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겠다.

첫째, 필자는 1988년~89년 관악구 신림동에서 야학을 한 바 있다. 대체로 20대 초중반 중졸 정도의 섬유의류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대학 4~5학년 운동권 학생들이 함께 어울려 한문, 국어 등과 같은 학과 수업과 공동체 놀이 등을 중심으로 4~5개월 과정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야학을 당시에는 생활야학이라 불렀는데 이 이외에도 초기 노동운동에는 검정고시야학, 노동야학 등이 많이 있었다. 유력한 노동운동가들의 이력을 유심히 살펴보면 어느 지점에선가 진보적 인텔리들과 만난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데 인텔리들과 노동자들과의 만남 과정에서 상당한 문제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는 청년회, 시민회 등의 운동이 발전했다. 도심지에 작은 사무실을 차려 놓고 풍물, 도서 대여, 노래 등의 취미 생활과 써클 활동 등을 통해 6월항쟁의 세례를 받은 비조직화된 시민층을 다수 조직하였다. 필자도 1990년대 초반 이런 형태의 시민회ㆍ청년회 활동을 한 바 있는데 90년대 초중반만 해도 이런 류의 조직이 상당한 정도의 대중 동원력을 갖고 있었다.

위 두 가지 사례는 1980년대 중후반 군부독재 하의 민중억압 구조 하에서 민중의 요구를 잘 대변한 운동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저임금과 가난 때문에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학업에 대한 요구를, 청년회ㆍ시민회 등은 획일화된 군사문화 속에서 누리지 못한 문화적 요구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한국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소득수준과 교육수준이 나아지면서 야학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양한 문화적 요구들은 TV와 같은 제도권 매체 또는 동사무소 등으로 수렴되었다.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IMF 이후이다. IMF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다시금 제도권에서 배제된 다수의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1980년대 중후반의 제도권이 군사적이고 폭압적인 전근대적인 구조였다면 21세기의 제도권은 잔인한 시장의 논리로 세상을 제도권과 비제도권으로 갈라놓고 있는 점이다.

필자는 이 중 교육ㆍ의료ㆍ주거ㆍ보육ㆍ노후ㆍ금융 등 여섯 가지 영역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육에서 제도권과 비제도권을 가르는 핵심적인 영역은 거대한 사교육 시장이다.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농민의 경우 사교육 시장에서 고소득 전문직과 경쟁할 수 없다. 서울의 명문대학은 점점 고연봉ㆍ고학력의 전문직ㆍ대기업 종사자들의 자녀들로 채워지고 있다.

의료의 경우는 비교적 공공영역이 잘 유지되다가 민간보험이 성장하면서 제도권이 서서히 주도권을 잃어가고 있다. 의료법 개정, 경제자유구역에서 해외 병원의 유치 등에 주목해야 하고 한미FTA에서 의약품 협상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향후 의료 분야에서 심각한 후과가 예상된다.

주거의 경우는 아예 공공 영역이 잘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분야에 비해 부동산 문제가 특히 문제가 된 이유는 공공영역이 발달하지 않으면서 적나라한 시장 논리가 판을 쳤기 때문이다.

보육 문제는 한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이다. 문제는 한국의 가임 여성들이 출산 파업의 형태로 문제를 사회적으로 분출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점이다. 저출산ㆍ고령화 문제는 향후 태풍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이전 시기 노후를 보장하는 곳은 주로 가정이었다. 별다른 사회보장 대책이 없었지만 한국경제가 고성장을 하는 조건에서 가정이 유지되면 노인들의 삶은 그런대로 보장된다. 그러나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가정 파괴가 맞물리면서 노인들 특히 저소득층 노인들의 삶은 그야말로 벼랑끝으로 몰려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가장 고통 받는 집단이 바로 이들 저소득 노인층이 아닐까 싶다.

최근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금융서비스이다. 은행 등 제도권 금융을 이용하지 못하는 저소득층이 대부업자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채색된 사채업자에게 대책 없이 희생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잔인한 시장 논리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면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저소득층이 대거 비제도권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것은 경제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이른바 유효수요만을 문제 삼는 신자유주의의 필연적인 양상이다. 따라서 운동 또한 이러한 변화에 조응해야 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시 영세민 지역에서 40~50대 비정규직 주부들의 자녀를 무료 또는 염가로 (사)교육할 수 있다. 진보진영은 상당수의 고학력 인텔리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는 대단히 효과적인 운동이 될 것이다(실제로 이는 서울의 민노당 모 지역위원회에서 구상하고 있는 바이다). 최근 전교조가 농어촌과 도시지역의 교육 양극화를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둘째, 진보정치 325호에서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 이선근씨는 대기업 노동자들이 사채를 이용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영세자영업자들을 위해 “다중 채무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신용상담활동과 지역 마이크로 크레디트의 설립” 등을 추진해 보자고 제안하고 있다.

그 외 운동가들이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공동육아를 한다거나 양심적인 치과 의사들이 고가의 치과 서비스를 염가로 제공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데 이러한 발상 중 효과적인 운동 형태를 골라 시급히 확산시켜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시장에서 배제된 대규모 빈민을 양산하는 점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운동형태는 이들 비제도권 빈민을 대상으로 한 거리 정치, 대중운동이다. 베네주엘라의 차베스가 기득권의 저항을 물리치고 권력지반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도 또한 헤즈볼라나 하마스와 같은 비정규 게릴라 부대가 미국ㆍ이스라엘의 압도적인 무력에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도 결국은 비제도권 빈민들이 지지였다.

반면 우리 운동은 지나치게 수준 높고 합리적인 정치적 주장들로 가득 차 있다. 1년 내내 쏟아져 나오는 기자회견문, 성명서, 집회ㆍ시위에서 제기되는 주장과 한국사회에서 대규모로 양산되고 있는 빈민들과의 결합 정도를 냉정히 돌아보라.

훨씬 많은 비중을, 빈민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들의 소소하지만 절박한 요구를 해결하는데 공을 들여야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기득권자와 운동하는 사람과의 차이이며 이러한 토대와 기초가 충분히 쌓였을 때 비로소 정치적 주장에도 대중적 힘이 실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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