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pbpm@wonkwang.ac.kr,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매주 월요일 이재봉 교수의 방북기를 연재한다. 이재봉 교수는 지난 10월 중순 ‘아리랑’ 공연을 비롯해 이제까지 북녘을 세 번 방문했다.
이 교수는 방북기를 쓰는 목적에 대해 “소박하게나마 통일 운동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으로서 북녘의 실상을 나름대로 잘 알려보자는 데 있다”면서 “북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모습 또는 그들과의 대화를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의지를 밝혔다.
한반도 및 세계 평화문제와 특히 남북 통일문제에 실천적으로 접근하려는 이재봉 교수는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 대표를 맡고 있다. - 편집자 주


9. 마지못해 나서는 평양 시내 관광

몸이 아픈데다 맘도 별로 편하질 않으니 식욕마저 잃어 점심을 먹는 듯 마는 듯하고 방에 들자마자 샤워를 했다. 오후 일정은 평양 시내 관광인데, 만경대고향집과 주체사상탑 그리고 개선문과 동명왕릉 등 모두 이미 한 두 번씩 둘러본 곳이라서, 침대에 누워 푹 자고 싶다.

그러나 나의 개인 행동이 여러모로 적절하지 않을 것 같아 방을 나섰다. 주차장에 모이는데 약속 시간보다 20분이 더 걸린다. 버스 안에서 몇 사람이 투덜거린다. 2년 전에 300명이 왔는데 모일 때마다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적어도 30분 많게는 1시간씩 늦었다면서, 125명이 모이는데 20분 더 걸린 것은 좋은 편 아니냐고 말하자 불만이 사그라진다.

첫 번째 목적지는 김일성 주석이 태어난 만경대고향집. 평양역을 지나는데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잠시 후 고려호텔 앞을 지나간다. 7년 전 처음 방북해서 일주일이나 묵었던 곳이라 양각도호텔보다 훨씬 푸근함을 느끼게 되는 곳이다. 호텔 맞은편은 식당촌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음식점들이 죽 늘어서 있고, 군데군데 군밤 매대와 군고구마 매대도 보인다.

보통문을 지나칠 때 안내원이 “고구려 시대 보통문”이라고 소개하며 ‘조국해방전쟁’ 중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았다고 일러준다. 6.25 전쟁 때 미군의 폭격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평양에 반듯한 집 한 채 남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마 이게 그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건물인 모양이다. 7년 전 2층 문루에까지 올라 거닐던 기억이 떠오른다. 평양 8경의 하나인 보통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을 때 서쪽문(西門)으로 처음 세웠다고 하는데, 북녘의 안내책자에 따르면, “조국해방전쟁 때인 1952년 8월 미제의 야수적 폭격으로 보통문이 불길에 휩싸이게 되였을 때 평양시민들은 희생적으로 불을 끄고 이것을 살려냈다”고 한다.

류경정주영체육관이 보이자 안내원이 이를 소개하며 “남쪽에서 정주영 선생 잘 아시지요?” 하고 묻는다. 버스 안에서 누군가 왜 ‘정주영체육관’이라 부르지 않고 앞에 ‘류경’을 붙였느냐고 묻자 그 의미를 알려준다. ‘류경(柳京)’은 평양의 옛이름으로 버드나무가 많은 수도라는 뜻이다. 양각도호텔에 묵으면 아침 일찍 수양버들이 늘어진 대동강변을 산책하는 재미가 쏠쏠한데, 천안삼거리의 능수버들보다 대동강변의 수양버들이 더 정취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바로 옆의 류경호텔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세모꼴 모양으로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간 105층 300m짜리 건물이 거의 20년이 지나도록 완공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가슴이 아플 것이다. 원래 이 건물은 프랑스와의 합작에 의해 1986년 착공되었다가 북녘의 경제난으로 1990년대 초 중단되었다. 2차 방북기에 소개했듯, 2003년 말 중국에 사는 동포 기업가와 합작으로 공사가 재개되어 2005년 말까지 완공될 예정이라고 보도된 적이 있는데 계획대로 잘 진전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안내원에게 묻고 싶은데 그럴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몸이 좀 불편하다고 만사가 귀찮아진 걸까, 북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걸까, 아니면 북녘에 관해 좀 안다고 건방져진 걸까. 2년 전 방북했을 때는 남쪽 사람들 30-40명이 타는 버스에 북녘 안내원 1-2명이 배치되기에, 안내원을 내 옆자리에 앉게 하든지 내가 안내원 옆자리로 가든지 해서 그가 귀찮아할 만큼 많은 얘기를 나누곤 했다.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접하기 어려운 북녘 사회의 이모저모에 관해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이다.

