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공관장회의에 참석중인 이태식 주미대사의 이른바 '북한의 위폐제조' 관련 발언이 논란을 빚고 있다.

 

이태식 대사는 지난 15일 외교통상부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미국에서는 위폐가 북한산이라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며 "그 부분에 관해서 한미간에 정보를 교류하고 계속 협의하고 있기 때문에 내 판단은 유보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 그러한 불법행위를 그만두라는 것이다. 그만둔다고 할 때 언제 어떻게 그만두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되는데,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 설사 중단했다고 할지라도 위폐가 순환되고 있다면, 순환된 위폐가 나중에 입수되면 그것을 증거로 아직 중단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미국측의 입장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이 대사의 발언은 미국측 입장을 보다 자세히 '전달'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자칫 한국 정부가 미국의 판단을 수용한 전제위에 선 듯한 뉘앙스를 풍길 수도 있어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고 결국 이 대사는 서둘러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외교통상부는 이 대사의 발언이 파장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곧바로 담당자가 나서 "심각한 우려를 갖고 있으며, 북한이 불법활동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공식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같은 정부의 공식입장도 초기의 "아직 북한이 위폐를 제조했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다"던 입장과는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태식 대사는 이날 밤 KBS뉴스라인과의 인터뷰에서 한발 더 나가 "미국의 슈퍼노트를 위조하기 위해서 별도의 시설이 있는 것이 아니고 북한 돈을 발행하는 곳에서 미국의 슈퍼노트를 위조한 것으로 미국은 파악하고 있다"며 "증거가 부족하다거나 신빙성이 없다고 볼 사안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2003년 미 재무부 보고서에서도 위폐 제조국으로 북한이 적시되지 않은 데 대해 "2004년 그리고 2005년에 다시 북한 위폐에 관한 여러가지 정황과 증거가 다시 추가로 파악됐다"며 "사실은 2001년 9.11 이후 미국이 대랑살상무기에 관한 알 카에다 자금추적을 하다가 북한의 위폐 흔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중추적한 결과 발견한 증거이다"고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추가했다.

이같은 이태식 주미대사의 일련의 발언은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같은 날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과 궤를 같이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구체적이다.

그러나 이 대사 역시 북한이 위조 달러를 제작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않은 채 2004, 2005년 새로운 '정황과 증거'가 추가로 파악됐다는 전제하에 '북한 조폐창 위폐 제조설'만을 제기했다.

'북한 조폐창 위폐 제조설'은 이미 일부 탈북자의 증언에서 제기된 바 있고 신뢰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안이다.

더구나 이 대사의 주장은 북한의 위폐제조설을 제기한 미국측에게 증거를 내놓라는 것이 아니라 북측의 위폐제조를 기정사실화하고 이의 중단을 북측에 촉구하고 중단한 증거까지 내놓으라는 것이다.

한 국가가 다른 한 국가를 위폐제조국으로 지목했다면 이를 입증할 책임은 문제를 제기한 국가가 져야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일종의 명예훼손이자 의도적인 도발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강대국 미국이 북한 위폐제조설을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들이대고 있는 상황에서 주미대사가 앞장서서 미국의 입장만을 내세운다면 "과연 주미대사는 미국의 대변인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미국이 이라크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설'이 결국은 허구로 드러난 사실을 똑똑히 보았고, 91년 걸프전 이후 미국의 이라크 경제봉쇄가 얼마나 이라크 민중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태식 대사의 일련의 미국입장을 대변한 듯한 발언들은 "제가 파악하기로는 미국이 북한에 대해 추가 금융제재를 할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리근 국장이 (미국에)온다면 미.북접촉이 이루어질 수 있고 문제해결의 틀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긍정적 메시지마저도 효력을 떨어뜨릴 수 있는 소지로 작용할 수 있다. 

북측은 미국의 금융제재나 위폐제조설에 대해 6자회담과 연계된 정치공세로 보고 있으며, 이의 해결을 위해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정치적 협상'에 나서야 하는 사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북미중 3자 수석대표 협의가 열린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가능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불법행위'는 6자회담과 무관한 사안이며 리근 외무성 미국국장이 '실무적 브리핑'을 받아야할 사안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태식 대사의 "미국과 북한 관계자들이 직접 만나서 서로 입장에 대해 '협의'를 진지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북미 양측에 주문한 '유연성'이 북측에게 공정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

미국 정부와 가장 긴밀한 접촉을 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주미대사는 그만큼 미국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을 터이지만 그가 한국 정부의 이익을 위해 임무를 부여받은 특명전권대사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주미대사의 발언의 설득력은 미국측 입장을 잘 '전달'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미국측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데 근거해 한국측 입장을 잘 내세우는 데 있는 것이다.

주미대사가 미국의 대변인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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