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부터 2일까지 평양 고려호텔에서 열린 제20차 남북 장관급회담이 6개항의 합의사항을 담은 공동보도문을 발표하고 막을 내렸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경색된 남북관계를 그 이전 상태로 복원시키고 이후 남북관계 일정들을 명시했다. 물론 미진한 점도 있지만 큰 틀에서 남북관계의 정상화와 발전을 위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에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측 수석대표인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비료 30만톤, 쌀 40만톤 지원 합의’ 발언이 해명에도 불구하고 남북간 ‘이면합의’가 아니냐는 비판이 터져나와 이같은 성과들이 묻히고 있다.

먼저 이재정 장관의 발언이 오락가락했다는 점에서 이 장관의 책임이 일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장관은 "양측이 이런 정도의 수준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냐라고 한 것이 비료 30만톤과 식량 40만톤이다"며 "양측이 합의한 내용이 그렇다"고 분명히 밝힌 뒤 나중에 다시 “이것은 장관급회담의 논의의 주제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을 결정하는 기구가 하나는 경추위가 있고 또 하나는 이것을 처리하는 기구가 대한적십자사기 때문이다"고 번복했다.

그러나 보수언론들이 마치 기다렸다는듯이 이 장관의 말바꾸기를 ‘이면합의’로 몰아가 마치 남북간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왔다는 식으로 대문짝 만하게 보도하는 모습을 보면 변함없는 보수언론들의 전형적인 남북관계 발전 트집잡기가 엿보인다.

북한이 예년 수준인 40만톤의 쌀과 30만톤의 비료 지원을 요청했고, 이는 기자들이 보더라도 북측의 요구가 상식적인 수준이다. 오히려 북측이 왜 그 정도 밖에 요구하지 않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나올 정도였다.

특히 북측은 지난해 이미 남북간에 지원하기로 합의했던 쌀.비료중 19차 장관급회담의 결렬로 지원이 중단됐던 분량에 대해서도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식적인 눈으로 보면 북측의 쌀 40만톤 비료 30만톤 제공 요청은 남측이 받아들일만한 수준이고 당연히 이번 회담에서 남북간 공감대가 원칙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사실상 원칙적 합의’가 있었다고 보도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를 마치 무슨 이면합의인 양 비판한다면 그야말로 형식논리에 불과하다.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회의와 남북적십자사회담을 통해서 쌀비료 지원 절차가 진행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결정은 장관급회담의 몫임에 틀림없다.

쌀비료 지원량에 대해 장관급회담에서 납득할만한 수준에서 원칙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오히려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은 그 지원 시기와 조건이라는 것은 상식이라 할 수 있다.

이번 공동보도문과 이후 알려진 내용에 따르면 남북은 ‘봄철 비료지원(적십자 전통문) ->이산가족 화상상봉(3.27-29) ->2.13합의 초기조치 완료(4.14) ->쌀지원 협의(경추위 4.18-21)->이산가족 대면상봉(5월초)’이라는 고리를 서로 맞물리게 배치했다.

한마디로 쌀비료 지원은 북측의 인도주의적 문제에 대한 협력과 2.13합의 이행 경과를 보면서 실행하겠다는 ‘조건부 합의’인 셈이다. 물론 북측도 쌀비료를 지원받아야 이산가족 상봉에 응하겠다는 입장을 관철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조건부 합의는 그간 국내 보수세력들이 누누이 강조해온 ‘상호주의’의 한 형태임이 분명하다. 보수 언론들의 그간 논조에서 보자면 이같은 협상결과를 이끌어낸 이 장관에게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그간 정부가 쌀비료 지원을 남북문제를 풀어가는 ‘지렛대’로 ‘비공식적으로’ 활용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처럼 노골적으로 더구나 ‘6자회담’과 연계시킨 전례는 없었다는 점에서 신중한 평가가 요구된다.

이른바 ‘인도주의적 지원’의 성격이 강한 쌀과 비료를 남북관계는 물론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대북 압박카드로 활용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정부가 선택한 쌀비료 지원이라는 가장 인도주의적이고 동포애적인 사안을 가장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전술은 결코 바람직하지 만은 않은 선택으로 보인다. 심지어 미국도 최근 북미관계가 협상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대북 인도주의적 지원을 조건없이 재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번 장관급회담 결과의 문제점은 이면합의가 아니라 조건부 합의, 그것도 가장 인도주의적이고 동포애적인 쌀비료 지원이 가장 정치적인 카드로 쓰임으로써 결국 동포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빨리 덜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직 남북간에는 남북의 수석대표들이 언급한 바 있는 ‘신의’와 ‘민족 우선’의 정신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는 기반이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면합의나 조건부 합의와 같은 말들이 다시는 발붙일 수 없는 날이 오리라는 것도 또한 자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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