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북의 핵실험이 파란을 몰고 있다. 북 핵실험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객관 상황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핵실험을 둘러 싼 힘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이다.

아래에서는 중동과 북미 공방을 중심으로 객관적인 힘 관계를 분석해 보겠다.

1. 국제정세

보통 1945~91년 사이를 미소 양극 질서의 시기로 보고 1991년 소련 붕괴 이후를 미국 중심의 일극 질서의 시기로 본다. 미국 중심의 일극 질서는 대체로 2020년경까지 유지될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2020년경 문명적 수준의 정세가 어떻게 될 지는 필자로서는 알 수 없다. 문제는 2001년 출범한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가 세계정세를 파란으로 몰아갔고 현재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2006~2008년의 어느 시점에서 불가피하게 파열될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이다.

이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2001년 9.11 이후 미국이 9.11을 이라크와 연결시키면서 정세가 격동하기 시작했다. 이라크는 중동의 요충지역이고 세계 2위의 산유국이었으며 인구 2000만이 넘는 중규모 국가였다. 따라서 이라크에 대한 전쟁은 국제정세의 파란을 몰고 갈 중대사안이었고, 2001년 이후의 국제 정세는 이라크 침략에 대한 입장을 중심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라크 침략에 우호적인 세력을 중심으로 친미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여기에는 유럽에서 영국과 동유럽, 아시아에서 일본, 호주 등이 포함된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반대했던 집단은 유럽에서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이다. 세계열강이 친미적 세계와 탈미적 세계로 양분되면서 미국은 UN 안보리의 승인을 받는데 실패했다. 미국은 UN 안보리의 승인도 없이 이라크 침략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UN 안보리의 승인을 얻지 못한 것은 이후 정세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여전히 세계 질서의 주요 변수는 여러 열강들이다. 1945~91년 미국이 소련과의 냉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한 힘은 당시로 보면 선진 부국인 유럽연합과 일본을 대소 전선에 배치시킬 수 있었던 도덕적, 정치적 힘이었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욕심에 눈이 멀어 주요 열강의 지지를 얻는 작업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고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미국과 유럽연합의 분열과 함께 중요한 것은 중국과 러시아의 동향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에 협력하는 듯 하면서도 미국에 대한 의미있는 견제에 돌입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곳곳에서 미국과 대치하고 있다. 가령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등에서 벌어진 시민혁명은 러시아의 강경정책에 의해 벽에 부딪혔고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전후하여 미군 기지가 들어섰다가 중국이 중심이 된 상하이협력기구에 의해 잠식되고 있다. 중국은 아프리카, 사우디아리비아, 중남미 등지에서 에너지를 둘러싸고 미국과 대치하고 있다.

2006년 3월 미국이 인도의 핵을 묵인하면서까지 인도와 협력관계를 구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힘의 한계에 봉착한 미국의 정책 전환 때문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중.러의 대미 견제가 인도로까지 확장되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전히 미국의 힘의 우위가 유지되고 있지만 그것은 무한의 권리를 보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곳곳에서 주요 열강의 이해와 질서를 용인하는 범위에서만 인정되는 불안정한 것이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이 한계를 넘어 선 것으로 그 결과 미국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미국의 일방주의가 심화되면서 제 3세계의 저항이 격렬해지고 있다. 이는 북, 이란의 핵 공세와 중남미의 반 신자유주의로 집약할 수 있는데 본 글에서는 중동 정세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2001년 9.11 이후 미국이 테러와 현존하는 중동의 정치질서를 분리하여 테러에 한정하여 대응했다면 미국의 지도력은 상당 부분 견고했을 것이다. 미국의 최대 패착은 9.11과 이라크 침략을 연결시킨 것이다.

이로써 9.11의 주역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반미의 상징으로 급부상하였다. 오사마 빈 라덴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여전히 미국과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제2, 제3의 오사마 빈 라덴이 세계 각지에서 출몰하고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 영국의 런던 등에서 자행된 테러와 지금도 세계 전역에서 모의.실행되고 있는 테러는 빈 라덴의 지시나 알-카에다와의 조직적 연계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무슬림 청년들이 반미라는 신념하에 자발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분출되고 있는 이슬람계 민중들의 저항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반미는 이제 중동, 이슬람세계의 표준이 되었다.

