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의 공식적인 언급에 의하면 북은 <민족과 운명>이라는 다부작 예술영화를 통하여 ‘민족의 운명이자 개인의 운명’을 이야기함으로써 관객들에게 민족운명 문제의 본질인 ‘자주성’을 전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주성은 민족의 존재와 번영을 담보하는 민족의 생명’이기에 그들은 사회주의 위기 속에서도 자신들의 체제를 굳건히 옹호하고자 하며, 그것을 인민들에게 영화 속에서 각인시키고자 <민족과 운명>이라는 다부작 예술영화를 창작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민족과 운명>이라는 다부작 예술영화에 대한 ‘제작 동기와 목적’을 북측 자료 속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남쪽의 북한영화 연구자들은 그 해석을 전혀 달리하고 있다.

즉 이들은 <민족과 운명>이 제작된 것에 대한 북의 공식적인 발표보다는 그 이면을 보고자 한다. 북에서 제시하는 영화의 제작목적 등은 영화제작 시스템상 당의 정책 홍보라는 이유로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이러한 공식적인 문건 등은 거의 분석대상 조차도 되고 있지 못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남쪽 연구자들의 그러한 접근방식에 의할 때 이들이 <민족과 운명>에서 읽어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의 판단으로 그것은 다음과 같다. 즉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중국의 개방 등으로 북은 어쩔 수 없이 곧 개방을 할 것이며, 그 동안 자본주의와 단절된 폐쇄사회로 살아왔던 점을 고려하여 <민족과 운명>을 통하여 비록 부정적 의미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풍요로운 모습 등을 보여줌으로써 일반 인민들이 자본주의 열풍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예방주사’를 놓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와의 접촉이 동구에서처럼 체제의 붕괴로 이어지거나,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중국과 같이 체제의 전반적인 성격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북한 지배층은 제한적인 개방을 위한 일정한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고, 이러한 생각이 표출된 것이 「민족과 운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체제의 보존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개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북한 지도부는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문화를 주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예방주사 효과를 기대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우영, 『김정일 문예정책의 지속과 변화』, 1997)

이와 같은 ‘자본주의 예방주사론’이 그 주요한 근거로 드는 것은 <민족과 운명> “가운데 '로동계급 편'과 '어제, 오늘, 그리고 래일 편'만을 제외하면 이야기의 중심 무대는 남한”이라는 왜곡된 사실에 근거한다.(이우영, 「북한영화의 자리를 생각하며 북한영화 읽기」, 『북한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다섯 가지』, 2004)

또한 여기에 “과거 북한영화에서 볼 수 없던 조명이 휘황한 남한의 카페, 여가수, 남한의 대중가요가 등장해 화제가 되었다”(최척호, 『북한영화사』, 2000)는 특징을 이야기하고,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남한의 모습을 이례적으로 소개하는 영화라는 점”(최연용, 「차이와 동질성」, 『북한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다섯 가지』, 2004) 이라는 등의 언급을 하는 다른 여타의 연구자들에 의하여 더욱 힘을 얻게 된다.

필자의 판단으로 볼 때 이러한 접근방식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격언이 맞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화 속의 단편적인 몇몇 화면을 가지고 영화가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무시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분석방식이라고 판단된다.

이것은 마치 북한영화에서 비록 부정적 의미일지라도 엄청난 파괴력을 갖은 미국의 전략무기를 보여주었다면, 그것은 곧 미국에 대한 항복을 전제로 인민들을 설득하기 위한 사전작업이라는 논리와 똑 같은 것일 만큼 황당한 분석인 것이다.

어쨌든, 그런 접근방식으로 북한영화를 분석하는 그들의 방법론에 대한 옳고 그름을 뒤로 미룬다고 할지라도, 과연 그들의 논리전개 방식과 서술 내용은 객관성이 보장되는가의 문제를 살펴보면 이것조차도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이들은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이 ‘자본주의 예방주사’로 기능하도록 수십 편의 시리즈 가운데 “'로동계급 편'과 '어제, 오늘, 그리고 래일 편'만을 제외하면 이야기의 중심 무대는 남한”이라고 하는 것을 주요한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조사에 근거한 것이다. 이 글이 쓰여진 시기가 2004년임을 고려해 볼 때 그 시기에는 <민족과 운명>이 이미 총 62부작이 창작된 시기이다. 이우영은 그 가운데 북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로동계급편>과 <어제, 오늘 그리고 래일편>뿐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윤상민편>이 끝나는 제16부부터는 제62부까지 총 46부작이 모두 북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또 앞선 총 16부에 해당하는 작품 가운데서도 제11부~제13부는 인민군 포로로 남쪽에서 오랜 기간 감옥살이를 한 비전향장기수 리인모씨를 형상한 것이다.

즉 양적으로만 볼 때 남쪽을 배경으로 한 것보다 북의 과거와 현재를 배경으로 한 것이 3배 이상 많다.(<민족과 운명> 편성 내용 보기)

뿐만 아니라 영화의 내용을 보더라도 <최현편>(총 6부작)은 북이 말하는 ‘조국해방전쟁’(6.25) 때 적후로 가기 전날 밤, 백전노장의 항일혁명군 출신 최현이 최고사령부의 문전보초병이 되어 초소를 지키는 모습을 그려내며 '수령결사옹위'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1990년대에 영화화하여 미국과의 대결전에서 항일혁명투쟁을 전통으로 하는 '총대사상'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로동계급편>(총 11부작)에서는 천리마운동의 시발지였던 강선제강 노동자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모든 것들은 용광로 속에 들어가면 하나의 강철로 만들어진다는 ‘쇠물철학’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쇠물철학은 영화 속에 나오는 다기 다양한 인간집단을 포용하는 ‘광폭정치’를 형상한 것이다.

