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민요에 이어 이번에는 야담을 하나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지난 2007년 북녘의 평양출판사가 출간한 야담집 ‘웃음이 비낀 기지’에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한강토에서 대대적으로 한피줄을 이어오면서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창조해온 슬기롭고 지혜로운 단일민족”이라며 “남달리 애국심이 높았던 우리 선조들은 왜래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켜내는 싸움에서 용맹을 떨쳤을 뿐 아니라 근면하고 성실한 로동과 뛰어난 지혜로 아름다운 민족문화를 끊임없이 창조해왔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설화도 우리 민족이 창조한 민족문화유산의 하나로, 민화를 비롯한 설화유산들을 수집 정리해 책으로 수집 출판한 것이라고 전합니다.

이 책에는 ‘술꾼의 맹세’라는 제목의 야담이 하나 실려 있는데요, 아주 재밌진 않지만 술을 마실 줄 아는 분들이라면(특히, 술을 마시고 큰 실수를 해 술을 끊겠다고 다짐했던 분이라면 더욱) 공감할만한 내용입니다. 술은 몸에 나쁜지 뻔히 알면서도 들이부어 자신의 몸을 혹사하고 또 아무리 죽는다고 해도 끊기 어렵다는데요, 다음에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옛날 박씨라는 지독한 술군이 하나 있었다.
정말 이 박씨는 술에 미쳤다고 할만치 어델 가나 술을 찾느라 안달이였고 술만 보면 안주도 없이 마구들이마셨다.
보다 못해 곁에서들 이구동성으로 말리며 말했다.
<자네 그러다 몸이 견뎌내겠나? 아직 젊었는데 지레 명을 줄이질랑 말구 부디 자중하라구.>
<술을 마셨다구 그렇게 끼니를 건늬군 해서야 쓰나? 뭐니뭐니해두 건강이 제일 큰 밑천이라니.>
<거 제발 안주랑 들면서 기분이 좋게만 조금씩 술을 마시게. 정말 악습이구만, 악습이야.>
그럴 때마다 박씨는 청산류수로 내리엮어대군 했다.
<괜한 걱정들 마슈. 내 성씨가 박씨인줄 모르시오? 이 몸은 박달처럼 단단해놔서 술을 암만이구 퍼마셔도 백살장수는 문제없수다. 옛적부터 일러오기를 영웅호걸 호주요, 또 주량이 도량이라 했다오. 내 이제 꼭 큰일 치는걸 보시우. 아, 두고보라는데두오.>
그러던 박씨가 진짜로 큰일을 쳤다.
그렇게도 자랑하던 <박달같은 몸>이 그 잘난 술덕에 구새먹은 고목으로 되어버렸던것이다.
줄창 마셔댄 강술에 위며 간이며 그예 다 녹아문드러졌는지 박씨는 이틀째 꼼짝 못하고 드러누워만 있었다. 다들 예견하던배대로 박씨는 끝내 그렇게 좋아하던 술한모금조차 제대로 받아넘기지 못하는 가련한 처지에 놓였다.
어느날 박씨를 찾아온 한 의원령감이 끙끙 앓음소리만 내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쯧쯧, 이거 병이 지내 쇠였구만.…흠, 물론 자네두 오래 살구싶을테지?>
<여부가 있겠소이까? 제 나이 이제 서른을 갓 넘겼소이다. 의원님, 절 좀 살려주시겠소이까?>
박씨는 술마실 때의 호기는 다 어데로 갔는지 제사 섧고 기막히다는듯 눈물까지 글썽해서 사정을 했다.
(전날에 왔던 의원들은 모두 이젠 늦었노라고 도리머리질이였지. 헌데 이 의원령감만은 무언가 한가닥 실오리만 한 희망이라도 띄워주는즉 이이상 다행한 일이 또 어데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박씨는 앞뒤를 더 가릴새없이 무작정 의원령감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막무가내로 애걸했다.
<의원님, 아니 인자하신 할아버님, 제발 마음을 너그러이 쓰시여 손주같은 제 생명을 건져주옵소서.>
<허허허, 할아버지라. 글쎄 한가지 방도가 있긴 한데 그걸 자네가 꽤 해낼수 있을는지?>
<그건 절대 념녀마소서. 그저 뭐든 분부만 하시면 아무리 어려워도 제 꼭 해내고야말터이니.>
<딴게 아니구 자네 술을 아예 딱 끊을수 있겠나? 설사 오늘엔 약을 써서 병을 고쳐낸대도 또 술을 마시고나면 백약이 무슨 소용에 닿겠나? 자네가 용단만 내린다면 내 당장 약을 지어주지.>
<수, 술 말씀이시오이까?…에라, 술을 끊는게 죽기 보다야 더할라구. 까짓거, 제 결단코 맹세하오이다. 다신 술잔에 손도 대지 않겠다는걸.
사뭇 비장한 안색이 되여 쳐다보는 박씨를 대견하게 여긴 의원이 <장하이, 사내라면 응당 그래야지. 장부 일언 중천금이렷다? 옛네, 이 약을 받게. 한달 보름만 쓰면 아마 알도리가 있을거네.>