테러와 관련 가장 충격적인 사태 진전은 아프가니스탄과 소말리아이다. 아프가니스탄은 빈 라덴의 동료였던 오마르가 지휘하는 탈레반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2001년 10월 아프간을 침공한 미국은 탈레반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데 성공했다. 탈레반을 축출했으면 당연히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건설하여 아프간 민심을 돌볼 일이었다. 그러나 침략에 눈이 어두운 미국은 민심을 돌보기는커녕 곳곳에서 탈레반 잔당을 소탕한다는 미명하에 군사작전을 벌이고 아프간에 산적한 사회경제적인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간의 민심은 반미로 돌아 서고 탈레반은 극적으로 재기하고 있다. 지금 상황이라면 2~3년 안에 미국(현재는 나토군, 미군이나 나토군이나 본질적으로는 같다)은 아프간에서 축출될 것이다. 이와 유사한 현상이 아프리카 동부 소말리아에서 진행되고 있다. 소말리아에서도 친미 군벌을 대신해 테러와 친연성이 높은 군벌이 정권을 넘보고 있다.

미국의 대테러전쟁은 심각한 국면으로 빠져 들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의 최대 아이러니는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확장을 저지했던 중동의 수니 세속파 정권 사담 후세인을 제거함으로써 강경 시아파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정체 세력의 약진을 가져 온 점이다. 아마도 후세의 역사는 9.11과 이라크 침략보다도 강경 시아파 이슬람의 부상을 중요하게 취급할 것이다.

사담 후세인 정부가 무너졌지만 이라크 민중의 저항은 끝도 없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의 안이한 예상은 후세인 정부만 무너지면 친미 정부가 들어설 것으로 본 점이다. 이라크에서 미국에 의해 육성된 친미 정치인들은 아예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는 반면 알-시스타니를 중심으로 온건 시아파가 권력을 잡았다.

문제는 이라크 남부의 알-사드르를 중심으로 한 강경 시아파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고 중동 전체의 정치 지형을 고려하면 강경 시아파의 부상이 기본 추세라는 점이다. 사담 후세인이 무너진 자리에 이란 계열의 강경 시아파가 부상하는 것은 미국에 입장에서 보면 꿈에도 생각하기 싫었던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아니면 내전인데 내전이 발생하더라도 이란의 세력 확장은 기정사실이다.

9.11과 이라크 침략이 가져온 최대 파란은 2005년 6월의 이란 대선이다. 1990년대 이란, 북, 이라크는 이른바 두 개의 전쟁, Win-Win 전략의 주요 대상들이었고 2002년 1월 부시 행정부가 ‘악의 축’으로 지목한 나라들이다. 그러나 이들 세 나라는 미국의 태도 여하에 따라 극적으로 입장이 갈렸다.

<표> 북, 이란, 이라크의 시기별 분화과정

 

 

1990년대 초반

1990년대 중반

2001년 이후

제네바 합의

- 선군정치

- 강경 반미, 황장엽 등의 주변적 반발

- 고난의 행군

- 핵 공방

이란

 

- 97,2001년 온건파 승리

- 96년 미국의 경제제재 

- 2001년 9.11

- 2002년 1.29 악의 축

- 2003년 3월 이라크 침략

- 2004년 하반기 이라크 남부에서 미국과 시아파의 대결

- 2005년 6월 이란 대선

이라크

1차 이라크 전쟁

- 경제 제재로 와해

- 2차 이라크 침략

 

1990년대 미국의 경제제재로 와해된 이라크는 결국 미국의 희생양이 되었다. 반면 선군정치를 표방한 북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90년대 중반 북과 달리 온건파가 정권을 잡았던 이란에서는 온건파의 입지가 약화되고 강경파가 급부상하는 가운데 급기야 2005년 6월 대선에서 강경파를 상징하는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란의 경우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던 이라크를 침공한 조건에서 또 다른 악의 축으로 지목되었던 이란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침략에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2004년 하반기에는 이라크 남부 시아파 성지에서 미국과 시아파 사이의 대결이 격화되어 시아파를 자극했다. 이 결과 2005년 6월 핵 무장을 공언하는 강경 정권이 중동의 심장부 인구 7천만의 강국 이란에 등장한 것이다. 9.11과 이라크 침략이 가져온 최대 역설이 중동 전체를 돌고 돌아 이란에서 대폭발한 것이다.

