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봉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전 의장)


백낙청 지음,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년 5월

지금이야 익숙해졌지만 분단체제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70년대 말 강만길 교수가 분단시대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이래 분단체제라는 말은 90년대에 접어들어 널리 통용되기 시작했다.

분단체제라는 말이 널리 통용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80년대 중후반 전개된 사회성격 논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여기에는 6월항쟁과 80년대 말 청년학생들이 선도한 통일투쟁이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분단체제론 3부작

▶백낙청 교수의 '분단체제론 3부작'. [표지사진 - 전상봉]
90년대 이래 분단체제가 하나의 개념으로 정립되는 과정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사람은 현장 활동가나 사회과학자도 아닌 문학평론가 백낙청 교수였다.

백낙청 교수는 [창작과 비평] 1992년 겨울호에 ‘분단체제의 인식을 위하여’라는 글을 발표, 분단체제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부터 백 교수는 ‘분단시대’에 관한 글을 여러 편 발표한바 있다. 하지만 ‘분단체제론’을 전면화한 글은 이글이 아무래도 처음인 셈이다.

이렇게 시작된 백 교수의 분단체제론은 90년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권의 단행본으로 갈무리되었다.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1994)을 시작으로 [흔들리는 분단체제](1998)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2006)이 바로 그것이다.

가히 분단체제론 3부작이라 할 만한 이 세권의 책은 분단체제론에 천착하고 있지만 90년대 전반기와 후반기, 그리고 6.15시대의 정세 발전이라는 시대상황에 기반하고 있다.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이 90년대 전반기의 탈냉전과 남북합의서 채택이라는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였다면, [흔들리는 분단체제]는 90년대 중반기를 거쳐 IMF사태에 직면하여 제출된 분단체제론이다.

이에 비해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은 6.15공동선언 이후 전개되고 있는 통일정세의 발전과 비약에 기초하여 제출되고 있는 분단체제론이다. 저자는 6.15시대의 분단체제에 대해 “나는 6.15시대를 ‘분단체제의 해체기’로 규정하기도 했지만, 굳이 ‘분단체제’라는 복잡한 개념을 동원하지 않고 말한다면 ‘남북의 점진적 통합과정과 연계된 총체적 개혁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는 인식에서 ‘분단체제’를 달고 있는 전작과 달리 ‘통일’이라는 단어를 책의 표제로 사용한다.

흔들리는 분단체제에서 어물어물 통일론으로

▶[표지사진 - 전상봉]
[현재진행형] 뿐만 아니라 전작에서도 백 교수는 ‘이것이 분단체제론이다’라고 명료하게 설명하는 대목을 찾기란 쉽지 않다. 백낙청 교수는 [현재진행형]에서 분단체제론에 대해 “‘체제’의 의미를 엄밀히 규정하자면 논란이 많겠지만 분단된 남북한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이 분단체제론이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45쪽)고 밝힌다.

이 같은 당부를 전제로 백 교수는 분단체제론에 대해 “현실적으로 이는 분단현실을 남북의 국가간이나 상반된 이념간의 대립 위주로 인식하기보다 한반도 전역에 걸쳐 작동하는 어떤 복합적인 체제와 그에 따른 다수 민중의 부담”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남북의 기득권세력 사이에 일정한 공생관계가 성립하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인다.

“동시에 분단체제론은 한반도의 분단구조가 ‘체제’라고 불릴 만큼의 일정한 자생력과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분단극복(=통일)도 분단체제의 성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지금보다 나은 체제 내지 사회를 한반도에 건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야 하며, 전쟁이나 여타의 일대 파국으로 끝나는 통일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백 교수가 주장하는 분단체제론이란 우리사회에 나타나는 제반 문제는 민족분단과 무관하지 않고 분단체제가 이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으므로, 우리사회의 제반 문제의 해결은 분단극복, 즉 통일을 통해 해결해가야 한다는 논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일부 논자들은 백 교수의 분단체제론에 대해 분단순환론, 또는 과잉분단론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백 교수의 답변은 “한반도의 분단이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듯이 분단체제는 그 자체로서 완결된 체제가 아니며 현존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구체적인 양상”이라는 이유를 들어 이를 부인한다.

또한 백 교수는 분단체제의 형성과 고착, 그리고 동요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짓는다. 1945년에서 1953년까지를 “분단체제의 준비기 내지 형성기”로, 그리고 “대략 1953년부터 1987년까지로 설정되는 분단체제의 고착기”를 거쳐 “1987년을 기점으로 분단체제는 고착단계에서 동요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한다.

87년 6월항쟁 이후 분단체제가 동요단계로 진입하게 된 원인에 대해 노태우 정권의 북방외교와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으로 “남북간 자주적 교섭력이 강화되는 기미”를 주된 이유로 꼽는다. 그리고 “1996-97년 남북에 각기 다른 형태로 닥쳐온 경제위기를 통해 분단체제가 동요기에 이미 접어들어 있음이 실감”하면서 [흔들리는 분단체제]를 내놓았다고 밝힌다.

