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 19일 경교장에는 새벽부터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행길에 오르려는 김구를 저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은 "기어코 가시려거든 저희들을 죽이고 가십시오" 하면서 끝내 만류했고, 김구는 이들에게 "나는 독립운동으로 내 나이 70여 년이 되었다. 더 살면 얼마를 더 살겠느냐. 여러분은 나에게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 이대로 가면 조국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북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봐야 된다"면서 길을 비켜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길을 비켜주지 않자 김구는 뒷문을 통해 대기시켜 놓은 차를 타고 북행길에 올랐습니다. 비서 선우진과 아들 신만을 대동한 채, 38선 상의 여현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질 무렵. 여기까지 일행을 쫓아온 기자의 성화에 못이겨 38선 푯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뒤 38선을 넘은 것이 6시 45분경. 기자는 그 장면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혁명가 김구씨는 기어코 38선을 넘었다. 때는 6시 45분. 너웃너웃 저물어가는 황혼 속에 한발 한발 넘어서면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이여. 역 정거장 녹슨 철로 위로 오지도 않는 기차를 기다리는 [시그널]의 붉은 등불이 눈물 속에 아롱거린다.……고요한 38선에 스미는 듯 어둠의 장막이 내려왔다. 이북 마을에 등불이 반짝인다. 달이 뜨고 하날도 별도 반짝인다. 기어코 이루어질지어다. 남북회담 성공을 상징하는 희망의 별인가 김구씨가 떠난 하늘 아래로 별은 반짝인다."(조선통신사 특파원 유중열, 38선발: {우리신문} 1948. 4. 21)

홍명희도 김구와 같은 4월 19일에 38선을 넘었고, 마지막으로 김규식도 4월 21일 38선을 넘었습니다.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할 남한 대표들 가운데 좌익 세력은 4월 10일 이전에 대부분 조직적으로 북행했고, 중도좌파 세력들도 삼삼오오 분산적으로 이미 38선을 넘은 상태였습니다.

김구·김규식이 평양에 들어갔을 때 이미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이하 남북대표자연석회의)는 막이 오른 상태였습니다. 4월 14일로 예정되었던 회의가 두 사람을 기다리면서 연기되었다가 도착이 너무 늦어지자 4월 19일 개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북대표자연석회의는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4일간 진행되었습니다. 3일째 되던 4월 22일에는 김구·홍명희·조소앙·조완구 등 남한 우익 민족주의자들도 참석했으며, 김구도 간단한 축사를 합니다. 김구는 축사에서 "조국이 없으며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며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는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현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민족의 유일한 최대 과업은 통일독립의 전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하에 있어서 우리들의 공동투쟁 목료는 단정 단선을 분쇄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규식은 와병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4일간 진행된 남북대표자연석회의는 세 가지의 공식 문건을 채택합니다.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결정서]), [전 조선 동포에 격함]([격문]), [사회주의 소비에트연방공화국 정부와 북미합중국 정부에 보내는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 요청서]([요청서]) 등이었는데, 그 가운데 모든 것의 기초가 된 것은 [결정서]였습니다.

남북대표자연석회의가 끝난 뒤 또 다른 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그것은 김구·김규식·김두봉·김일성의 이른바 `4김회담`과 남북요인 15명이 회동한 `남북지도자협의회`였습니다. 4김회담은 4월 26일과 4월 30일, 남북지도자협의회는 4월 27일과 4월 30일 각각 두 차례씩 진행되었습니다.

그밖에도 김일성-김구, 김일성-김규식, 김일성-홍명희의 개별 회담도 있었으며, 5월 2일에는 남북요인이 함께 한 쑥섬 회동이 있었습니다. 현재 북한은 쑥섬을 사적지로 지정해 놓았으며, 쑥섬에는 남북연석회의를 기념하는 통일전선탑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남측 대표들은 황해제철소 시찰, 연석회의지지 시민대회, 메이데이 경축 시민대회 등에 참석합니다.

김구와 김규식은 처음 남북회담을 제안할 때부터 남북요인회담에 비중을 두었고, 그 결과에 기대를 가졌습니다. 이들은 남북대표자연석회의 다음에 이루어진 일련의 회담들을 통해 충분하지는 않지만 북한 지도부와 상당한 공감대를 마련했습니다. 회담의 결과가 집약된 것이 4월 30일 발표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입니다.

그것은 4월 19∼23일에 있었던 대표자연석회의와는 달리 4월 30일 제2차 4김회담과 곧이어 열린 15일 남북지도자협의회에서 승인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남북지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 수렴되어 있었습니다. 공동성명서는 미소 양군 동시 철수, 내전 반대, 조선 정치회의 소집을 통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단독 선거 절대 반대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5월 1일 평양방송을 통해 발표되었고 남한 신문에는 5월 3일 보도되었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은 5월 5일 서울로 귀환함으로써 남북연석회의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해야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부터 연석회의에서 합의한 바 통일운동을 위해 노력해야 할 과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편안한 길이 아니라 험난한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남북연석회의가 끝난 뒤 미군정은 민전 산하 좌익과 중도좌파에 대해서는 대표자회의의 [결정서]과 [격문]을 문제삼아 `살인·방화 교사 예비죄]로 가차없이 체포했으며, 우익 민족주의자들에 대해서는 회유와 협박을 가합니다. 테러 위협도 가중되었습니다.

미군정은 김구와 김규식에 대해서는 공산당의 모략에 빠졌다는 식으로 몰아갑니다. 하지만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연석회의를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며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서는 우리 민족도 세계의 어느 우수한 민족과 같이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했다고 말하였고, 이를 `독립운동의 신발전`으로 규정합니다. 미군정과 단선 진영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남북연석회의는 김구와 김규식의 말처럼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적 화합을 근거로 남북통일의 기초공사를 축성한 것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남북연석회의의 정신을 근거로 꾸준히 남북협상이 진행되었더라면 우리 현대사의 모습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남북연석회의, 그 가운데서도 남북지도자가 합의한 공동성명서의 정신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의 [남북공동선언]의 원초적 뿌리도 결국 남북연석회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념과 사상을 넘어선 민족적 대단결`, `민족이라는 보다 큰 것을 위한 작은 적과의 화해`. 이것은 남북연석회의의 정신이며,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공동선언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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