추방하는 형식을 택했다.

다만 북한이 유씨에 대해 범칙금을 부과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이 조항을 법적으로 해석했을 때 추방과 범칙금 부과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풀이했다.

이같은 여러 의문점들은 북한 당국에서 보도를 통해 먼저 발표하거나, 정부의 확인 과정을 거치는 등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진모(眞貌)가 드러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 관측이다.

한편, 한때 유씨가 평양으로 압송됐다는 일부 보도도 있었지만 천해성 대변인은 "우리가 확인한 것으로 보면 유씨는 그동안 개성지역에 억류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확인함으로써 의문점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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