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의 죽음 이후 좌우합작운동은 사실상 완전히 끝났습니다. 동시에 중도파의 입지도 그만큼 좁아집니다. 미소공동위원회 마저 사실상 끝장나면서 이승만의 단선노선이 득세하게 되자 중도파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47년 후반부터 중도파를 중심으로 단정에 반대하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홍명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홍명희는 우리에게 정치가로서 보다 대하 소설 임꺽정의 필자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제 시대 민족적 저항의식과 계급의식을 심어주며 대중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임꺽정은  현재 20세기 한국 최고의 민족문학으로 남북에서 동시에 평가받고 있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 남한에서는 금서로 남아 있었습니다. 홍명희가 월북해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지냈기 때문입니다.

홍명희는 일반의 상식과는 달리 단순히 문인이 아니라 일찍부터 사회활동에 깊이 관여해온 가장 대표적인 현실참여 지식인이며 사회운동가였습니다. 구한말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던 1888년 충북 괴산에서 명문 사대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홍명희는 식민지 시대 이광수·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울 만큼 뛰어난 재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광수나 최남선이 변절해 친일파가 되었던 것과는 달리, 신간회 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가하였으며 끝까지 민족적 지조와 절개를 지켰습니다. 때문에 그는 일반 대중은 물론 지식인과 정파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해방 후 좌우익의 끈질긴 요구에도 움직이지 않던 홍명희가 정치활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46년 말부터였습니다. 그 전까지 1945년 12월 13일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1946년 2월 `전국문학가동맹`으로 개칭)의 위원장을 맡아 문학활동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6년 12월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미군정의 의도대로 입법의원이 구성되자, 그는 관선의원직을 사퇴하고 과거 신간회 서울지부 인사들과 학계·언론계·실업계 인사를 중심으로 `민주통일당`을 결성합니다. 좌익 3당 합당에서 배제되거나 좌우익 어디에도 쉽게 포섭되지 않는 진보적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을 묶어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민주통일당 결성 후 홍명희는 여운형·안재홍 등과 함께 중도 정당의 통합문제를 논의했고, 여운형 암살 후에는 스스로 정당 통합을 주도합니다. 그렇게 해서 1947년 9월 11일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하는 신당발기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0월 19일 민주독립당이 결성됩니다. 또한 1947년 후반기에는 민주독립당을 기반으로 하는 `강력한 연맹체`를 지향하는 민족자주연맹이 조직되기에 이릅니다. 민족자주연맹은 1947년 상반기 중도파의 전선조직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민족자주연맹은 1947년 10월 1일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김병로·김붕준·홍명희·이극로 등 준비위원 30명을 선출하고, 12월 20일 전국 대의원 8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천도교 강당에서 결성식을 올립니다. 민족자주연맹은 4개 연합단체, 14개 정당, 25개 사회단체 및 개인으로 구성된 말 그대로 중도파의 연합전선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중도우파·중도파·중도좌파로 분류할 수 있는 정치세력과 정당이 함께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연합단체로는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시국대책협의회를 비롯, 민주주의독립전선, 미소공동대책위원회가 참가하고 있었지만, 김규식 계열이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정당은 대부분 군소정당이었고, 그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있는` 당은 중도좌파의 민중동맹·민주한독당·근로인민당과 중도파의 민주독립당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당들이 분파로 갈려져 있어 홍명희의 민주독립당이 지도력이나 수적으로 가장 강력했습니다.(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188∼189쪽 참고)

민주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은 그 후 단독정부를 저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하여 남북의 정치세력들이 모인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를 추진해가는 한 축이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때부터 이미 남북협상과 남북연석회의를 위한 준비가 시작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해방 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홍명희의 정치활동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월북한 뒤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냈다는 것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치부된 측면도 작용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의 활동을 밝혀줄 자료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새로운 사실들이 발굴되면서 홍명희는 김구·김규식이 주도한 것으로만 알려진 남북연석회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이미 평양을 세 번씩이나 방문해 남북한의 정치 정세와 관련해 김일성·김두봉 등 북한 최고지도부와 깊이 있는 의견을 교환했고, 흩어져 있던 중도파 세력을 모으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연석회의가 성사되는 과정에서는 김구나 김규식이 주저하거나 힘들어할 때마다 그들을 추동하는 등 중요한 정치역할을 해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212∼223쪽/ 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창작과비평사, 442∼519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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