이란에서 강경 반미 정권이 들어서면서 중동은 태풍의 영향권 내로 접어들었다. ‘미국 대 강경 시아 이슬람’의 대결이 중동의 운명을 좌우할 격돌이라면 서전에 해당하는 것이 ‘이스라엘 대 하마스, 헤즈볼라’ 사이의 국지전이다.

미국이 추진했던 이른바 민주주의의 확산 전략은 미국의 의도와는 달리 반미 세력의 대약진으로 귀결되었다. 이집트에서 무슬림 형제단, 팔레스타인에서의 하마스, 레바논 남부에서 헤즈볼라는 직접 선거에 의해 제도권에 진출하였다. 또한 미국의 민주주의 확산 전략은 미국의 맹방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의 정정(政情) 불안을 가져왔다.

민주주의 확산 전략이 미국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자 미국은 뻔뻔스럽게 직접 선거로 선출된 정치 세력의 와해에 착수했다. 이를 대리한 것이 이스라엘이다. 올 7월 ‘이스라엘 대 하마스, 헤즈볼라’ 사이의 대격돌은 ‘미국 대 이란’ 대결의 서막으로 중동의 운명을 예견할 수 있는 중요한 대결이었다.

여기서 레바논 남부의 자그만 정치조직 헤즈볼라는 중동 최강의 이스라엘 군대를 맞아 34일(?)을 버티고 이스라엘 북부에 반격을 가하는 경이적인 저항을 수행했다. 승패를 장담할 수 없게 되자 휴전에 들어갔지만 정치적 승패는 확연했다. 중동 최강의 이스라엘의 불패 신화가 레바논 남부에 웅거한 군소 정치조직의 저항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승리는 신화를 낳고 신화는 화산이 되어 폭발하는 법이다. 2005년 6월 이란에서 시작된 극적인 변화는 이란과 이라크 남부, 사우디 동부의 시아파 벨트를 타고 미국의 중동 패권을 뿌리째 위협하고 있다.

2. 북미 공방

이제 세계적인 변수이면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초미의 현안인 북핵 문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2005년 1월 출범한 부시 2기 행정부에서 체니, 럼스펠드류의 강경파가 아니라 라이스류의 현실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이들 현실주의 세력은 이라크 전쟁을 수습하고 중국과 중동 등과 관련한 새로운 정책을 구체화하고 있다.

중국은 2005년 상반기를 경계로 기존의 봉쇄 대상에서 협력과 대결을 함께 구사하는 포용 정책으로(전략적 경쟁자에서 이해상관자로) 중동에서는 이슬람 정권을 민주주의 정권으로 바꾸어 중동 전체를 안정화시키겠다는 민주주의 확산 정책에서 친미 온건 세력 육성.유지 전략으로 선회한다. 부시 행정부의 세계전략은 1기에서 2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의미있게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2001~2004년 부시 1기 행정부에서 6자회담은 미국이 이라크 침략을 감행하고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조건에서 진행된 기형적인 회담이다. 북미 모두 회담을 전진시킬 동력이 없었다. 미국은 이라크에 발이 묶인 조건에서 북을 상대할 여력이 없었고 북 또한 미국의 태도 변화가 없는 조건에서 의례적인 회담에 나서는 한편 핵 억제력을 증진시키는 이중 전략을 구사했다. 이런 조건에서 미국의 강경한 대중 정책을 고려한 중국은 6자회담 장소를 제공하며 외교적 성과를 챙기고 있었고 노무현 정부는 상황을 관리하느라 시간을 까먹고 있었다.

2005년 부시 2기 행정부가 들어서자 미국-중국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에서 이해상관자로 변화시킨데 기초하여 ‘미중 협력, 6자회담, 경제제재를 통한 북 정권의 교체’를 추진하기 시작한다. 이는 이전 시기의 대북 정책에 비해 협상의 여지를 열어 논다는 점에서 온건한 정책일 수 있지만 북미 협상을 통한 건설적인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경 정책이었다.

