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그의 이름 석자 만으로도 우리 현대사의 격동과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한 시대의 상징적 인물이다.

▲ 『장준한 평전』 표지. [사진제공-시대의창]
백범 김구와 단재 신채호, 만해 한용운 등 우리 현대사의 쟁쟁한 인물들의 평전을 숱하게 펴낸 저자 김삼웅 선생이 『장준한 평전』 첫머리에서 다룬 것은 다름 아닌 장준하의 죽음. ‘풀리지 않는 의문사’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계곡에서 등산 중 실족해 ‘추락사’한 것으로 발표된 그의 죽음은 외상이 거의 없는 등 ‘귀식이 곡할 노릇’이었고, 그만큼 그의 죽음은 안타까움과 비통함이 서려있다.

군부 독재자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 정면으로 맞서 ‘거사’를 준비하던 중 맞이한 갑작스런 그의 죽음에 대해 저자는 ‘실족사를 가장한 살해음모’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에 정면대결을 마다하지 않은 광복군 출신 장준하에게 차례진 비통한 최후였던 셈이라는 것.

자서전 『돌베개』를 통해 이미 그의 광복군 시절이나 해방전후 시기의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책에서는 다양한 주변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 보다 온전한 ‘민족주의자’ 장준하의 모습을 복원해내고 있다.

또한 『돌베개』에서 다루지 못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반독재 투쟁을 전개한 이른바 <사상계> 시기까지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평전’이 갖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더구나 그의 일본군 탈출부터 시작된 ‘금지된 동작’이 마지막 박정희 퇴진투쟁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의 청렴하고 원칙적인 태도 역시 흐트러짐 없이 일관됨을 드러내주고 있다.

물론 저자는 장준하의 한계나 문제점도 짚고 있다. <사상계>에 친일지식인 최남선 추모특집을 실었는가 하면, 5.16군사쿠데타에 대해 미온적인 논조를 보인 점 등을 가차없이 비판한 것이다. 나아가 장준하의 정계 진출에 대해서도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책’이었다고 비판적 논지를 펴고 있다.

일제하 광복군에서 김준엽(전 고대총장)과의 우정, <사상계> 시절 함석헌 선생과의 각별한 교류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적 인물들과의 인연과 <등대>, <제단>, <사상>에 이어 <사상계>로 연결되는 잡지 편집자로서의 궤적 등 그의 삶만큼이나 풍성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특히 장준하의 분신이랄 수 있는 <사상계>의 창간부터 폐간까지의 전 과정을 상세한 증언들을 곁들여 소개함으로써 그의 당시 활동 궤적과 부침까지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지금 이 시기 장준하를 다시 떠올리는 이유에 대해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는 대목이 어쩌면 아직도 ‘장준하 정신’이 우리에게 신선한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이유일 것이다.

“장준하 선생이 대결하고 청산하고자 했던 것들이 다시 현재화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군사대국화, 이명박 정부의 권위주의로의 회귀, 갈수록 대결 양상을 띠는 남북관계, 어용지식인, 어용언론인들의 반시대적인 칼춤, 새삼 ‘장준하 정신’이 그립습니다.”

한 생을 올곧게 헌신해온 민족 지도자들을 너무 비통하게 잃은 경험으로 점철돼 온 우리 역사를 되씹어보는 씁쓸함에도 불구하고 분명 그의 지사적 삶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장준하 선생 연보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에서 목사인 아버지 장석인(張錫仁), 어머니 김경문(金京文)여사 사이의 4남 1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나다.
1932년 삭주 대관국교를 졸업,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다.
1933년 4월 신천 신성중학교에 전학, 1937년 3월 졸업하다.
1937년 4월 정주 신안소학교 교사로 3년 봉직하다.
1940년 4월 동경 일본신학교에 입학하다.
1943년 11월 김준덕金俊德 씨와 노선삼盧仙三 여사 사이의 맏딸 김희숙金熙淑 여사와 결혼하다.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에 입대, 중국으로 끌려가다. 7월 탈출, 중국군에 가담하다.
1945년 1월 중국 중경에서 광복군에 편입, 광복군 대위에 임관되고, 《등불》, 《제단》지를 간행하며 광복투쟁에 헌신하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 분으로 입국, 김구 주석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및 민주의원 비서 등을 역임하다.
1947년 12월 조선민족청년단에 참가, 중앙훈련소 교무처장을 역임하다.
1949년 1월 도서출판 ‘한길사’를 설립하다. 2월 한국신학대학에 편입, 6월에 졸업하다.
1952년 3월 대한민국 정부 서기관에 임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ㆍ서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다.
1952년 9월 월간 《사상》을 창간하다.
1953년 4월 사상계사를 설립, 월간 《사상계》지를 발행하여 16년간 자유ㆍ민주ㆍ반독재투쟁에 헌신하다.
1960년 5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중앙집행위원에 피임, 홍보분과위원장을 역임하다.
1962년 8월 1962년도 필리핀 막사이사이상 언론 문학부문 상을 수상, 그 상금으로 독립문화상을 창설하다.
1964년 언론자유수호투쟁위원회에 참가, 언론윤리법 반대투쟁에 나서다.
1965년 조국수호협의회에 참가, 한일조약 반대투쟁에 가담하다.
1966년 9월 사카린 밀수 규탄연설 중 이른바 ‘밀수왕초’사건으로 1개월간 투옥되다.
1967년 3월 4자회담을 주선, 야당통합을 추진하여 신민당에 입당하다.
1967년 6월 옥중 출마로 서울 동대문을구 국회의원에 당선되다.
1970년 2월 새로운 민족세력의 규합을 위하여 신당운동을 추진하다.
1971년 출판사 ‘사상사’를 설립, 저서 《돌베개》를 출판하다. 민족학교 운동에 참여하다.
1972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참가하다.
1973년 2월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 최고위원에 피임되다.
1973년 12월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되다.
1975년 4월 개헌ㆍ민주운동 노선단일화 촉구를 위하여 민주통일당을 탈당하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약사봉에서 의문투성이의 사고로 서거하다.
1975년 8월 21일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신신리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다.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다.
1993년 4월 15일 제1회 ‘한신상’을 수상하다.(미망인 김희숙 여사가 수상함)

*제공 - 시대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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