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다큐멘터리가 볼만 하다. 시각도 진보적이고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들을 생생하게 보여 주곤 한다. 올 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우리 학교’가 그런 사례일 것이다. 정보통신 시대의 강점은 TV 시간을 놓쳐도 컴퓨터 다시 보기로 몇 번이고 볼 수 있는 점인데 눈이 아프긴 해도 틈틈이 찾아보는 다큐멘터리는 남다른 재미와 감동이 있다.
8월26일 SBS 스페셜에서는 ‘맨발의 의사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쿠바의 의사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필자는 쿠바의 의료 제도, 친환경 유기농이 거둔 성취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동티모르에 3년째 의사 250명이 머물고 주민들을 치료하고 있다.
- 2005년 10.8 파키스탄에서 8만명이 죽고 400만명이 다치는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2378명의 쿠바 의사들이 파키스탄에 들어갔고 32개 천막병원에서 1만 4천회의 외과수술이 진행되고 170만명이 치료를 받았다.
숫자가 주는 진실이 있다. 터놓고 말하면 동티모르가 무슨 전략적 가치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쿠바의 의사들 250명이 남태평양 오지에 3년째 머무르고 있다. 파키스탄과 쿠바는 너무 먼 나라이고 필자가 아는 한 긴밀한 유대 관계도 없다. 그런데 파키스탄에 무려 2500명이 넘는 의사들이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파키스탄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다.
수치가 보여주는 진정성과 함께 쿠바 의사들과 이들로부터 치료받는 사람들의 말과 표정이 보여주는 진실이 있다. 이것은 글로 표현할 수 없다. 컴퓨터 화면을 통해 이들의 말과 행동을 직접 보기 바란다. ‘우리 학교’에서 느꼈던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맨발의 의사들’을 통해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색다른 재미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육성 연설이 나오고 의사가 된 체 게바라의 첫째 딸의 인터뷰가 있다. 차베스 대통령과 베네주엘라 상황 그리고 쿠바와 베네주엘라 사이의 연대 이야기도 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카리브해의 아름다운 바다, 어린 여자 아이의 얼굴, 그리고 이매진의 노랫가락이다.
1980년대 중후반 386세대를 각성시켰던 것은 ‘광주’와 ‘해전사’(해방전후사의 인식)이다. 현직 대통령이 광주에서 양민을 학살한 주범이라는 명확한 사실 앞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해전사’가 말해 준 것은 그 학살 주범이 사실은 친일잔재의 유산이고 친일파를 재등용한 것이 미국이었다는 사실이다. 이후 전개된 민족자주와 통일운동은 바로 ‘해전사’를 원천으로 진행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진보진영은 1년 내내 거의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숱한 집회와 대중 행사를 갖는다. 그러나 결정적인 약점은 80년대 중반 대학생들을 격동시켰던 광주와 ‘해전사’와 같은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연설에 감동이 실리지 않고 집회가 대중을 사로잡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세계사는 의외로 많은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북서 유럽은 미국과는 또 다른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과 러시아의 군사력 강화 움직임은 미국의 세계 패권이 만만치 않은 도전에 직면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미국은 중동에서 돌이키기 어려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고 중남미의 실험은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북과 이란의 대미 핵공세는 미국의 약점을 예리하게 파고들고 있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신자유주의의 운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1980년대 수많은 대학생들을 격동시켰던 광주와 ‘해전사’가 의의로 가까이에 있다. ‘맨발의 의사들’은 광주와 ‘해전사’에 버금가는 보배가 우리 옆 어딘가에 아주 가까이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시해야할 일은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뒤지고 하루가 다르게 발간되는 책자를 선별하여 운동의 토양을 튼튼히 할 거름을 찾고 이를 쉼 없이 대지에 뿌리는 일이다.
컴퓨터를 켜고 ‘맨발의 의사들’을 보자. 그리고 쿠바 의사들이 보여주는 참다운 인류와 연대 정신에 빠져 보자. 그리고 열렬한 광신자(?)가 되어 이 다큐멘터리를 퍼 나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