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현대사에 관한 특별한 책이 발간돼 눈길을 끌고 있다. 북한 연구에 있어서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고 김남식 선생과, 이항구 선생의 구술을 채록한 ‘구술로 본 북한현대사 재인식 : 김남식.이항구’(선인, 2007)가 바로 그것.

▲ ‘구술로 본 북한현대사 재인식 : 김남식.이항구’(선인, 2007) 표지. [자료사진 - 통일뉴스]
통일연구원 기초연구총서의 일환으로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등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북한 사회주의체제 형성.변화에 관한 해외문헌 및 구술자료 수집.발굴과 Data-Base 구축사업’ 일환으로 발간된 책이다.

김남식과 이항구 선생은 해방공간에서부터 좌익 활동을 시작해 한국전쟁을 거쳐 월북해 전후 북한사회를 직접 체험한 뒤 남쪽에서도 북한 전문가로 평생을 살아온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2005년 타계한 고 김남식 선생은 금강정치학원 출신으로 58년 12월부터 진행된 중앙당 집중지도 당시 당 간부로 직접 참여했던 경험이 있고 이후 남쪽에서도 ‘남로당 연구’(1984), ‘박헌영 노선 비판’(공저, 1986) 등 주요한 저작을 내놨고 통일뉴스 상임고문으로 활발한 문필활동을 전개했다.

이항구 선생은 금강정치학원의 전신격인 서울정치학원 출신으로 ‘안전띄’(1958)라는 소설로 노동자 소설가로 등단해 작가이자 북한중앙방송위원회 기자로서 북녘 각지를 취재하며 전후 북한체제의 구축 과정을 경험했으며, 이후 남쪽에서 군 기무사 북한실장을 30년간 맡아온 베테랑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북한의 반종파 투쟁을 통한 유일체제 확립과정을 손에 잡힐듯이 구술할 뿐만 아니라 이 과정을 내재적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일관된 설명틀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둘 다 고 김일성 주석의 현지지도를 직접 목격한 드문 경험을 갖고 있다.

김남식 선생은 58년 평양에서부터 시작된 중앙당 집중지도를 생생히 증언할 뿐만 아니라 당시 소련과 중국의 정치 변동이 북한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폭넓은 시야에서 제시하고 있다. 북한이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하게 된 배경, 60년대 중후반 김신조 부대와 울진.삼척 사건 등 무장투쟁이 시도된 이유 등이 모두 이같은 큰 그림을 이해할 때 비로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술이라는 형식이 갖는 격식 없는 사적 체험도 그대로 묻어나온다. 박금철 부인으로부터 아편장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거나 김책 아들 김국태가 김정일 국방위원장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있을 정도로 굉장한 신임을 받고 있다고 분석하는 대목 등은 어떤 공식 문서에서도 확인하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김남식 선생은 특히 북한의 주체사상 확립과정, 유일지도체제 형성과정을 내재적 시각에서 분석해 소련과 중국의 정치노선에 좌우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과정이었다고 옹호하면서도 이로 인한 중공업우선주의의 폐해 등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에 섰음을 내비치고 있다.

특히 북한 현대사에 대한 시기구분과 ‘민족제일주의’가 90년대 이후 주체사상을 대체할 정도로 북한 사회의 주요한 사상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지적 등은 북한 연구에 있어서 큰 과제를 던져준 것으로 보인다.

이항구 선생은 주로 자신의 경험을 일대기 식으로 구술해 서울정치학원이나 22여단, 철도사령부 등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기간은 남로당 출신의 당원으로서 한국전쟁을 겪어나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후 흥남비료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단편소설로 발탁돼 작가동맹에 속하게 되고 기자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청산리농장 등 전국을 누비며 북한의 주체사상 확립과정을 접한 것을 구술로 남기고 있다.

이항구 선생은 특히 현장 취재 과정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일성 주석의 현지지도를 직접 목격한 장면을 생생히 증언하며 유일체제 확립과정에서의 왜곡현상에 대해서도 보여준다.

그러나 이항구 선생의 증언은 자신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국방위원회와 최고사령관에 대한 남측 학계의 잘못된 이해, ‘사회주의 민족화’와 ‘자유민주적 민족화’ 개념 등 북한 사회를 보다 제대로 이해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강조로 귀결되고 있다. 물론 그의 기무사 경력 탓인지 ‘자유민주적 민족’ 개념은 다소 편향된 것으로 비판받을 소지도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갑산파 공작위원회’가 ‘갑산파 공장위원회’로 여러차례 등장하는가 하면, 구술이라는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 김일성 주석의 현지지도 장면에 대한 묘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등 좀더 전문가의 손을 거쳐 다음어져야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구술 채록 작업은 일회적 프로젝트 수행 방식보다는 보다 긴 안목에서 계획되고 전문가들의 헌신적 노력이 더해져야 비로소 제대로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평범하지만 쉽지 않은 교훈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직접 당 간부와 기자로서 북한의 체제구축 과정을 체험한 특별한 두 명의 북한 전문가의 구술 채록집을 발간한 것은 구술연구가 미약한 우리 학계의 풍토에서 소중한 연구성과로 자리매김 될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구술 채록작업의 번거로움과 소요되는 공력을 생각할 때 북한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고 김남식 선생의 구술 채록은 그의 자연적 수명이 다 한 후에 발간됨으로써 그 중요성이 더욱 빛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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