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판화가 함창연 작품전 '아! 함창연'이 서울 밀알미술관에서 열렸다. 모스크바 국제미술전람회 계관상 수상작인 ‘거제도 연작’중 '거제도4'(1957). [사진-통일뉴스 송정미 전문기자]
북한 판화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으나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화가인 함창연(1933 ~ 2000) 의 작품전 ‘아! 함창연’이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서울 밀알미술관(관장 원경자)에서 열렸다.

함창연 화가는 지난 80년에 북한의 공훈예술가의 칭호를 받은 북한의 대표적인 판화가이며, 러시아의 미술 백과사전에 “조선에는 겸재와 단원 그리고 함창연이라는 위대한 작가가 있다”고 소개되고 있을 정도로 그 예술성과 재능을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자화상 두 점이었다. 청년시절의 열정과 자신감 넘치는 작품과 함께 30여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노년의 모습은 역동의 시대를 살아온 예술가의 고뇌와 열정이 느껴졌다.

▲ 함창연의 자화상 2점이 나란히 전시됐다. 오른쪽이 1956년작, 왼쪽이 1991년작이다. [사진-통일뉴스 송정미 전문기자]
흡사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을 연상케 하는 손자욱이 찍혀 있는 노년의 ‘자화상’(1991, 판화)은 청년 시절의 젊고 패기에 찬 모습 대신 희끗한 흰머리와 노쇠한 모습이 자리했지만 여전히 그 표정과 눈빛에서는 열정이 용솟음치고 있듯, 그의 예술가로서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손도장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전시에는 판화를 비롯해, 수채화, 유화, 파스텔화 등 총 160여점 되였는데, 주로 50~60년대 판화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20여 년간 함창연 화가의 작품을 수집하고 이번 전시를 준비한 홍정길 밀알미술관 대표는 이 시기가 “한국 미술의 잃어버린 페이지”라 생각해 “소중히 한 두 점씩 모으게 됐”는데 “그 중에 정말 뛰어난 화가가 함창연이라는 화가”였다고 전시 배경을 설명했다.

홍 대표가 한국 미술사에서 ‘잃어버린 페이지’라고 부르는 5,60년대 작품을 모으기 시작한데는 사연이 있었다. 홍 대표는 지난 89년 중국 연변의 과학기술대 창설 준비에 참여했다가 고마운 분들에게 선물로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그림이 하나, 둘씩 쌓이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10년 후인 99년 광주 비엔날레 당시 오광수 총감독의 부탁으로 ‘북한 미술의 어제와 오늘’에 ‘어제’에 해당하는 작품 100점을 전시하게 되면서 그의 컬렉션은 본격화 되었다고 한다.

대북 지원단체인 남북나눔운동 회장이기도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목사는 이 과정에서 함창연의 작품에 주목해 수십 차례 북한을 오가며 그의 그림을 모았고,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그가 유학했던 폴란드까지 발품을 팔아가며  수집에 열을 올렸다. 이 같은 노력을 거쳐 조선화에 가려져 있던 함창연이라는 판화작가가 남쪽에서도 조명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북한에서는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지침에 따라 민족적 형식으로 조선화를 지정해 조선화 중심의 미술을 발전시켜왔다. 그에 따라 조선화가 남과 북에서 주목을 받아왔었다. 이런 현실에서 홍정길 대표의 각별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무려 400여 점의 함창연 작품이 수집됐고 이번 '아! 함창연'전을 통해 그의 진가가 드러나게 됐다.

▲ 원경자 관장이 가장  특별한 작품으로 꼽은 여사제동상(판화). "사제상 뒷면에서 바라본 구도가 특이하고 작품성이 뛰어나다"고 평했다. [사진출처-밀알미술관]
함창연은 판화기법을 다양하게 사용하게 구사했음은 물론 인물, 풍경, 정물에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 인상주의, 표현주의 등의 다양한 사조를 보여준 작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노년에는 유화 작품도 제작되였다.

함창연 화가의 작품은 사실주의 기법을 농담과 원근, 여백 등의 요소들이 조화를 이뤄 마치 먹색의 깊은 맛을 담은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특히 그의 작품 ‘밭갈이’(라이프찌히 세계판화 금메달 수상작, 1959), ‘거제도 연작’(거제도, 모스크바 국제미술전람회 계관상 수상, 1957), ‘화전민’(빈 국제미술전람회 금메달 수상작, 1959), ‘압록강은 흐른다’ 등은 동양의 정신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 홍정길 대표가 가장 애장품으로 꼽는 '밭갈이'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밭갈이'(1959)는 라이프찌히 세계판화 금메달 수상작이다. 파블로 피카소도 라이프찌히 콩클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사진-통일뉴스 송정미 전문기자]
이중에서 ‘밭갈이’ 작품을 가장 애장품으로 꼽는다는 홍정길 대표는 “깊은 동양의 수묵 느낌”을 함창연 작품의 특징으로 평가하고, “동양사람 아니고는 저런 맛을 못 낼 것 같다. 아주 숙련되고 깊은 경지에 있는 수묵화가 작품 같다”며 “남북을 합쳐 아직까지 함창연 같은 작가를 보지 못했다”고 극찬했다. 실제 ‘밭갈이’ 그림을 제작한 때가 그의 나이 스물 일곱이었다고 하니 홍 대표의 찬사가 과찬 만은 아닌 듯하다.

