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제재부터 해제하고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논의에 들어갈 걸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제재 해제에 대한 행동적인 조치는 없이 우리 핵시설 가동 중단, 검증을 요구했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의 이러한 입장을 반대하고 우리의 제안을 돌아가서 깊이 연구해보라고 했다. 우리는 앞으로 미국의 동향을 주시해보겠다.”(6자회담 북측 단장 김계관)

“우리가 추진해온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사안들에 대한 합의를 이룰 수 없었다는데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북한측은 불법 금융거래 문제로 평양 정권을 고립화시키려는 미국 당국의 제재조치를 완화하라는 요구에 집착했다. 북측 대표단은 9.19 공동성명에 대한 협상 재량권을 갖고 있지 않았다.”(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

지난 18일부터 22일까지 5일간 지속된 제5차 6자회담 2단계회의가 다음 회담 일정에도 합의하지 못한채 휴회하게 됨으로써 6자회담이 당분가 표류하게 되었다. 6자회담 기간 중인 19,20일 북미간 진행된 BDA(방코델타아시아)회담 역시 다음을 기약하고 특별한 결과를 내놓지 못한 채 끝났다.

22일 모든 회담 공식일정을 마친 김계관 북측 단장은 첫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회담에 대해 위와 같이 간략하게 요약했고, 매일 숙소를 드나들며 기자들을 만나온 크리스토퍼 힐 미국측 수석대표는 22일 밤 숙소로 돌아와 위와 같이 평가했다.

회담이 사실상 실패한 이유야 널리 알려졌듯이 ‘선 금융제재 해제’를 내세운 북측의 주장에 대해 미국측은 ‘BDA회담과 6자회담은 별개’라며 ‘선 비핵화와 상응조치 타결’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모처럼 ‘수뇌부’의 승인하에 9.19공동성명에 대한 포괄적 이행방안과 초기단계 이행조치에 관한 좀더 구체화된 안을 준비해온 미국측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은 “지극히 실망감이 크다”며 북측이 평양으로부터 받은 ‘엄격한 협상 지침’을 탓하기도 했다.

차관보라는 직급에 견주어 중책인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될 것으로 알려진 힐은 회담기간 동안 진지한 자세로 협상에 임했고 지난달 말 베이징에서 북미 수석대표간 회동 때보다 구체화된 이른바 ‘수정안’에 대해서 북측에 자세히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장국인 중국은 다이빙궈 외교부 상무부부장과 리자오싱 외교부 부장, 탕자쉬안 국무위원 등 외교라인을 총출동시키며 회담 일정을 하루 연기시키면서까지 협상의 진전을 독려했지만 결국 회담은 사실상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처럼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6자회담이 결실을 거두지 못한 것은 회담의 핵심당사국인 미국과 북한이 ‘압력’과 ‘방패’를 내세운 채 ‘대화’를 진행함으로써 결국 ‘실패한 대화’의 장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김계관 북측 단장은 “미국은 지금 대화와 압력, 당근과 채찍을 병행해 나오고 있다. 이에 우리는 대화와 방패로 맞서고 있다. 방패라는 것은 우리의 억제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다”고 비유했다.

북미 양측이 대화의 장에 나왔지만 압력과 방패를 버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BDA문제는 6자회담과 별개라며 제재 해제를 요구하는 북측의 요구를 일축했고, 북한은 핵무기 포기에 관한 조치를 요구하는 미국측 요구를 제재가 가해지고 있는 한 핵무기 포기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로 외면했다.

특히 북측은 ‘핵무기 포기’와 ‘현존하는 핵계획 포기’를 구분하여 현단계에서는 제재가 해제되면 후자를 논의할 수 있다는 핵실험 이후에 새롭게 정립된 논리를 제시했다.

결국 압력과 채찍이 있는 한 방패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압력과 채찍을 거두어들이는, 즉 대북 적대시정책을 평화공존정책으로 전환하는 미국의 구체적 조치가 있어야 북측도 핵무기 증산과 이전 등 현존하는 핵계획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핵무기 포기는 미국이 대북 적대시정책을 완전히 철폐하고 신뢰가 조성돼서 핵위협을 더는 느끼지 않을 때에 가서야 논의하자는 입장이다.

