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KAL858기 사건 19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국정원에 촉구합니다. 기체 수색, 실제 수사, 남북공동조사, 마침표는 김현희가 하겠지요. 국정원은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밝히고 희생자에게 가족에게 정중하게 사과하십시오."

19년간 남편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려온 차옥정 'KAL858기 사건 가족회'(가족회) 회장은 "진상규명이 문턱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원점"이라며 이같이 요구했다.

▶차옥정 회장이 준비해온 인사말을 낭독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상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발전위, 위원장 오충일)는 지난해 2월 3일 우선 조사대상 7대 사건 중 하나로 KAL858기 사건을 선정하고 조사를 진행해 지난 8월 1일 조사결과를 중간 발표했으나 가족회와 대책위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박 성명을 발표하고 11월 15일 '진실화해를 통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과거사위, 위원장 송기인)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바 있다.

중동 근로자 등 115명의 승객을 싣고 이라크 아부다비를 출발한 뒤 미얀마 인근 안다만해 상공에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 KAL858기 사건이 발생한지 꼭 19년째가 되는 29일, 어김없이 추모제가 열렸지만 아직 사건의 진상규명은 요원한 상태이다.

이날 오전 11시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7층 강당에서 최광기씨의 사회로 진행된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9주기 추모제'가 60여명의 가족들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 8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가족회 차옥정 회장은 "년년이 맞는 추모행사지만 영령들께 편히 쉬세요, 영면하세요, 이 말을 할 수가 없다"며 "끝없이 구천을 헤매며 울부짖는 것만 같아 가슴이 미어진다"고 심경을 전했다.

차 회장은 국정원 발전위(위원장 오충일)의 진상조사에 대해 "현 국정원장 김만복(당시 국정원 기조실장으로서 국정원 발전위 국정원측 간사)이 OK하면 조사가 가능했고 NO하면 조사가 어려웠다고 전했다"며 "국정원측이 김형욱 실종사건이나 부일장학회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지만 인혁당사건, 중부지역당 사건, KAL858기 사건 등에서는 소극적이었다고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19년이 지났건만 가족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차 회장은 특히 "우리 국내 언론이 KAL858기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심지어 왜곡보도를 일삼을 때 일본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전 세계를 발로 누비며 조사한 노다 미네오 씨가 있다"며 "파괴공작이란 책이 출판되자 국정원은 5웍원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입국금지를 시켰다"고 상기시키고 "국제적으로 부끄러운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앞서 이 사건에 대한 경과보고를 한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은 사목활동을 위해 미국으로 파견된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대책위, 상임대표 김병상)의 전 집행위원장 신성국 신부의 인사말을 전한 뒤 그간의 경과와 과거사위에 진정을 접수시킨 과정을 설명하고 "국가에 조사 요청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만큼 과거사위에서 진실이 밝혀질 수 있도록 가족과 시민사회가 힘을 모아 나가겠다"고 말했다.

대책위 공동대표인 변연식 천주교인권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가 작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일을 회상하며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할지 생각하면 차마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며 "이 자리에 서는 것조차 한없이 죄송하고 부끄럽다"고 미안해 했다.

변 위원장은 "20년이 다 된 지금도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가족 여러분에게는 분노를 넘어 절망으로까지 느껴지지 않을까 염려된다"며 "지금 당장 모든 진실이 밝혀지지 않더라도 결국은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을 믿는다"고 격려했다. 변 위원장은 "혼자로는 힘이 들겠지만 서로의 어깨를 붙들어주며 함께 가는 우리들이 있기에 우리의 투쟁은 반드시 승리하여 모든 진실을 낱낱이 밝혀낼 수 있을 것을 믿는다"고 덧붙였다.

▶오종렬 전국민중연대 공동의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오종렬 전국민중연대 공동의장은 추도사에서 "이 사건이 만약에 범죄라면 반드시 혜택을 받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라며 KAL858기 사건으로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북한은 오히려 테러국가로 지정돼 혹심한 봉쇄와 압박을 받았지만 '광주 학살의 공동 주범인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지적했다.

오 의장은 "과거사위가 국정원 발전위 보다 능력과 권한이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고 추진력을 주느냐에 따라 할 수가 있다"며 "잡은 손 놓지 말고 함께 전진해 나가자"고 격려했다.

곽태영 민족정기선양회 회장은 추도사에서 "사건 발생 당시 이북에서 살다온 친구들이 처음부터 조작이라고 했다"며 1998년 1월 15일 수사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의 김현희가 사용한 어투가 북한 사람들의 어투와 달랐다고 말하고, 자신이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를 추적해온 경험을 들려줬다.

곽 회장은 "대한민국은 범죄 공화국"이라며 "김구 선생 암살사건이 50년만에 시원치는 않지만 미국 CIC(현 CIA)가 이승만 정권과 결탁해 저지른 사건으로 밝혀졌듯이 KAL858기 사건의 진상이 규명될 때 대한민국이 범죄공화국을 벗어나는 첫 관문이 될 것이다"고 주장했다.

▶한대수씨의 추모공연이 펼쳐져 가족들의 눈시울을 뜨겁게했다. [사진 - 김주영 기자]
이어 한대수 민예총 거창지부장의 추모공연이 이어지자 유족들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115명의 이름이 씌어진 무대 위에서 줄지어 헌화하면서 일부 유족은 애써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당시 41살이었던 큰아들 정종태씨를 잃은 최창분(76)씨는 "그저께는 셋째 아들이 큰 아들로 보여 뒤돌아보고 또 봤다"며 "아는 놈이 입을 열어야지. 죽기 전에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울산에서 새벽 5시 반에 집을 나서 비행기를 타고 참석했다는 이수옥(54)씨는 10살 이상 나이 차가 나는 남편 김용진(당시 47)씨를 19년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며 "어디 있는지,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안 든다"고 안타까워하며 "맑고 선명하게 밝혀주면 좋은데 맨날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하니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소연했다.

▶국정원 발전위의 실망스런 조사결과 중간발표 탓인지 참석자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이날 추모제에는 발언자들 외에도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 심재환 민변 통일위원장, 허영춘 의문사유가족대책위 위원장, 심우성 한국민속극연구소 소장, 최재수 KAL858기 사건 연구자, 서우영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 김명운 추모연대 집행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추모제를 마친 가족 60여명은 그 자리에서 모임을 갖고 국정원 발전위의 조사 내용과 과거사위 진정 과정 등에 대해 설명을 듣고 논의했으며, 과거사위 진정에 연서명한 65명의 가족 외에도 추가로 서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고지했다.

▶변연식 천주교인권위원장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의 표정도 무거워 보였다.
[사진 -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기대를 모았던 국정원 발전위의 조사결과가 당시 안기부의 '무지개 공작'(KAL858기 사건을 정부차원에서 대선에 이용한 공작)을 밝혀낸 것 외에는, 김현희에 대한 직접 조사가 이뤄지지 못하고, 동체 수색에도 실패한 채 사실상 마무리됨으로써 진실규명은 또다시 멀어지게 됐다.

이제 가족회와 대책위는 과거사위에 진상규명을 진정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있지만 19주기 추모제 참여자들의 표정에는 깊은 아픔이 서려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