이번에 발간된 [현재진행형]에서 백 교수는 ‘흔들리는 분단체제’가 ‘어물어물 통일론’으로 발전하였다고 진단하면서 그 핵심적인 이유에 대해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은 이런 흔들림을 세계만방과 전국에 알리는 계기였으며, 동시에 흔들리는 분단체제가 약간의 조정과 개선을 거쳐 안정을 되찾을 것인지 아니면 분단체제 자체의 종식으로 이어질 것인지의 선택을 우리에게 역사적 과제로 안겨주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변혁적 중도주의

어물어물 통일론과 함께 [현재진행형]에서 백 교수는 변혁적 중도주의를 주창한다. 변혁적 중도주의에 대한 이해를 위해 몇 부분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중간노선을 중도주의로 포장하는 일이 흔한 것도 사실이므로, ‘변혁적’이라는 꾸밈말이 매우 중요하다. 특정 상황에서의 변혁과제가 당시의 현실에서 흔히 ‘급진적’ ‘혁명적’이라 일컬어지는 노선보다 오히려 중간에 가까운 - 그렇다고 물론 전체 스펙트럼에서 정중앙에 위치할 필요는 없는 - 노선을 요구할 때 ‘변혁적 중도주의’가 시대의 요구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58-59쪽)

“변혁적 중도주의의 내용으로는 … 80년대 급진운동권에서 쓰던 표현을 빌려 NL(민족해방), PD(민중민주주의), BD(부르주아민주주의)의 3자 결합을 제시한바 있다.”(59쪽)

“‘변혁적 중도주의’라 부름직한 이러한 결합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에 필요한 참된 진보노선이다. 한반도 주민들에게 닥친 최대의 변혁과제가 분단체제의 극복이기 때문인데, 이 변혁이 전쟁이나 다른 어떤 급격한 방식을 통해서는 안 되며 광범위한 대중이 참여하는 점진적 과정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중도주의’ 노선이 불가피해지는 한편, 기존의 잣대에 따른 ‘좌’와 ‘우’ 사이의 중간지점을 찾는 타산이 아니라 분단체제극복을 겨냥한 합작이라는 점에서 ‘변혁적’인 중도주의인 것이다.”(31쪽)

위의 인용문에 기초해 볼 때, 변혁적 중도주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변혁적’이란 “‘급진적’ ‘혁명적’이라 일컬어지는 노선보다 오히려 중간에 가까운” 의미를 내포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중도주의란 “NL(민족해방), PD(민중민주주의), BD(부르주아민주주의)의 3자 결합”을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의미와 동력에 기초한 변혁적 중도주의는 “그날그날의 현장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싸움을 폭넓은 연대를 바탕으로 지속하면서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긴 안목의 대안을 제공해 주는 노선”(69쪽)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백 교수로 대표되는 창비사단(80년대 이래 민족문학 진영에서는 백 교수로 대표되는 창비를 ‘문단권력’이라 부른다)의 최원식 세교연구소 이사장은 변혁적 중도주의는 “분단체제의 평화적 극복을 통한 ‘중간국가’의 건설”을 지향한다고 밝힌다. 여기서 중간국가란 “팽창을 위한 대국주의도 아니고 하향 평준화된 폐쇄적 소국주의도 아닌, 삶의 질이 높게 보장된 품격 있는 사회”라고 부연한다.(한겨레, 2006년 5월 16일자 8면)

민족자주와 민중성 없는 통일론은 공허하다

[현재진행형]이 발간되자 여러 매체들은 앞 다투어 이 책을 소개하기에 바빴다. 이 책을 소개하면서 대부분의 매체들은 백 교수가 시도한 최장집 교수에 대한 비판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서평이라는 이글의 성격상 백낙청-최장집 논쟁을 소상하게 소개하기란 버거운 일이긴 하나 백 교수가 [현재진행형]의 덧글 ‘변혁적 중도주의와 한국 민주주의’를 통해 최장집 교수를 비판한 논지의 핵심은 반국(半國)적 관점에 대한 것이 그 기저를 이룬다.

이 같은 견지에서 백 교수는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는 최장집 교수의 도발적 진술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백 교수는 최 교수가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진단하는 것에 대해 “분단체제 전체에 돌려야 할 책임을 현 정권에만 묻는 것은 부당하다”고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백 교수는 최장집 교수가 “정당과 정당체제가 아닌 다른 운동이나 활동에 호소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힘’이 아닌 것으로 규정하는 비약을 감행”하고 있다는 비판 또한 곁들인다.

백 교수가 “약간의 논란을 일으켜 보려”는 의도 하에 감행한 최장집 교수에 대한 비판은 남북을 아우르는 전국적 관점의 제시라는 점에서 매우 신선하다.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공복감은 남는다. 그 공복감의 요지는 우리사회의 주요 현안이 된지 오래인 양극화 문제, 신자유주의에 관한 대응 문제 등 제반문제들에 대해 백 교수가 너무 안이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백 교수의 안이함은 분단체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연관되기 마련인 민족자주의 문제나 민중 생존권 실현의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이 같은 안이함의 결과는 오래된 등식이기도 한, 민주주의의 과제와 통일의 과제는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지만 상대적 독자성을 지닌다는 명제를 간과한 것에서 비롯된다.

우리민족에게 통일은 선차적인 변혁과제임에 분명하지만, “1단계 통일”에 들어선다 해서 남쪽 민중들의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백 교수는 놓치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신자유주의 공세에 쉽게 굴복하고, 보수세력과 결탁하고 만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 대한 최장집 교수의 진단은 적지 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때문에 [현재진행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반도식 통일의 현재진행형’이라는 제기는 전국적 관점의 환기라는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민족자주와 민중 민주주의를 어떻게 심화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공허하다.

뿐만 아니라 6.15시대 대중참여형 통일운동으로서 “어깨에 힘 빼고” 통일하자는 백 교수의 주장에 대해 백번 공감하지만, 이 준엄한 정세 속에 “두루뭉실한 상태로 어물어물” 통일하자는 주장과 마주하면 낭만을 넘어 어떤 순진함까지 느끼게 된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