한편 <어제, 오늘 그리고 래일편>(총 9부작)을 통하여서는 ‘고난의 행군’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김일성종합대학의 여자 동창생들인 차경심, 송숙, 분희와 그들 남편들의 인생행로를 통하여 혁명적 신념문제가 위기에 서있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도 <민족과 운명>의 모든 편들은 사회주의를 견결히 고수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내용은 ‘단 한편도 없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현재 총 62부작이 제작된 상태에서 그 내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남쪽의 북한영화 연구자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어 하는 부분만을 보고, 또 그것을 과장하여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북한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은 <민족과 운명>이 처음 제작된 1992년 이전의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1965 : 2부작), <금희와 은희의 운명>(1972), <봄날의 눈석이>(1985 : 2부작), <은비녀>(1985) 등에서도 각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에 맞게 그 시점의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는 이 시기에 제작된 <민족과 운명>에 대하여서는 다르게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염두에 둔 이우영은 위에 필자가 예시한 영화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며 자신의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1960년대의 <성장의 길에서>는 남한의 4.19가 소재이며, 1980년대의 <봄날의 눈석이>와 같은 작품들은 일본 사회가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북한영화에서 남한 사회는 항상 헐벗은 상태로 묘사되었고, 일본 사회도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미국사회가 작품의 전면적인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없었다.”(이우영, 『김정일 문예정책의 지속과 변화』, 1997)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예시된 두 영화는 각 영화내용의 시대배경 및 주제에 맞게 구성된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우영은 일본 사회의 경우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었다고 하였는데 그가 예시한 <봄날의 눈석이>(1985)에서 도대체 일본을 부정적으로 나타낸 것이 어떠한 장면인지 필자는 알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총련계 남수라는 청년과 민단계 영아라는 처녀의 결혼을 두고 재일동포사회에서 조차 남북의 갈등이 재현되는 것을 그린 것이다. 즉 총련계와 민단계 자녀의 결혼문제를 다루었기에 두 집안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유독 그 이야기에 일본이 끼는 것은 일제 때 양가의 아버지 모두 징용에 끌려가서 그곳에서 얽힌 두 사람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나타날 뿐이다.

그럼 일제 식민지 시기를 이야기하는데 이우영의 논리대로 한다면 우리를 식민지로 만든 제국주의 일본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해야 옳다는 의미인가? 일제시대를 회상하는 장면들을 제외하고는 필자가 보기에 그저 영화제작 시점인 1980년대 중반 일본의 모습 그대로이다. 토오쿄오의 공항이 보여지고, 또 그곳 거리의 고층빌딩이 아무런 왜곡 없이 노출되고 있을 뿐이다. 또 큰 사업가인 영아네 집에서의 식사 모습은 그야말로 상류층의 식사 모습 그대로이다.

이 영화가 왜 <민족과 운명>에서 보여지는 자본주의의 모습과 다른지 필자는 알 수 없다. 아래 사진들을 참조해 보면 비록 한 두 장면에 불과하지만 이우영의 주장이 얼마나 주관적인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북한영화 속에 나타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
 
▲ <성장의 길에서>(1965) : 이승만 정권의 4.19부정선거 규탄시위 장면 [자료사진-유영호]

▲ <민족과 운명> 제1부(1992) : 박정희 정권 당시 김대중 석방 시위 장면 [자료사진-유영호]

▲ <금희와 은희의 운명>(1974) : 지주의 음모에 의해 몸이 팔려 유흥업소에서 노래하는 은희의 모습 [자료사진-유영호]

▲ <민족과 운명> 제10부(1992) :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생일파티가 열리고 있는 곳에서의 무희들 모습[자료사진-유영호]

 

 

▲ <은비녀>(1985) : 주인공 임진석이 가출소녀 옥자를 찾기 위해 유흥업소를 돌며 수소문 하는 장면 [자료사진-유영호]

▲ <민족과 운명> 제8부(1992) : 달래가 미국으로 망명한 김욱 중앙정보부장의 부탁을 받고 서울로 들어와 김형욱의 애인 은숙과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자료사진-유영호]

 

 

▲ <봄날의 눈석이>(1985) : 미국에서 교수로 있는 철문이란 사람의 강의로 영화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 과정에서 영화의 첫 장면인 미국 도시의 모습 [자료사진-유영호]

▲ <민족과 운명> 제1부(1992) : 미국으로 망명간 최현덕의 이야기로 민족과 운명 제1부의 첫 장면으로 미국 도시가 보인다. [자료사진-유영호]

 

 


위에서 비교된 자료사진에서 나타나듯이 <민족과 운명>에서 비추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은 그 이전의 영화 속에서도 얼마든지 쉽게 찾아 질 수 있는 것이었다. 단지 민족과 운명이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을 고려할 때, 해당 영화들의 시대배경에 따라 그 시점의 모습들이 영화 속에 비춰지는 것뿐이다.

또 이전 영화의 등장인물은 일반 민중이나 재일조선인 등이었고, <민족과 운명>속의 등장인물은 모두 남쪽의 최고위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최고위층에 걸맞게 좀 더 화려했던 것뿐이다. 이러한 각 영화의 시대배경과 등장인물의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할 때 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장면들은 당연히 차이가 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남쪽의 연구자들이 북의 문학예술 창작방식이 철저히 ‘사실주의’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연구자들이 자료의 객관성을 넘어서 이렇게 무리하게 해석하고자 하는 이유는 1990년을 전후로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중국의 사회주의가 변화되면서 북도 역시 곧 개방하여 자본주의 사회에 항복하기를 바라는 그들의 기대심리가 작용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그러한 주관적 기준이 자료의 객관성을 뛰어넘어 그들의 논문 속에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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