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여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한반도의 분단은 가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한반도의 남과 북에는 두 개의 분단정부가 각기 들어섭니다. 분단이 현실화되는 1년 동안의 한반도 정치상황은 매우 긴박하기만 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분단과 통일 사이의 치열한 대결로 압축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매우 복잡합니다. 미국과 소련, 좌익과 우익, 그리고 남한 내부의 단정세력과 단정반대 세력 사이에 얽히고 설킨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다룰 내용은 한반도가 분단을 향해 치닫는 47년 여름부터 다음해 여름까지 1년 동안, 그 복잡한 정치흐름 속에서 남과 북에서 통일정부를 지향한 세력들이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것은 주로 남한 내의 중간파와 민족주의자들의 동향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며, 그에 부수적으로 북한의 입장도 살펴볼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결국 그들의 통일정부를 향한 노력의 총결산으로서 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를 살펴보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남한 내에서 통일정부를 향한 노력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 하나는 중간파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익 민족주의 세력에 의한 것입니다.

전자는 여운형의 죽음과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단독정부 노선이 힘을 얻게 되자 위기를 느낀 중도세력이 1947년 후반기부터 결집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됩니다. 그 중심에는 김규식과 홍명희가 있습니다.

반면 후자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서 서로 밀착했던 이승만과 김구가 정부수립에 대한 지도노선  차이 및 장덕수 암살사건 수사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충돌로 우익 민족주의 내부의 균열이 생기면서 시작됩니다. 그 중심에는 김구와 김규식이 있습니다.

1947년 후반기 내내 미국과 소련은 유엔에서 한국의 장래를 둘러싸고 공방전을 벌입니다. 그것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뒤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넘겼기 때문입니다. 유엔에서의 공방전은 미국이 내놓은 `자유총선거안`이 채택됨으로써 미국의 승리로 귀결됩니다. 그것이 1947년 11월 13일입니다.

그러나 유엔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결의가 이뤄진 그 시점에서 한국내의 정치갈등은 더욱 증폭되어 나타납니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 내의 우익 내부에서 균열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1948년 1월 7일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설치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UNTCOK: 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이하 유엔 한위)이 서울에 도착합니다. 원래 유엔 한위는 호주, 캐나다, 중국(대만 국민당),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우크라이나의 9개국으로 구성되었으나, 우크라이나는 참여를 거부해 8개국만 입국하였습니다.

유엔 한위의 목적은 한국의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청취한 뒤 최종적으로 유엔에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유엔 한위가 접촉대상으로 삼았던 정치지도자들은 우익측의 이승만·김구·김규식·조만식·김성수 등과 좌익측의 김일성·김두봉·박헌영·허헌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북쪽은 소련의 반대로 발조차 들여놓지 못하였고, 남한에서도 남로당측과는 접촉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유엔 한위는 남한에서 우파 정치가들만 만난 뒤 그 결과를 유엔 소총회에 보고하였습니다. 결국 이를 바탕으로 유엔 소총회는 1948년 2월 26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그 임무를 수행하도록 한다"고 결의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남한 단독 총선거를 결정하게 되고, 3월 1일 미군정사령관 하지는 총선거를 5월 10일 실시한다고 발표하게 됩니다.

이처럼 남한에서 단선을 향해 치달아 가고 있을 즈음, 북한에서도 또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준비가 한창 진행됩니다. 1948년 2월 8일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을 창건하고, 10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발표합니다. 남과 북에서 동시에 분단정부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자 이승만과 결별한 김구는 김규식과 손잡고 마지막으로 통일정부를 향한 남북정치지도자 협상에 기대를 걸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낸 `2월 서한`입니다. 김구·김규식의 제안에 대해 김일성·김두봉은 `3월 서신`으로 답변을 보냅니다. 그렇게 해서 단선을 코앞에 둔 4월 19일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연석회의`가 시작됩니다.

남북연석회의는 그 성공과 실패 여부에 상관없이 남과 북의 정치세력이 사상과 이념을 넘어 한 자리에 모여 통일정부 논의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제 47년 여름부터 남북연석회의가 열리기까지 통일정부를 지향한 세력들이 어떻게 움직였으며, 남북연석회의에서는 무엇이 논의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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