<고맙소이다. 이 은혜를 어이 다 갚으오리까? 제 꼭 맹세를 지키겠으니 부디 믿어주소서.>
껄껄 웃으며 의원이 마음이 개운해져 떠나간 뒤 박씨는 하루도 어김없이 의원이 준 약을 먹느라 여간 극성이 아니였다.
박씨의 고약한 강술버릇에 누구보다 애태워온 안해도 이를 전혀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고 부쩍 성수가 나서 약을 달여 들여오군 했다.
그러는새에 어느덧 한달 보름이 지나갔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제법 건강도 좋아져 얼굴에 혈색이 불깃불깃해진 박씨는 속이 클클해나기 시작했다.
의원앞에서 다진 맹세도 맹세이려니와 당장 죽을 판이라 오로지 약에만 매달리느라 그간 술생각할 겨를이 조금치도 없었던 박씨였다.
(어떻한다? 술을 먹고 싶은 생각은 갈수록 간절해지는데. 무슨 수가 없을가? 그렇지, 됐다.)
박씨는 갑자기 무릎을 치더니만 어린 아들을 곁으로 불렀다.
<얘야 얼른 엄마한테 가서 아빠가 술을 가져오랜다구 일러라.>
네댓살잡이 아들은 콩당콩당 뒤뜰의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남편의 분부인지라 인츰 술병을 갖고 들어오긴 했으나 기가 막힌 안해는 푸념을 던졌다.
<에그, 또 술이예요? 그 맹센 고작 한달 보름짜리였수? 나도 이젠 모르겠어요. 당신 마음대로 어디 실컷 마셔보구려.>
안해가 손들고 나가버리자 박씨는 쾌재를 올리며 어린 아들에게 다시 일렀다.
<얘야, 어서 술을 붓고 잔을 들어라.>
박씨는 아들이 들어올린 잔에 입만 가져다대고는 숨 한번 안 돌리고 단번에 쭉 마셔버렸다.
<아 무얼하니? 또 부으래두.>
한잔, 또 한잔…이렇게 박씨는 술 한병을 앉은자리에서 제꺽 비웠다.
<어 이제야 살것 같군. 이 맛에 먹는거야.>
좀 있다 방에 들어선 안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술을 끊는다더니 그렇겠지요. 또 시작됐군요.
<아니, 내가 어제 술을 끊는댔소? 술잔에 다신 손을 대지 않겠노라고 했지. 자, 보구려. 그래서 이 잔을 아들에게 들리우질 않았소? 그런즉 난 맹세를 지켰단말이요. 암, 지켰다마다. 허허허.>
흡족해서 씨벌대는 박씨의 강억지에 안해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웃고 어린 아들은 영문도 모르고 웃고…
술을 딱 끊는다는 술군 박씨의 맹세는 바로 이러했다.

이 야담을 읽다보니 저는 어쩐지 술꾼의 맹세가 정치인의 맹세와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 죽을 것 같을 땐 당장이라도 뭐든 다 할 것 같은데 막상 문제가 해결되면 생각이 바뀌고, 자기 합리화까지 해내는 것이 꼭 선거철 공약을 남발하고 당선된 뒤 ‘내가 언제?’ 하는 식, 그러니까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는 속담이 딱 어울리죠.

최근 꽃 같은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서서 연이어 삭발을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공약, 반값 등록금의 약속을 믿고 찍어줬는데 막상 당선이 되고는 모른 체하고, ‘내가 술잔을 안든댔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냐?’는 식으로 빠져나가고 있으니 대학생들이 오죽 답답했으면 거리로 나섰겠나 싶습니다.

술주정이나 부리는 술꾼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정치인들 참 잘하는구나’ 하며 좋아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술꾼이 술 끊겠다는 약속 지키기 어렵듯, 정치인들이 자신의 공약을 지켜내는 일인 어려운 줄 잘 압니다.

그렇지만 힘들수록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을 해야지 안 그럼 단순히 신뢰감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술꾼은 몸이 망가져 죽을테고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이 외면, 정치적인 사망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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