이에 따라 북은 사태를 관망하는 이중 전략(한편으로는 6자회담 참가, 다른 한편으로는 핵 억제력 확보)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2.10 핵보유선언이 그것이다. 2.10 핵보유선언은 미중 사이의 협력 구조, 어쨌든 협상은 진행한다는 미국의 입장에 따라 9.19 공동성명이라는 합작품을 만들어 내었고 이와 함께 6.15, 8.15 통일행사를 통해 남북관계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동상이몽 속에 만들어진 9.19 공동성명은 북.미.중 모두에 의해 부정되었다.

미국은 협상을 진행하되 경제제재를 통한 북 정권의 교체에 비중이 있었고 여전히 강온파 사이의 대립이 남아 있는 조건에서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를 시작으로 전방위적인 금융제재에 착수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9.19는 외형에 불과하고 금융제재를 통한 북 정권의 교체가 본심이었던 것이다.

중국은 미중협력에 기초하여 북핵 문제를 안정적으로 관리, 해결하는 것이 목표였을 것이다. 이에 따라 한편으로는 북과 협조 관계를 구축하고(2005년 10월 후진타오의 북 방문) 다른 한편으로는 북미 관계를 중재하려 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북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상황을 관리하는 것이 기본 목표였을 것이다.

북의 경우는 6.15, 8.15의 성과를 기초로 남북관계 개선과 9.19에 기초한 북미 협상이 주요 목표였을 것이다. 그러나 8.15 김기남 당비서가 현충원에 참배하면서 남북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자는 북의 주장은 노무현 정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남북관계를 정치군사적인 차원으로 발전시키자는 북의 주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경제협력을 통해 북을 6자회담에 복귀시키겠다는 이상한 해법을 들고 나왔다.

바로 이 점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차이인데 김대중 정부라면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되 북미공방은 북미 협상을 강조하는 기조로 문제에 접근했을 것이다. 반면 노무현 정부 특히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정작 남북관계 발전에는 관심이 없고 남북관계 진전을, 막힌 6자회담의 돌파구로 삼겠다는 기이한 주장을 들고 나온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북미 공방을 북미 대화 요구라는 형태로 미국에 부담을 전가했다면 노무현 정부는 북미 교착을 남이 나서 해결하겠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되자 북은 남북관계에 대한 기대를 접고 북미 공방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6.1 힐 6자회담 수석대표의 초청이 무산되자 북은 대미 공세에 시동을 걸었다. 7.5 미 독립기념일에 맞추어 미사일을 전격 발사한 데 이어 미사일 발사 3개월 후인 10.3 핵 실험을 예고하고 예고한 지 일주일이 채 못돼 10.9 핵 실험을 전격 단행하였다.

북의 핵실험은 잘 계산된 행동이다. 북의 입장에서는 첫째, 미국이 중동에 발이 묶인 조건에서 북의 공세에 대응할 수 없을 것이고 둘째, 부시 행정부에 여전히 강온파의 대립이 진행되는 조건에서 북의 희망에 상응하는 수준에서 미국의 입장이 정리되기 어렵다고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북의 입장에서는 미국이 대응하기 어려운 시점임을 고려하여 전격적으로 상황을 진전시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는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합리적인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남측 일부에서는 북의 행동을 두고 비합리적인 대응이라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충격적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효과적인 대응으로 볼 수 있다.

북 핵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아마도 중국이었을 것이다. 미중 협력과 북미 공방의 안정적 관리를 목표로 한 중국의 입장은 미국의 대북 압박보다 북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이 상황을 예측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몰아가는 위험한 도발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은 북중 사이에 형성되어 있었던 의미있는 입장 차이를 현실화시킨 중요한 순간이었다.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은 중국의 대북 영향력이 제한적이라는 점, 북이 중국의 상당한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목표를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를 잘 보여준 것이다. 북이 이런 판단을 내린 근거는 중국이 격노하겠지만 북미 대결이 격화되는 마지막 순간에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서거나 북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을 것이다.

