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수업

대학시절, 석고상 그리기에 찌들어있던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가히 충격이었다. 그것도 여성의 벗은 몸을 말이다. 첫 누드수업이 있는 날, 남학생들은 실기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포르노 사진 따위의 농담을 하면서 긴장을 풀었고, 가급적 여학생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모델은 20분 정도 포즈를 취했고, 10분 휴식을 했다. 물론 우리가 생각했던 적나라한 자세는 취하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자세로 4시간 수업을 진행했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모두들 긴장했고 마치 마네킹을 그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몇 번의 누드수업이 진행되면서 나는 모델에 실망했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몸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드름이 나있는 피부, 긴 허리, 짧은 다리, 출렁이는 뱃살, 빈약한 가슴, 굴곡 없는 얼굴...성인잡지나 포르노 사진에서 본 그런 쭈쭈빵빵한 모습이 아니었다. 누드수업은 일상의 실기수업과 다를 바 없이 지겨워졌다. 출석체크를 하고 나면 조교의 눈을 피해 밥을 먹으러 가거나 학교 밖에서 당구를 쳤다.

2학년 때쯤인가, 나는 누드수업을 통해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학생들이 누드모델을 그리면 자신의 몸매와 닮게 그린다는 것이었다. 뚱뚱한 여학생은 날씬한 모델을 보고도 약간 뚱뚱하게 그리고, 가슴이 큰 여학생은 빈약한 가슴의 모델을 보고도 가슴을 크게 표현했다. 나와 몇몇의 남학생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여학생이 그린 누드작품을 둘러보면서 낄낄거렸다.

하지만 남학생들도 문제가 있었다. 한국의 토종여성을 모델로 그리면서도 표현된 작품은 거의 서양여성에 가까웠다. 굴곡이 없는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주고, 빈약한 몸매에 볼륨을 주어 표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보이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 어쩐지 어색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오랫동안 서양여성의 몸매에만 익숙해진 탓이었다. 서양인의 얼굴을 표현한 석고상을 그려 대학에 입학하고, 서구화된 일본만화에 나오는 여성, 서양인형, 서양모델, 서양 포르노 사진에 젖어버린 감성은 현실의 아름다움조차 볼 수 없게 했다.

그 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감성에 깊은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은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와 힘든 대학시절을 보내는 원인이 되었지만, 나는 진짜 미감과 정서를 찾고 싶었다.

사람들은 `순수한 감성의 발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만 엄격한 의미의 순수한 감성은 없다. 모든 감성은 학습된 것이다. 꽃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도, 여성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도 결국은 사회적 경험과 학습의 결과이다. 이런 감성이 정치와 결합하면 정치이데올로기, 자본과 결합하면 상업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한다.

내가 알고있는 `순수`란 의미는 `맑고 깨끗해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탈정치`나 `비상업성`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드러내는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 `진리`를 찾아가는 일은 바로 올바른 감성과 정서를 찾는 길이다.

구룡폭포

▶구룡폭포
황병호/조선화/162.1*130.3/1993

이번 작품은 북한화가 황병호가 그린 <구룡폭포>라는 조선화이다. 금강산 구룡폭포는 우리나라 3대 폭포로 알려져 있는데, 100m 이상의 깎아지른 절벽에 폭포 길이만 해도 74m에 이른다고 한다.
 
이 작품의 특징은 조선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풍경화의 느낌과 기량을 충분히 드러낸 점이다. 수채화의 맑은 느낌도 아니고, 유화의 끈덕진 느낌도 아니다. 물론 동양화의 정적인 느낌은 더욱 아니다. 시원한 눈 맛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사실 나도 이런 느낌이 나는 풍경화를 북한미술 외에는 본적이 없다. 특히, 마치 종이를 구겨놓은 듯한 절벽의 표현이 압권이다. 조선화 수성물감의 은은한 농담표현 위에 자유롭지만 계획된 붓질에 의한 사실감을 표현하는 기법은 탁월하다.

아랫부분의 물보라의 단순한 표현도 윗부분의 긴장감과 조화를 이루어 자칫 가벼운 테크닉으로 빠질 수 있는 단점을 보완하고 있다. 이런 기법으로 표현된 북한 풍경화를 많이 본 적이 있다. 이 작품을 그린 작가가 원조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북한에서 유행하는 기법인 것은 틀림없다.

금강산에 간 적은 없다. 하지만 금강산을 관광하고 온 사람도 이런 구룡폭포를 보진 못했을 것이다. 수십 년의 갈고 닦은 미술적 기량으로 표현한 금강산 구룡폭포를 감상하는 기분은 어떤 부귀영화도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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