지난 9월 말 중국에서 북녘 학자들 30여명과 4-5일 동안 학술 토론을 하고 고구려 유적을 답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지금의 안내원은 내가 통일 운동에 몸담고 있는 것을 알고 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일부러 내 옆자리 통로에 간이 의자를 펴놓고 앉으면서까지 나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지 않은가. 그의 얘기를 소극적으로 들어줄 뿐 내가 먼저 대화를 재미있게 이끌고 싶은 맘이 생기지 않는다.

이렇듯 무심하게 창 밖을 내다보고 가는데 중학생으로 보이는 10대 2명이 훌라후프를 허리에 걸치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아까 팔짱낀 부부 모습을 본 데 이어 훌라후프를 걸친 학생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게 된다. 북녘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북한 사회와 문화'라는 교양 과목 수업 시간에 남쪽 국정원에서 편집한 북녘의 비디오를 많이 보여주고 있는데, 평양 사람들이 휴일에 만경대유희장이나 대성산유희장에서 전동 열차를 타는 모습이 나오면 학생들은 예외 없이 “와아!” 하고 소리를 지른다. 이유를 물어보니 북녘에도 저런 현대식 놀이 시설이 있다는 점과 북녘 사람들도 저렇게 자유로운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다는 게 놀랍다는 것이다. 북녘이 아무리 꽉 닫힌 사회라고 그런 놀이 시설도 없고 그걸 즐길 수 있는 시간조차 내지 못할까. 북녘에 대한 편견과 왜곡이 남쪽 사회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음날에도 훌라후프를 갖고 길거리를 거니는 학생들을 보고 나서야, 그들이 대집단 체조와 예술 공연 '아리랑'에 출연하는 학생들인 줄 짐작하게 되었다. 2004년 영국의 다니엘 고든 감독이 만든 '아리랑'에 관한 기록 영화 '어떤 나라 (A State of Mind)'에 나오듯, 저 학생들은 상당한 경쟁을 뚫고 뽑힌 기계 체조 선수들일 것이다.

10. 사회주의는 구호다 : 구호를 통한 사상 교육

류경호텔을 조금 지나자 아주 낯선 내용의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 다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공동구호 관철에로!” 처음 방북했던 1998년에나 두 번째 방북했던 2003에나, 평양시내에서나 다른 지방에서나, 거리에든 건물에든, 간판이나 현수막에 적힌 구호의 내용은 주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 그리고 ‘고난의 행군’이나 선군 정치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혁명 사상 만세!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한마음 한뜻으로 받들어나가자. 천만군민이 하나의 동지가 되여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걸음걸음 따르자!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전당, 전군, 전민이 일심 단결하여 선군의 위력을 더 높이 떨치자! ....”

그런데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의 공동 구호라는 말은 생소한 것이다. 아마 조선로동당 창건 60주년을 맞아 어떤 결의를 다진 것일 텐데 그 내용이 궁금하다. 안내원에게 물으니 내 짐작대로 당창건 60돌을 앞두고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가 공동으로 구호를 내걸었단다. 지난 7월이었다는데 그 내용은 한 두 가지가 아니란다.

그래서 꾹 참고 있다가 집에 돌아온 뒤 인터넷을 뒤져 자료를 찾아보았다. 7월 초부터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이 공동 구호에 관한 보도를 시작하고 있다. 조선로동당 창건일인 10월 10일을 100일 앞둔 7월 2일 “100일 전투”를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7월 2일자 ?로동신문?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군인들, 인민들이 비상한 각오와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우리 조국 건설 력사에 일찌기 없었던 대혁신을 일으켜 선군 시대의 장엄한 총진군에서 영예로운 승리자가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당창건 60돐에 즈음하여 공동 구호를 발표한다”면서 무려 150개가 넘는 구호를 소개하고 있다.

