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 많은 현대사를 논할 때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는 삶이 바로 비전향장기수들일 것이다.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떠안고 3,40년의 세월을 한평도 되지 않는 철창에 갇힌 채 모진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온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저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역사의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찼을 그들을 끝끝내 버텨내도록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불의에 대해 굴복할 수 없다는 항거이거나 사상과 신념, 또는 인간적 소신과 의리 등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한 명의 비전향장기수는 그 이유를 '공화국'에서 찾고 있다. 바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보리출판사)는 자전적 책의 주인공 허영철(86) 선생.

▶보리출판사에서 발간한 허영철 선생의 자서전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표지.
[사진 제공 - 보리]
그간 비전향장기수와 관련된 여러 책자들이 나왔고 특히 2000년 9월 북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들의 경우 각자의 삶을 담은 소설들이 북에서 연작으로 나오고 있지만 이번에 보리출판사에서 발간한 이 책은 새로운 형식의 시도는 물론 중점을 둔 내용에 있어서도 차별성이 돋보인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허영철 선생의 삶 중에서 만 36년의 감옥생활보다는 그가 남조선노동당에 입당한 1946년부터 남파돼 검거된 1955년까지를 중점에 두고 있다.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북녘의 전후복구 초기과정, 어쩌면 이 시기는 한반도에서의 가장 격렬한 소용돌이가 몰아쳤던 시기이자 남과 북의 태생적 정통성이 자리잡아가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보통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허영철 선생은 말단 남로당 당원으로 시작해 자신의 고향인 부안군 인민위원장을 거쳐 전쟁시기에는 빨치산 활동을 벌이다 북녘 개풍군 인민부위원장을 맡았고 통일사업을 위해 남파됐다가 검거돼 36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1991년 출소해 다시 가족과 재회했다.

그는 중견 당원으로서 해방정국과 전쟁시기, 전후복구시기를 '인민'과 더불어 사업한 구체적 경험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일반인에게는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1947년 3.22총파업 투쟁이 어느 정도의 준비 수준에서 어떻게 시작돼 어떻게 실패했는지가 손에 잡힐 듯이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조직을 적 앞에 완전히 노출시켰을 뿐 아니라 불합리한 투쟁에 군중들을 동원해 가혹한 탄압으로 몰아넣었다"는 비판적 성찰도 담겨있다.

또한 전쟁시기 남쪽 부안군 인민위원장을 맡아 토지개혁을 하면서 '현물세 판정 사업'을 하면서 "좁쌀 알까지 세었다"는 비판에 대해 "이런 정도의 농토에 이런 정도의 소출이 나온다는 정확한 통계가 필요했고, 이런 분석은 농업을 과학적으로 하기 위해서 다른 제도에서도 하는 일"이라고 해명하면서도 "실무 일꾼들의 정치적 고려가 부족하다는 것이 지적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런가 하면 북쪽 개풍군 인민부위원장 시절에 겪은 일로는 "이전에 전략적인 후퇴 과정에서 인민군은 양곡을 빌리거나 밥을 시켜 먹으면 반드시 인민들에게 차용증을 써 주었다. 국가에서는 1951년 가을에 수납한 현물세로는 우선 농민들로부터 빌려 쓴 식량을 보장해 주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며 심지어 "인수증을 보관하지 못해서 찢어지거나 닳아진 것이 많았"지만 이것까지 모두 보상해 줘 "공화국이 인민에게 신의를 지킨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는 것이다.

▶과거를 회상하며 집필중인 허영철 선생. [사진 제공 - 보리출판사]
이같은 구체적 사례 외에도 그는 당시의 최대 논란이라 할 수 있는 찬탁과 반탁, 한국전쟁 발발, 박헌영 간첩사건 등 남쪽에 제대로 진실이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에 대해 동시대를 살아온 목격자로서 자신의 견해를 뚜렷하게 내세우고 있다.

허영철 선생은 "새로운 체제하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사업을 직접 하면서 이제껏 꿈꾸었던 이상향을 장풍군에서 경험"했다며 "내 생애 가장 중요한 시기는 북에서 보내 4년입니다. 그 시기가 없었다면 아무리 신념이 있었더라도 나는 사회주의 실상이 과연 무엇인지 잘 몰랐을 거예요"라고 고백하고 있다.

일제하 전국 각지는 물론 일본과 만주지역까지를 떠돌며 막노동 공사판을 전전해야 했던 시기부터 36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에도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해온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우리 현대사의 단편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는 이 책의 제목처럼.

▶2002년 1월 통일뉴스와의 인터뷰 모습. 당시도 반주까지 곁들이며 건강을 과시했다.
[자료 사진 - 통일뉴스]
또 하나 이 책에 대한 소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책의 편집 형식이다.
얼굴을 감춘 '편집자' 김용심, 조은영 씨가 허영철 선생과 인터뷰한 '마주이야기'라든지 본문 곳곳에 허 선생의 회고담 직접 인용,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일목요연한 도표화 등 출판사의 심혈을 기울인 편집이 돋보인다.

특히 허 선생의 삶 자체가 한반도 현대사의 역사적 사건들과 얽혀있는지라 이 사건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남과 북의 각각 다른 역사적 해설을 나란히 각주로 실은 점은 참신한 시도를 넘어 글쓰기의 새로운 전범을 보여줬다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판 판결문은 물론 감옥 안에서의 서신, 면회기록, 재소자 사상동향 카드, 진술서 등 귀한 자료들을 모았고, 역사연표와 개인연표를 일일이 대조해볼 수 있도록 하나의 연표로 엮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2004년 5월 지리산 대성골입구에서 열린 '남녘 애국통일열사 추모제'에 참석한
허영철 선생(왼쪽에서 두번째). [자료 사진 - 통일뉴스]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이 혹독한 감옥생활을 3,40년씩 인내한 것에 비하면 남아프리카 넬슨 만델라의 27년 감옥생활은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 되고 말 듯이, 천성산 도룡뇽을 지키기 위해 지율 스님이 100일을 넘는 단식을 수 차례 벌임으로써 더 이상 단식을 투쟁으로 꺼내들기 어려워지듯이, 이후의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에 관련된 책을 내기가 부담스러워지는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물론 '옥에 티'를 찾아내라면야 '1999년 6월 남북정상회담'(354쪽)이라는 결정적 오타나 아무리 자서전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관계자의 발언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점 등을 꼽을 수야 있겠지만 말이다.

가끔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의 말석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백발의 구부정한 노인네를 만나거든 그가 그토록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왔던 '신념의 강자'이자 '공화국'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떠올려 보자.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