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돌아와 지난 신문을 훑어보는 가운데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방북 계획을 맹비난했다는 가시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친북좌파가 득세한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하에서 한국의 정체성과 이념이 매우 훼손되었으며 햇볕정책은 북한체제를 녹이기는커녕 핵무장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시대착오적인 망언이었지만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는 흘러간 물소리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년 대선에 처음 참가하는 새 세대의 정치의식에 관한 한국일보(2월 22일) 여론조사내용은 매우 함축적이었다. 이 조사는 전국적으로 19세서부터 25세의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었다.
이 젊은이들의 절반 이상(50.1%)은 스스로의 이념성향을 “진보적”이라고 응답했으며 “보수적”이란 응답은 21.1%에 불과했다. 이들의 54.1%는 평화통일을 지지했으며, 가장 가깝게 지내야 할 나라로는 18.4%가 미국을 꼽은데 비해 39.5%는 중국을 택했다. 미국이 한국의 동의 없이 북핵시설을 폭격하는 경우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해야한다는 응답은 11.6%였으나 북한 편에 서서 북폭중지를 요구해야 한다는 응답은 47.7%였다. 대만문제로 주한미군이 출동할 경우 한국도 협력해야한다는 응답은 21.9%였으나 반대해야한다는 응답과 중립을 선언해야 한다는 응답은 합해서 73%였다.
그런데 과반수가 진보를 자처한다는 이들 중 차기대통령 감으로 (7명의 경합자 중에서)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를 꼽은 수가 20.1%로 가장 많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박정희가 비명횡사한 후에 태어난 젊은이들이라 그 무시무시했던 유신독재 암흑시절의 공포와 비통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박근혜 대표의 뿌리와 배경과 본성은 꿰뚫어보지 못하고 그의 차분한 몸짓과 수사에 매료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 박근혜 대표의 주장은 단순하다. 노무현정부는 친북좌경으로 한미동맹을 그르치고 안보를 망쳤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를 파괴했으며 행정의 무능과 미숙으로 국가경제를 파탄내어 민생고는 극에 달하고 나라가 위태롭게 됐으니 내년에는 꼭 정권교체를 이루고 한나라당이 집권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라가 위태롭게 됐다”고 겁주면서 정권을 맡기라는 주장은 1961년 그의 아비가 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자신의 반역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걸은 이론과 흡사하다. 그때 박정희의 궤변에 현혹된 사람들이 많았던 것처럼, 지금은 노무현 정권의 인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특이 박정희시대의 매운 맛을 못 본 젊은이들에게, 박대표의 변설이 의외로 쉽게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는 좋은 제도이지만 그 선거와 정치 사이에는 고약한 불합리현상이 생길 수 있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는 컴퓨터를 다를 줄 아는 새파란 젊은이들의 몰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 젊은이들은 노무현 정부의 실제 정책수립이나 행정업무에 참여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다. 결국 노대통령은 자기를 밀어준 세력의 도움은 현실적으로 받지 못한 채 자기를 끌어내리려는 기득권세력의 끈질긴 반대를 의식하면서 정치하다보니 보수, 진보 양쪽에게 모두 실망을 주게 되었다.
내년 대선에서도 결국 심한 여야 각축으로 불과 수십만 표 차로 차기 대통령이 선출될 것이다. 그런즉 420만 명에 달하는 새 대선세대의 의미는 매우 크다. 그들은 비록 다음 정권의 구체적 정책수립에는 참여할 수 없지만 누구를 다음 대통령으로 뽑느냐를 결정할 수 있는 세대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젊은이들이 노무현정부에 실망한 나머지 내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감언이설에 속아 엉뚱한 인물을 당선시킨다면 모처럼 일구어놓은 남북 화해의 기틀은 무너지고 그동안 남북협력업무를 다루던 인사들은 국보법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평화통일의 전망은 또 기약 없는 미래로 물러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흘러간 물로 다시 물레방아를 거꾸로 돌리는 변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