가장 먼저 김일성 주석과 관련된 구호가 5-6개 나오고, 김정일 위원장과 관련된 구호가 뒤를 잇는다. 그리고 선군사상, 주체사상, 선군정치, 인덕정치, 광폭정치, 강성대국, 조선로동당, 우리식 사회주의, 조선민족 제일주의 등에 관한 구호가 끝없이 이어진다. 인민군 장병들, 농업 근로자들과 노동 계급, 과학자들과 기술자들, 예술인들, 당원들, 그리고 청년들에게 각각 호소하는 내용도 있다.

예를 들어, 농업 근로자들에게는 올해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주공 전선이 농업 전선이라며, “농사에 모든 력량을 총집중, 총동원하여 올해 알곡 생산 목표를 기어이 점령하자!”고 호소하고 있고, 로동 계급에게는 전력, 석탄, 금속 공업과 철도 운수 부문이 경제 건설의 중요 전선이라며, “수력 발전소들과 화력 발전소들에 만부하를 걸어 전력 생산을 결정적으로 늘이라!”고 다그치고 있다. 그리고 과학자와 기술자들에게는 과학과 기술이 경제적 진보의 기초라며, “과학을 중시하고 현대적 과학 기술에 기초한 자력 갱생의 위력으로 경제 건설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자!”고 독려하고 있다. 북녘 사회의 모든 분야에 관하여 그리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당창건 60주년 기념일인 10월 10일 '로동신문'은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당창건 60돐에 즈음하여 발표된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공동 구호는 우리 당과 인민의 투쟁 방향과 목표를 전면적으로 제시한 전투적 강령이며 21세기 부강 조국 건설의 휘황한 설계도이다.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 인민들은 공동 구호의 사상과 정신을 틀어쥐고 선군 혁명 총진군에 새로운 박차를 가함으로써 주체 조선의 백승의 기상을 더욱 힘있게 과시해나가야 한다.”

그래, 사회주의는 구호라고 했다. 7년 전 평양을 처음 방문하여 여기저기 거의 모든 건물마다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나 간판이 두어 개씩 걸려있는 것을 보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아무리 구호가 중요하다 해도 저렇게 많은 현수막이나 간판을 내건 것은 시간과 물자의 낭비가 아니냐고 안내원에게 조심스레 비판한 적이 있는데, 사회주의에서는 사상 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던 게 생각난다.

11. ‘엽전 17냥으로 마련한 산당집’과 ‘혁명의 요람 만경대고향집’

류경호텔을 지나 한 5분쯤 달리니 길이 시원하게 뚫려있고 도로 양쪽엔 남쪽 식으로 말하면 고층 아파트인 현대식 살림집들이 죽 늘어서 있다. 길 이름은 광복거리, 동네 이름은 만경대구역.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도로 폭이 100m라고 한다.

오가는 차량이 많지 않은데 이렇게 넓은 길이 왜 필요할까 의문이 들 정도로 넓은 길이다. 교예극장을 지나고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지나 만경대고향집에 이르렀다. 만경대고향집이란 김일성 주석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집으로, 남쪽 사람들이든 외국인들이든 평양을 방문하면 꼭 들르게 되는 곳이다. 집 입구에 세워져있는 안내판엔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우리 인민의 수천년 력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높이 모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1912년 4월 15일 이 집에서 탄생하시여 어린 시절을 보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찌기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고향집을 떠나 혁명의 장도에 오르시였으며 조국 광복의 새봄을 안고 개선하시여 이 력사의 집에서 조부모님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시였다....”

앞의 안내문에서 김 주석이 해방 이후 고향집에 들러 부모가 아닌 조부모와 만났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의 부모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김형직은 김일성이 중학교 1학년 때인 1926년 만주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 눈을 감았고, 어머니 강반석은 그가 한창 항일 유격 투쟁을 벌이던 1932년 만주에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 만경대고향집에 전시되어 있는 살림 도구들은 김 주석이나 그의 부모들이 쓰던 게 아니라 조부모들이 쓰던 것들이다. 이에 관해 김 주석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사상이나 정신면에서는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것이 많지만 재물이나 금전상으로 상속받은 것은 하나도 없다. 지금 우리 고향집에 전시해놓은 농쟁기나 가정 도구들도 모두 할아버지가 남긴 것이지 아버지가 물려준 것은 아니다.”

