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민생민주국민회의(준) 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경찰의 '좌파단체, 상습시위꾼 2,500명 검거' 방침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아! 기자회견 한 번 하기 힘드네..."

서울 미근동에 위치한 경찰청 정문 앞에서 열려 온 시민사회단체들의 각종 기자회견은 이제 30미터 가량 떨어진 민원봉사실에서 해야 할 판이다. 장소를 옮기더라도 '조건'은 또 있다. 구호를 외쳐선 안 되고, '정치적 발언'을 해서도 안 된다. 경찰의 '기준'에선 그렇단 얘기다.

지난 4일 경찰청 앞에서 '경찰 과잉진압 규탄 기자회견'을 한 6명이 '불법집회 주동자'로 지목돼 경찰에 연행된 이후, 20일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500여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민생민주국민회의(준) 등 단체들이 경찰의 '좌파단체, 상습시위꾼 2,500명 검거' 방침을 규탄하는 '21세기판 긴급조치, 블랙리스트 부활 규탄 기자회견'에서다.

지난번처럼 연행자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이날 기자회견도 참가자들보다 2배 이상이 많은 경찰병력에 겹겹이 에워싸인 채 힘겹게 진행됐다. 경찰병력에 밀려, 카메라 기자들과 기자회견 참가자들 간 거리는 1미터 남짓이었다.

 

▲경찰병력에 밀려, 카메라 기자들과 기자회견 참가자들 간 거리는 1미터 남짓이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기자회견 개최를 막는 경찰의 이유는 전번과 같이 '횡설수설'이다. "정당한 기자회견을 하려는 데 왜 막냐"고 참가자들이 따져 묻자 한 현장 지휘관은 "여기 기자들이 어딨냐? 기자회견과 집회를 구분하는 기준이 뭐냐"는 황당한 답변을 해 주변을 아연실색케 했다.

이 현장 지휘관과 곽정숙 민주노동당 의원, 한국진보연대 황순원 민주인권국장이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 것을 찍기 위해 <KBS>, <OBS> 등 방송 카메라 기자는 물론 일간지와 인터넷 언론사의 카메라 기자들이 좁은 공간에서 몸을 맞대고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기자회견을 가로막는 이유를 묻는 한 참가자에게 "기자회견이 열리게 되면 기자들이 (통행을) 방해할 것이 예상되니까 여기서(민원봉사실 앞) 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경찰 측에서 말하는 '통행방해'라는 이유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경찰청 정문 앞과 민원봉사실 앞의 인도 폭은 다르지 않다.

또 전번과 같이 이번에도 정작 시민들의 '통행'을 막은 건 경찰병력이었다. 경찰 측은 1시로 예정된 기자회견 전 이미 100여 명의 병력을 정문 앞쪽에 배치해 놨다. 시민들은 경찰 측이 열어주는 한쪽 귀퉁이를 통해 지나가야 했다. 15분여 간의 실랑이 끝에 정문 앞에서 시작한 기자회견에 참가한 이는 20여 명. 이들을 둘러싸고 인도 위를 메운 경찰병력은 세 배가 많은 60여 명이었다.

자연 "당신들만(경찰들만) 없으면 통행에 아무런 방해가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경찰병력이 인도를 메우고 있어 하는 수없이 도로까지 나가 영상촬영을 하던 한 방송국 카메라 기자는 도로에서 나오라는 경찰 관계자와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경찰은 이날 기자회견을 '불법집회'로  간주해 기자회견 참가자들을 에워쌌다.[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경찰병력이 인도를 가로막아 경찰청 앞 길을 지나는 시민들은 한쪽 귀퉁이를 통해야 했다. [사진-통일뉴스 박현범 기자]
경찰이 '자의적 판단'으로 기자회견을 '불법집회'로 간주하는 것도 되풀이 됐다.

경찰은 기자회견이 시작되자 '구호를 외치고 정치적 발언을 한다'는 이유로 기자회견을 '불법집회'로 간주, 곧장 해산명령을 내렸다. 참가자들은 "기자회견에서 정치적 발언을 하지 말라는 게 말이 되냐?" "구호는 기자들이 외쳐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며 따졌다. 지난번 기자회견에서 경찰 측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미신고 집회는 막아야 한다"고 자의적으로 규정하기도 했었다.

경찰이 기자회견을 제재하고 나서는 것은 이처럼 법적 근거가 뚜렷하지 않은 '자의적 판단'인대다, '고무줄 잣대'이기도 하다.

보수국민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 120여 명이 지난 8일 스티븐 보즈워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한과 관련해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 1-2미터 길이의 각목이 달린 피켓 30여 개를 들고, 1시간가량 구호를 외치고 함성을 질렀지만 경찰은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었다.

경찰은 최근 들어 진보성향 단체들이 주최하는 대부분의 집회신고를 '불허'한 데 이어 이처럼 기자회견마저도 형평성에 어긋나게 대해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려고 한다'는 비난을 자초하고 있다.

"침묵을 강요하고 반대를 말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 지금 우리는 그래서 새로운 긴급조치시대, 공포정치의 시대를 우려한다."(기자회견문 중)

▲ 이날 참가자들은 기자회견이 끝나고 나서야 겹겹이 에워싼 경찰병력 밖으로 나올수 있었다.[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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