함창연의 작품은 바르샤바 대학의 교수 시험을 위해 제작했다는 다섯 점의 목판화와 ‘프라하’의 전경을 담은 작품 등 대작이 많다. 특히 ‘프라하’는 가로 4미터에 높이가 88미터의 대작으로 구도와 어느 한 곳도 놓치지 않은 섬세함과 필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 구룡폭포. [사진출처-밀알미술관]
또 금방이라도 숲을 헤치고 나올 것만 같은 호랑이 작품과 바람결이 느껴지는 작품과 구름의 변화무쌍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때아닌 소낙비’(1963) 등 인물과 풍경은 물론 소재와 주제를 넘나들며 그의 기량을 마음껏 펼쳤다.

이와 관련해 홍 대표는 함창연 화가는 “큰 작품은 작품대로, 작은 작품은 작은 작품대로 혼신의 열정 다 쏟아 그냥 쉽게 한 작품을 보지를 못했다. 그 정성스러움을 지나갈 수가 없더라”면서 “판화에는 16가지 정도의 기법이 있는데 대부분의 작가들은 한 두 개의 기법으로 평생 하는데 반해 함창연 화가는 실크스크린을 제외한 15가지 기법을 자유자재로 종횡무진으로 한다”며 “기법의 장점에 맞춰 작품을 하는 것이 놀랍다”다는 홍익대 판화과 김승연 교수의 분석을 전했다.

함창연의 재능과 열정은 일찍이 인정받은 듯하다. 1933년 자강도에서 출생한 함창연은 1949년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 북으로 소환된 후 다시 미술대학에서 1년간 공부하다가 폴란드 바르샤바 미술대학에서 6년간 유학했으며 1953년 폴란드 우지종합대학 등을 거쳐 1959년 바르샤바 미술아카데미를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홍 대표에 의하면 6년간의 유학기간에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그의 대표작들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많이 배출돼 가장 왕성한 활동 기간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유학 후 1959년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평양미술대학에서 강좌장과 학부장을 거쳐 과학부학장, 1963년부터는 미술가동맹 출판화분과위원장,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 집행위원, 국가 작품심의위원회 심의위원을 맡았으며 1980년 공훈예술가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 이후에도 여러 요직을 거쳐 2000년에 작고했다.

함창연은 ‘리발’을 비롯한 20여점의 작품이 국보로 지정되어 미술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생전에 10여권의 서적을 출판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화첩은 한권도 발간된 적이 없다.

홍 대표는 “지난 2000년 3월에 열린 광주 비엔날레 때 함창연 화첩을 제작해 함 화가에게 전달하려 하였으나 화첩이 마무리될 즈음 세상을 떠나 전달하지 못하게 돼 안타까웠다”며 “10주기 때인 2010년에 크게 다시 한번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 홍정길 대표는 함창연 화가의 작품 400여점을 수집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북한에서는 70년대 초 김정일 위원장의 주도로 조선화 우위 정책이 발표되면서 많은 화가들이 조선화로 전과하였다. 그러나 함창연은 주류의 길이 아닌 판화의 길을 고집한 듯 하다. 이 시기 이후 그의 작품들에서 유화 작품이 점차 눈에 띠기 시작한다. 이는 70년대 이후 주체사상의 본격화라는 북한의 정치.사상적 배경과도 영향이 있을 듯싶다는 게 홍 대표의 추측이다.

홍 대표는 “(판화 작품으로) 자기 마지막 자화상(1991년)에는 왼손을 찍어 버렸다”며 이는 “칼질하는 힘은 안 되고 (하니) 유화작품 그림은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으로 이후 “유화로 돌아선 것 같”다고 손도장에 담긴 의미를 풀이했다.

또한 “70년대 이후에는 국가가 요구한, 자기 이념이 요구한 그림을 그렸지 자기 속에서 터져 나온 그림을 못 그렸”다며 “판화로 국가에서 요구한 것은 다하고 유화로 자기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그리는데 주력하지 않았나 싶다”고 덧붙였다.

홍정길 대표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홍 대표의 안내를 받으며 3개로 나뉜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주로 5,60년대 판화 작품이 전시된 제1전시장에는 온몸으로 부딪치며 격동의 시대를 관통한 예술가의 삶과 고뇌와 열정이 ‘수묵의 깊은 맛’을 내는 예술작품으로 승화되어 있었다.

제2전시장에는 유학시절의 작품들이 대부분 자리하고 있었는데 유럽이라는 공간적인 영향 때문인지, 종교색이 짙은 작품들이 다수 눈에 띠었다. 제3전시장에는 70년대 이후 수채화와 유화 등의 작품이 많았다.

▲ 94년 유화로 제작된 '자화상'. 맨 왼쪽이 원경자 관장.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제3전시장에는 94년 유화로 제작된 ‘자화상’이 마지막에 걸려 있었다. 두터운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앉아 한손에는 악보를, 한손에는 연필을 쥐고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힘이 들어간 두 눈과 꼭 다문 입술에는 여전히 고집스런 열정이 느껴진다.

이외에도 그는 여러 점의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데 작가에게 자화상이란 자신을 타자화해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할 진데, 그의 자화상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외향과 달리 일관되게 변치 않고 느껴지는 기개와 열정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했던 힘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