한편, 이 집은 김 주석의 증조할아버지가 마련했다고 한다. 김일성 일가는 전주 김씨로 선조들이 전주에서 살았는데, 12대 조상인 김계상이 함경도로 이사했다가, 증조부인 김응우가 만경대로 이사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 가문은 김계상 할아버지 대에 살길을 찾아 전라북도 전주에서 북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만경대에 뿌리를 내린 것은 증조할아버지 (김응우) 대부터였다. 증조할아버지는 원래 평양 중성리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농사를 지었는데 생활이 너무도 구차하여 평양에 사는 지주 리평택의 묘지를 보아주기로 하고 산당집을 한 채 얻어가지고 1860년대에 만경대로 이사해 왔다.”

김 주석의 조상에 관한 얘기는 남쪽에서 출판된 '터'와 '김씨의 뿌리' 같은 책자들에도 잘 나와 있다. '터'를 쓴 육관도사 손석우에 따르면, 전주 김씨 시조인 고려 시대 문장공 김태서의 묘소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잘 갖추어진 천하 대명당으로, 후손 가운데 49년 동안 절대 권력을 누릴 사람이 배출될 땅 기운 (地氣)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 후손이 32대손 김일성이었으니 1945년부터 1994년까지 정확하게 49년을 통치했던 것이다.

이 책이 1993년 출판되었는데, 김 주석이 죽은 뒤 이를 예언했다고 해서 손석우는 ‘도사’로 더욱 유명해지고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는 얘기가 나돌던 적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스갯소리도 몇 가지 전해오고 있으니 그 가운데 하나는 앞으로 혹시 남북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도 전주는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김 주석의 시조가 묻혀있는 전주에 북녘의 미사일이나 포탄이 떨어지겠느냐는 뜻이다.

아무튼 김 주석의 증조부 김응우는 소작농으로 일하다가 더 잘 살아보기 위한 수단으로 만경대로 옮겨 당시 가장 천한 직업 가운데 하나였던 산당지기가 되었다. 남의 묘를 지켜주기 위해 만경대로 이사했다는 뜻이다. 그는 1878년 서른 살의 나이로 죽었는데, 얼마 뒤 지주 아들이 나타나 산당집을 팔아 치우겠다며 당장 집을 비우라고 했단다. 이에 증조할머니가 삯바느질로 모은 돈과 머리털을 잘라 받은 돈으로 17냥을 겨우 마련해 그 오두막집을 샀다고 한다. 그 집에서 손자 김형직과 증손자 김일성이 태어났으니 ‘엽전 17냥으로 마련한 산당집’이 뒷날 ‘혁명의 요람 만경대고향집’으로 된 것이다.

이런 사연이 깃든 고향집을 한바퀴 돌아보고 만경대 정자에 올랐다. 2년 전에 왔을 때는 300명이 한꺼번에 돌아다니느라 사진 찍다 시간을 다 보내버렸고, 7년 전 처음 왔을 때는 일행이 둘이어서 뒷산에 있는 김 주석의 조부모 묘소와 부모 묘소까지 찾으면서도 정자에는 들르지 못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들르게 된 것이다. 여기가 진짜 만경대 아닌가. 만경대 (萬景臺)란 원래 만 가지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을 지녔으니 여기 높은 언덕위로 정자가 서있는 곳이 만경대란 말이다. 발 아래로 대동강이 흐르는데 강 가운데는 곤유섬, 두루섬, 쑥섬, 양각도 등이 펼쳐져 있고, 강 이쪽으로는 고려호텔과 류경호텔 등이 보이며, 강 저쪽으로는 주체사상탑 등이 눈에 들어온다.

해설 강사가 만경대 바로 아래의 곤유섬을 가리키며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관해 설명한다. 1866년 “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무장 해적선 샤만호”를 타고 대동강으로 침입하여 온갖 행패를 부리자 “수령님의 증조부이신 김응우 선생”의 지휘로 평양 인민들이 “화공 전술”을 써서 물리쳤는데, “김응우 선생의 투쟁 업적”을새긴 기념비가 곤유섬에 세워져있다는 것이다. 그게 쑥섬에 있지 않느냐고 묻자 쑥섬에 있는 것은 “샤만호 격침비”란다.

배를 타고 평양에 들어가려면 서해에서 남포를 거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만경대 앞의 커다란 두루섬과 조그만 곤유섬이 평양의 관문인 셈이다. 이 섬들을 지나면 1948년 4월 김구와 김일성 등 남북의 정당 및 사회 단체 인사들이 이른바 ‘남북 대표자 연석회의’를 가졌다는 쑥섬에 이르게 되는데, 이 섬 앞에서 셔먼호가 격침되었던 것이다.