이에 비해 미국측은 6자회담과 BDA회담은 별개이고 BDA회담은 금융실무 문제이므로 6자회담에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측은 6자회담을 통해서 9.19공동성명에 명시된 북한의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핵계획을 포기하기는 이른바 포괄적 이행방안을 마련하고 현단계 실현 가능한 초기 이행조치를 마련하기 위해 집중하자는 입장이다. 이같은 입장은 중국과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미국 대표단은 ‘수뇌부’의 승인을 받은 나름의 91.9공동선언 이행방안과 북미가 서로 취해야할 초기 이행조치에 대한 제안을 가지고 나왔으며, 이행방안은 동결-신고-검증-폐기로 이어지는 복잡한 과정을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북미간 상호 취해야할 행동조치를 묶은 이른바 ‘패키지 딜’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초기 이행조치로는 동결 단계에서는 서면화된 체제안전보장이나 종전협정 서명 등 주로 북한의 안전보장 조치가 제공되며 신고 단계에서는 경제적 지원과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방안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BDA회담 미국측 대표인 대니얼 글레이저는 BDA회담이 ‘장기적 과정’(long-term process)이 될 것이라고 말해 조만간에는 대북 금융제재 문제의 해결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더구나 북측이 19,20일 두 차례의 BDA회담을 마친 뒤에도 21일 한번 더 회담을 갖자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미국측 대표단은 21일 오전 귀국하고 말았다.

결국 북한은 BDA회담의 진전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6자회담의 진전을 요구하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BDA회담이 끝남으로써 사실상 6자회담도 끝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의장국인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초기 단계 이행조치를 더 협의하기 위해 6자회담을 하루 더 연장하자고 제안했으며, 북측은 이를 거부하지 않고 응했다.

회담을 마치고 천영우 한국측 수석대표는 “이번 회담을 통해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단계 조치 등에 대해 실질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관련 당사국들이 갖고 있는 핵심적 관심사항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는 점에서 일단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고 평가된다”며 “이번 회담은 차기 회담에서 실질적 진전을 이루기 위한 정지작업을 하고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고 애써 긍정적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측 회담 관계자도 “미국이 실망한 것은 미국이 이번에 굉장히 아주 파격적이고 포괄적인 자기 나름대로 제안을 가지고 왔다”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북한으로부터 기대하는 반응을 듣지 못했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북한이 그것을 거부했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이 북한과 여러 차례 장시간의 양자협의를 가졌는데, 미국의 자세가 매우 진지하고, 굉장히 옛날하고 달랐다”고 전했다.

9.19공동성명이 발표된지 15개월, 5차 1단계회의가 열린지 13개월 만에 북미간 사전 조율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열린 이번 회담은 압력과 방패가 대화의 진전을 가로막았고, 문제의 핵심이 BDA금융제재 해제로 대표되는 대북 적대시정책의 폐기, 즉 북미간 ‘신뢰’의 문제라는 점을 다시한번 분명히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회담 과정에서 북측의 의제 설정 능력과 크리스마스라는 한계시한을 적절히 활용한 회담 전술은 북측의 의도대로 BDA문제를 중점 부각시켰고, 미국은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

특히 이번 회담은 그 어느 때보다 핵심당사자인 북미 양자간의 구도로 진행됐고, 이전과 달리 중국과 한국이 대체로 미국 편에 섬으로써 중재력이 약화된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은 북한의 핵실험 이후 유엔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에 찬성, 지지한 바 있고 특히 한국은 북한에 쌀과 비료지원을 중단하기까지 했다. 이번 회담에서 중국은 그나마 의장국으로서 중재와 조율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한국측의 입지는 더욱 협소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은 4차 1단계회의 당시와 마찬가지로 단 한차례도 북한과 양자협의를 갖지 못함으로써 북한 핵실험이후 취한 대북 강경조치가 국제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어가야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북측의 회담전술에 미국이 완패한 회담, BDA로 시작해서 BDA로 끝난 회담, 압력과 방패에 눌려 실패한 대화, 그러나 다음 회담을 위한 징검다리가 이번 제5차 6자회담 2단계회의의 결론이다.

따라서 이후 속개 일정도 명시하지 못한 채 휴회한 이번 6자회담이 다시 열리기 위해서는 내년 1월 중순경 뉴욕에서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2차 BDA회담이 진전된 결실을 거두어야 할 것으로 보이며, 장외에서의 지루하고 치열한 샅바싸움이 다시한번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이번 회담 결과와 이후의 지루한 줄다리가 6자회담 무용론이나 대북 제재 강화론을 촉발시킬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6자회담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고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실질적 조치만이 이를 실현할 수 있다는데 6개 참가국이 모두 동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6자회담은 여전히 지속될 당위성과 내적 동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미 양국 대표단은 본국으로 돌아가 이번 회담 결과를 보고하고 ‘가장 빠른 기회’(the earliest opportunity)에 제5차 6자회담 3단계회의에 임할 것으로 보인다. 힐 미국측 수석대표는 몇 달이 아니라 몇 주 후에 6자회담이 재개될 것이라고 말하고 베이징 회담장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조기 회담 가동 의지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BDA회담과 미국 내부의 의견차, 중국과 한국과의 공조 문제 등 넘어야할 산이 한 두 개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속한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모든 이들이 이번 6자회담 결과를 아쉽게 받아들이고 압력과 방패가 하루빨리 거두어지고 결실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6자회담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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