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남북한 협력의 진전은 6자 회담 합의 사항의 진전과 맞물려 이뤄져야 한다”며 사실상 남북관계의 속도조절을 요구하고 나서 빈축을 사고 있다.

6자회담에서의 ‘2.13합의’ 도출에 힘입어 남북관계가 모처럼 정상궤도에 들어선 지금, 미국대사가 남북관계에 브레이크를 거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며, 내정간섭적 발언이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한심한 것은 버시바우 대사가 “한국 정부도 ‘남북관계 진전은 6자회담보다 항상 반보 뒤처져 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발언한 대목이다.

외교통상부와 통일부를 출입해온 기자가 보더라도 버시바우 대사의 이 같은 발언은 전면 부인할 수만은 없는 상당한 팩트(사실)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참여정부의 외교안보통일 정책은 표면상으로는 6자회담으로 대표되는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발전을 병행한다는 입장이었지만 현실은 늘 선 북핵문제 해결, 후 남북관계 발전이라는 양상을 띠어왔다.

특히 9.19공동성명과 2.13합의가 탄생하자 이에 기여한 외교라인이 힘을 얻으면서 노골적으로 선 북핵문제 해결의 목소리를 높여왔고 남북관계를 책임진 통일부마저 이 장단에 춤추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제 20차 남북장관급회담과 제13차 경추위회의에 임한 남북회담 대표들에게 6자회담 보다 앞서 나가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상부의 지침이 주어졌다는 설이 파다했으며, 회담 결과를 담은 공동보도문 역시 그 같은 범주를 넘어서지 않은 것으로 평가됐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버시바우 대사가 언급한 남북관계가 6자회담의 ‘반 발짝 뒤’라는 이야기가 2.13합의 이후 공공연하게 퍼졌고, 이같은 참여정부의 외교안보통일 정책은 2.13합의의 지연에도 불구하고 13차 경추위회의를 열어 쌀 차관을 제공할 것인가라는 시험대를 맞았다.

다행히 ‘2.13합의가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전제 하에 경추위는 예정대로 열렸고 40만톤 쌀 차관 제공 합의서가 작성됐다.

이 과정에서 통일부 신언상 차관은 지난 4월 5일 처음으로 “북한 핵문제 해결은 6자회담 틀이 있고, 또 남북관계발전이라는 우리의 당위가 있다”며 “이 양자가, 때로는 전자가 반발 앞설 수도 있고, 후자가 반발 앞설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우리 국민이나 정부나 언론인이나 한반도 상황이 안정적으로 관리돼야 하고, 그동안 잘 유지돼 온 남북관계의 동력이 상실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 발짝 뒤’와 ‘반 발짝 앞’이 병행될 수 있다는 통일부의 입장이 비로소 관철된 것으로 평가되는 ‘사건’이었다.

이재정 장관은 버시바우 대사의 발언 이튿날인 5일 정례브리핑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원칙적으로 남북관계, 남북대화의 틀이라는 것이 6자회담 틀과 함께 병행 추진해 왔고, 선순환적 기능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을 해왔다”며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고 답했다.

또한 “어느 쪽이 선으로, 후로 가느냐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변할 문제이다”며 “선후가 결정되거나 원칙에 따라서 진행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뒤늦게나마 통일부가 제 목소리를 내고 6자회담과 남북대화를 ‘병행’하겠다고 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미국대사가 남북관계의 ‘속도조절’을 주장하며 내세운 근거가 우리 정부 당국자의 ‘발 발짝 뒤’ 발언이었다는 뼈아픈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일부 외교라인의 당국자들이 아직도 ‘반 발짝 뒤’ 발상을 가지고 있다면 차제에 정부 내의 입장을 제대로 조율하고 한 목소리를 냄으로써 다시는 미국대사가 정부 당국자의 발언을 근거로 남북관계 속도조절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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