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22일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아태담당 차관보가 북한을 방문해 김계관 북측 6자회담 수석대표와 ‘포괄적이고 생산적인’ 협의를 진행함으로써 북미관계와 2.13합의 이행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바람직스럽고 환영할만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눈길을 끈 것은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힐 차관보의 방북을 21일 오전에서야 알았다는 보도들이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이 19일 밤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전화통화를 통해 소식을 접한 뒤 청와대에는 보고했지만 통일부에는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북 쌀 차관 제공을 2.13합의 이행에 연동시켜놓고 있는 통일부로서는 북미간 BDA 문제 해결과 2.13합의 이행 추이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힐 차관보의 방북 소식조차 제대로 공유하지 못한 셈이다.

전체적인 통일외교안보 라인에서 통일부의 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신언상 통일부 차관은 정례브리핑에서 "아쉬운 점은 외교부로부터 즉시 공유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다른 곳에 있다. 북미간 대화와 협상이 급진전되고 있는데 반해 통일부의 위상이 말해주듯 남북관계는 침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6자회담에서 합의된 9.19공동성명과 2.13합의 이행과정에서 북미간 양자대화가 본격화됨으로써 중국이나 한국의 중재 역할과 입지는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앞으로는 북미 양자대화에서 중요한 사항들이 결정되면 6자회담이 추인하는 방식으로 상황이 전개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정부는 지난해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쌀.비료 지원을 지렛대로 활용하면서 남북관계를 악화시켜왔고, 지난 5월 21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는 남북간에 체결한 식량차관 합의서마저 일방적으로 저버렸다. 이 여파로 평양에서 개최된 6.15공동선언 발표 7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에 그간 당국대표단이 참석해오던 관례마저 깨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9.19공동성명과 2.13합의를 성사시킨 외교라인이 득세하면서 통일부가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있다. 게다가 통일외교안보 정책의 최고 목표에 북핵문제 해결을 내세우면서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발전을 병행하겠다던 참여정부의 초기 정책기조는 사라진지 오래다.

심지어 이재정 통일부 장관조차 지난 2월 20일 통일부 업무계획을 브리핑하면서 올해의 정책기조 첫 번째로 북한의 핵폐기 촉진을 꼽으면서 ‘가장 큰, 핵심적이고 중점적인 과제’라고 강조한 바 있다. 통일부 장관 스스로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발전의 병행원칙을 저버린 것이다.

하다못해 지난해 여름 북측의 수해 피해 복구를 지원하기 위한 쌀 지원마저도 2.13합의 이행에 연동시켜 시점을 계속 연기하는 치졸한 정책으로 일관했다.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북미관계는 BDA 문제가 완전 해결되기도 전에 힐 차관보가 방북하는 등 가속도를 더해가고 있지만 정작 남북관계는 사사건건 2.13합의 이행 이후로 미뤄오다 이제야 쌀 차관 제공을 검토하겠다고 하니 쌀을 받고서도 북측이 기분좋을 일이 없을 것이다.

2.13합의 초기조치 이행에 따른 중유 5만톤 제공도 합의에 따른 응당한 조치일 뿐 정부가 무슨 선심을 쓰는 일도 아니고 북측이 사의를 표할 일도 아니다.

북미관계와 6자회담이 속도를 더해가는 가운데 남북관계를 제대로 관리해오지 못한 정부가 뒷북을 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그동안 북핵 위협론과 퍼주기론을 공공연히 유포시켜왔던 한나라당과 보수언론들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늦었지만 정부는 이제라도 보수세력의 눈치보기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그간 대북정책이 잘못되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보다 전격적인 남북관계 복원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기존 약속들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한 단계 진전된 남북경협안도 좋고 남북정상회담 개최도 좋을 것이다.

더욱 좋기로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겨냥한 남북간에 가로놓인 법.제도적 장벽이나 정치적 근본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고, 군사적 신뢰조치를 축적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당면해서 한미 합동군사연습 유보 등 상호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조치들을 앞장서서 제기하고 실천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북측 역시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는 손잡고 함께 나가야 할 대상은 미국이 아니라 남측임을 '민족중시' 입장에서 숱하게 강조해온만큼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문제의 관건은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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