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년 전 그날 새벽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급보를 접한 미국 수뇌부가 대경실색 황급히 숙의한 끝에 유엔 안보리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군을 격퇴하라는 결의를 얻어내고 급거 출병하여 한국을 공산화의 문턱에서 아슬아슬하게 구해주었다는 것이 미국 당사자들이 회고하고 또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믿고 있는 한국전 발발 당시의 경위이다. 표면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내막은 좀 다르다.
1948년 8월과 9월 남북에 각각 분단정부가 선 후 소련군은 그해 12월 북한에서 철수했으며 미군은 이듬해 6월 말 남한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은 이에 앞서 트루먼의 지시로 북한 남침시의 대비책을 수립해 두었다. 이미 공개돼 있는 그해 6월 27일자 미국외교문서(FRUS 1949, VII, Pt. 2, 1046-1057)의 관련 부분을 요약하면 이렇다.
1) 북한 남침 시 미국의 개입이 없으면 남한은 붕괴되고 한반도는 공산화될 것이다. 2) 북한이 남침하면 미국은 유엔안보리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문제를 ‘국제화’한다. 3) 미국 단독이 아니라 여타 회원국들의 참여를 얻어 ‘평화유지행동(police action)’을 취한다. 4) 중국이 개입하면 희생이 큰 장기전이 될 것이다.
또한 그때 이미 세계 최정예 정보조직을 가진 미국은 북한의 남침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 6월 25일 새벽 4시라는 시점까지 알고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적어도 1주일 내에 북한으로 추정되는 공산군의 대규모 군사행동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6월 20일경 국무성에 입수된 것은 확인된 사실이다.
따라서 북한의 남침소식에 미국 수뇌부가 당황했다거나 황급히 숙의하여 유엔제재를 결정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미국은 이미 알고 기다리고 있던 사태가 일어나자 준비해 두었던 대비책에 따라 침착하게 사태에 임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북한의 남침 계획뿐 아니라 남한이 북한의 공격 앞에 붕괴될 것이라는 것까지 알면서 왜 남한에 필요한 군사원조를 주지 않았는가? 이승만이 미국원조로 북진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설명도 있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남한군이 북한군을 힘들게나마 막아내고 있는 상황보다는 북한군에게 패퇴하여 지리멸렬 상태가 됐을 때 미군이 출격하여 북한군을 격퇴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숭미의식과 미국인들의 반소감정을 북돋는데 보다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소련세력은 구라파와 아시아에서 급속히 팽창해가고 있었지만 미국인들은 2차대전 승전 기분에 잔뜩 취해서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대소(對蘇) 경계의식을 환기시키는 계기를 잡기 위해서는 어디선가 공산권의 무력도발 행위가 일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미국 지도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그러던 참에 마침 북한이 남침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으니 미국은 이를 역이용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런 배경 하에 애치슨 국무장관은 50년 1월 한반도를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하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부연해서 북한이 침공하더라도 한국은 능히 이를 방어할 능력이 있다고 언명했다. 또 5월에는 코널리 상원 외교위원장이 한국은 미국에게 절대중요한 나라가 아니니 소련이 한반도를 원한다면 미국은 이를 포기할 것이라고 언명했다.
북한의 남침 계획과 남한의 붕괴 필연성을 알면서도 미국의 당국자들이 이런 말을 한 진의는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실제에 있어서 북한은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것으로 믿고 안심하고 남침했다가 낭패를 당했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적했듯이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미리 소련에게 밝혔더라면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그렇게 안했다. 북한의 남침으로 발생되는 한국전쟁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우선 남한 군이 북한 군 앞에 괴멸되는 상황이 미국에게는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 한국인들에게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산 파괴를 가져올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미국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 길을 택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병 주고 약 준 것이 한국전에서 미국이 한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미국을 미워하자는 말이 아니다.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알고 너무 고마워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