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과 통일의 갈림길에서 한반도의 정치상황이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던 47년 후반부터 48년 남북연석회의까지 북한은 어떤 방침을 갖고 있었으며, 어떻게 대응하고 있었을까? 수수방관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을까?

북한은 1947년 11월 16∼17에 열린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0차 전원회의에서 `유엔 감시하 총선`에 대한 대응책으로 4개항을 결정합니다. 그것은 첫째 임시 통일헌법의 제정 공포, 둘째 유엔 감시하 총선거라는 유엔 결의 반대, 셋째 미소 양군 철수 후 남북 총선거 주장, 넷째 남북의 통일세력 조직화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침에 따라 북한은 47년 12월부터 임시통일헌법 초안 작업에 들어갔고, 전군중적 토의 과정을 거쳐 1948년 2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발표합니다. 또한 유엔 총회의 한국 총선거 결의를 비난하고 미소 양군 동시 철수와 남북한 총선거를 주장하는 한편,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북한에 들어오는 것도 저지합니다. 

그런데 북한의 고민거리는 남한 내의 단정 반대세력에 대한 정책이었습니다. 김일성과 북로당 지도부는 단정을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 중도세력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아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박헌영이 이끄는 남로당은 전혀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남로당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정을 반대해 이승만·한민당과 결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을 `매국적 반동분자`로 규정짓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홍명희의 민주독립당이나 근로인민당과 같은 중도파도 `우익적 반동`으로 몰아세웠습니다. 남로당 지도부는 "남로당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활동을 파탄시킬 수 있다"면서 "남한에서의 단정 반대 세력과의 연합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1947년 12월 초와 1948년 1월 말 평양에서 `남북노동당 연석회의`가 열렸지만, 여기서도 북로당과 남로당의 의견은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남로당은 독자적으로 분단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남한 내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문제는 북로당이 담당하기로 타협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남로당은 민전과 함께 `단선반대 구국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독자적인 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남로당의 전술은 주로 파업과 파괴활동이었습니다. 경찰서 습격, 우익에 대한 테러, 그리고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선전 선동 활동. 그렇게 해서 48년 2월에는 전평의 총파업 투쟁을 필두로 `2·7구국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남로당의 `2·7구국투쟁`으로 2월 7일부터 20일까지 30건의 파업과 25건의 맹휴, 55건의 물리적 충돌, 103건의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총 8,479명이 검거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남로당의 투쟁은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는 효과는 거두었지만, 단독선거를 좌절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남한 내 단선반대 세력과의 합작을 위한 북로당의 공작은 47년 하반기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북로당은 남한의 정당협의회나 민족자주연맹 등 중도파와 제휴하기 위해 대남사업을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대남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성시백입니다.

성시백은 일제 시대 중국에서 활동했던 경험과 인연을 바탕으로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아 남한에서 중도파 세력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그를 바탕으로 김구·김규식·홍명희 등의 민족주의 진영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는 홍명희·안우생 등 중도파의 주요 인물들을 만났을 뿐 아니라 김규식의 비서 권태양, 민족자주연맹의 박건웅, 임정 계통의 김찬, 김구의 측근 엄항섭, 조소앙의 비서 김홍권 등과도 일정한 연계를 갖고 활동하게 됩니다.

성시백은 김일성과 직접 연결된 북조선의 `권위있는 선`으로 불리면서 해방정국에서 남북을 넘나들면서 활동하다가 1950년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돼 수사를 받던 중,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24시간 전인 6월 27일 새벽 5시에 사형당한 `거물 공작원`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의 활동이 워낙 방대했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정확히 밝히지 못해 베일에 싸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1998년 5월 26일자 북한의 {로동신문}은 성시백의 행적을 처음으로 자세히 공개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성시백은 1905년 평산에서 태어나 서울 중동학교를 다니다가 상하이로 망명한 뒤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지하활동을 했고, 이 과정에서 중경임시정부 요인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해방 후에는 김일성 직속으로 대남사업에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남로당 합당에서 배제된 좌파와 중도좌파 인사들을 결집해 통일전선에 합류시켰고, 남북연석회의 당시 단정반대 세력을 규합하는 활동에 관계하기도 합니다. 일설에는 김일성의 특사로 김구를 만나 남북연석회의 초청장을 전달한 인물도 성시백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아직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그가 남북연석회의 당시 남한의 인사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하며 북로당의 방침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가 체포되었을 때 드러난 비밀 아지트만 20개쯤 되었고, 마지막까지 노출되지 않은 것이 7개나 될 정도로 활동이 치밀했고, 규모도 엄청났습니다. 그는 후에 북한에서 지하당 공작의 첫 영웅 칭호를 받았고,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그의 가묘가 있다고 합니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유영구, {남북을 오고간 사람들}, 말글, 1993 참고)

성시백의 활동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은 1947년 10월부터 남한의 중도파·민족주의자들의 연합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었고, 김일성은 1948년 1월경 통일세력의 조직화를 위해 남북 대표가 모이는 회의를 구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김구·김규식의 `2월 서신`이 나왔던 것입니다. 북한은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회담 제의가 나오자 그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다각도로 알아본 뒤 `애국적 행위`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김구·김규식의 제의가 있은 지 40여 일이 지난 3월 25일 북한은 그에 대한 답신을 보냈습니다. 북한의 답신이 이렇게 늦었던 이유는 "남한의 상황이 유동적이어서 유엔 소총회의 결정과 그것에 대한 남한 민족주의자들의 반응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소 흔들리던 남한  민족주의자들의 반응이 최종적으로 정리된 것은 3월 12일 `7거두 성명` 이후였던 것입니다.

3월 20일과 24일 열린 북로당 중앙위원회 특별회의는 남북연석회의에 관한 구체적 방안과 서신 제의 내용을 토의했고, 이를 기초로 북조선 민전은 3월 25일 평양방송을 통하여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에 고함]이란 성명을 발표합니다. 이와는 별도로 [김구·김규식 선생에게 보내는 답신]과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에 보내는 편지]를 개별적으로 전달했습니다.

그것은 김구·김규식의 `남북 지도자 회담`을 약간 수정하여 북한 10명, 남한 15명으로 된 예비회담 격인 `남북조선 소범위의 지도자연석회의`를 4월 초 평양에서 개최하자는 것, 그리고 북민전 이름으로는 본회담격인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4월 14일 평양에서 개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4월 남북연석회의가 막을 올립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