10.3 핵 실험 예고 과정에서 북미는 상호 입장을 잘 통제.관리하고 있다. 남측 언론에서 과도하게 흥분하는 경향이 있지만 북미 정부 당국은 핵실험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진 것에 비하면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고 냉정하게 대처하고 있다.

북은 10.3 핵실험을 예고하면서 핵 실험의 목표와 한계를 명확히 천명하였다. 주목할만한 것은 핵 공격, 핵 위협, 핵 이전을 하지 않겠다는 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대목은 핵 이전이다. 북은 자위력으로서 핵을 갖기는 하겠지만 이를 타 지역으로 이전하지 않겠다는 한계를 명확히 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는 9.11 이후 북의 일관된 태도였다. 핵 이전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 이전까지는 시간의 여지를 두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는 의사 표시이기도 하다. 북은 현재 상황을 미국이 어찌할 수 없는 조건에서 최대한 상황을 진전시켜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북의 대미 공세는 이후에도 파상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미국은 10.3 핵 실험 예고 이후 상황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잘 보여준 것이 부시 대통령의 3분간의 짧은 연설인데 여기서 부시 행정부는 외교적으로 해결하겠지만 핵 이전을 하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확인하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중동에 발이 묶인 조건에서 북의 공세를 묵인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담담하게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한계는 핵 이전까지임을 명시한 것이다. 즉 핵 이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미국은 북의 공세를 두고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현 상황은 10.3 북미 양자가 보여준 입장의 연장선위에 있다.

북은 UN 안보리, 중국 등의 태도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이는 7.5 미사일 발사, 10.9 핵 실험 강행에서 이미 결정된 것이다. UN 안보리와 중국의 불필요한 대응은 북의 다음 행동을 자극할 뿐이다.

미국의 태도는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완만한 봉쇄이며 마지막은 북미 협상이다.

전쟁의 가능성은 없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쟁은 미국이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다. 북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고, 한.중.일.러의 견제가 있고 무엇보다 중동이 급하다. 미국이 중동에서 발을 빼는 순간 중동은 반미의 세상으로 완전히 탈바꿈할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은 10.3~9 사이에 전쟁이 불가함을 확인해 두고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가장 선호할 정책은 완만한 봉쇄인데 불행하게도 이는 북이 인정치 않고 있다. 현재 상황은 북미가 원거리에서 대치하고 있고 미국은 중동이라는 후방이 불안한 조건에서 전진할 수 없는 형세이다. 반면 북은 대치선 사이에 놓인 텅빈 공간을 미국의 후방이 안정되기 이전에 선점해야 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7.5 미사일 발사 이전이라면 모르되 7.5 미사일 발사 이후의 행보가 의미하는 바는 이 빈 공간을 남겨두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이다. 따라서 미국의 완만한 봉쇄는 북이 빈 공간을 선점할 명분을 제공할 뿐이다.

북미 양국은 정세의 이런 특징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북은 10.3 외무성 성명에서 미국의 대치선까지 진출하지 않는 것, 즉 핵 이전을 하지 않는 선까지는 텅 비어 있는 공간을 접수하겠다고 밝혔고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대치선, 즉 핵 이전을 넘지 않는 선까지는 이를 용인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현재 UN 안보리를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상황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질 상황은 전쟁과 완만한 봉쇄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에 가깝다. 이 공방이 마무리되면 북미 협상이 진행될 것이다.

3. 현 상황에서 힘의 진원지와 강도는?

현재 상황을 압도하고 있는 힘의 진원지는 미국의 대중동 정책의 총체적인 파산과 북의 강력한 대미 공세이다. 다른 변수는 주변적인 요인이다. 7.5 미사일 발사에서 10.9 핵실험 단행에 이르는 정세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태 발전이었다. 상황이 충격적인 만큼 다양한 입장과 견해가 표출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중 힘을 발산하고 있는 힘의 진원지와 강도를 정확히 분별하는 것이다.

힘의 진원지는 9.11테러와 이라크 침략을 배경으로 출현한 강경 시아 이슬람의 중심지인 이란과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북미 공방을 결속지으려는 북이다. 그리고 힘의 강도는 중간 지대와 어중간한 시간 끌기를 거부하는 전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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