이 쑥섬엔 제너럴셔먼호 격침 100주년을 기념하여 1966년 격침비를 세워놓았고, 쑥섬 앞 대동강변 셔먼호가 격침된 자리엔 1968년 원산 앞바다에서 붙잡은 “미제 간첩선 푸에블로호”를 전시해놓고 있다. 여기서 좀 더 올라가게 되면 양각도호텔이 들어선 양각도에 이르고, 한참 더 올라가면 5.1경기장이 자리잡은 능라도에 이르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출판사에서 나온 '조선 력사' 근대편엔 '김응우 선생님을 선두로 한 평양 일대 인민들에 의한 미국 침략선 ‘샤만’호의 격침'이란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조선 인민의 자랑찬 반제 투쟁의 력사는 미국 침략선 ‘샤만’호를 짓부시기 위한 투쟁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벌써 1830년대부터 우리 나라에 대한 흉악한 침략 야망을 품고 호시탐탐 그 기회를 노리고 있던 미국 식민주의자들은 1860년대 중엽에 이르러 다른 자본주의 렬강들보다 앞서 본격적인 무력 침공의 길에 들어섰다. 조선에 대한 미제의 이러한 강도적인 무력 침공 력사에 첫 서막을 열어놓은 사건이 바로 ‘샤만’호의 대동강 침입이였다...

침략선 ‘샤만’호는 작은 배들을 앞세워 측량 작업을 하면서 (1866년) 7월 8일부터 대동강을 따라 기여오르기 시작하여 11일에는 평양부 초리방 신장포구에 침입하였다.... 놈들은 지방 관리들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대동강을 계속 거슬러 올라오면서 참을 수 없는 도발 행위와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였다. 미국 침략자들은 두루섬을 거쳐 (쑥섬 앞) 한사정 앞까지 기여들었으며 18일에는 놈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던 평양 감영의 중군을 랍치하여 ‘샤만’호에 억류하였다... 놈들은 7월 20일에는 양각도에까지 기여올라와 평양성에 상륙하려고 기도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미국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한 평양 일대 인민들의 투쟁의 선두에는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의 증조할아버님이신 김응우 선생님께서 서 계시였다. 김응우 선생님께서는 침략선 ‘샤만’호가 침입하자 만경대와 평양 일대의 인민들을 조국 방위의 성전에로 힘있게 불러 일으키시였다. 선생님께서 지펴올리신 첫 반미 투쟁의 봉화를 따라 평양 일대의 인민들과 애국적 군인들은 한결같이 대동강변으로 달려나가 침략자들을 쳐물리치기 위한 영용한 투쟁을 벌리였다...

7월 24일 (양력 9월 2일)에 투쟁은 절정에 이르렀다. 이날 낮 12시경 김응우 선생님의 지휘 밑에 인민들은 여러 척의 작은 배들을 한데 무어가지고 거기에 나무단을 가득 싣고 류황까지 뿌려 불을 지른 다음 상류쪽에서 일제히 ‘샤만’호를 향해 떠내려보냈다... 이처럼 우리 인민은 미국 침략선 ‘샤만’호를 불살라버리고 거기에 탔던 미국 침략자들을 모조리 물속에 처박아 넣었으며 2문의 대포를 비롯한 많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 빛나는 승리를 이룩할 수 있은 것은 전적으로 김응우 선생님을 선두로 하는 평양 인민들과 군인들이 애국적 헌신성과 창조적 지혜를 바쳐 희생적으로 투쟁하였기 때문이였다. 하기에 평양감사 박규수도 왕에게 보낸 자기의 보고문에서 평양성의 방어를 담당한 것도, 불배를 떠내려보내는 전술을 써서 놈들을 모조리 격멸해버린 것도 다 군대와 백성들의 용감성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였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북녘의 역사는 ‘김일성 주석의 증조할아버지 김응우의 지도’ 아래 셔먼호를 불태운 것으로 강조하고 있는데 반하여, 남쪽의 역사는 ‘평안감사 박규수의 지휘’ 아래 셔먼호를 격침시킨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나아가 남쪽에서는 박규수의 보고를 비롯한 당시의 역사 문헌에 김응우의 역할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김일성을 미화하기 위한 역사 조작’이라고 단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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