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pbpm@wonkwang.ac.kr,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매주 월요일 이재봉 교수의 방북기를 연재한다. 이재봉 교수는 지난 10월 중순 ‘아리랑’ 공연을 비롯해 이제까지 북녘을 세 번 방문했다.
이 교수는 방북기를 쓰는 목적에 대해 “소박하게나마 통일 운동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으로서 북녘의 실상을 나름대로 잘 알려보자는 데 있다”면서 “북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모습 또는 그들과의 대화를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의지를 밝혔다.
한반도 및 세계 평화문제와 특히 남북 통일문제에 실천적으로 접근하려는 이재봉 교수는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 대표를 맡고 있다. - 편집자 주


5. ‘소박한’ 순안비행장

11시경 순안비행장에 도착하자 비행기문 밖에 북녘 입국 심사관들이 기다리고 있다. 남쪽 식으로 말하면 법무부 출입국관리국 직원들일 것이다. 입국 심사는 방북자 명단에 나와 있는 이름과 얼굴을 대조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공항청사까지 걸어가도 좋을 만큼 100m도 되지 않을 거리지만 굳이 버스에 타란다. 일행 가운데 몇 사람은 조그만 건물 하나에 저만치 비행기 몇 대만 눈에 들어오는 공항 규모에 놀라는 듯하다. 나중에 거기는 남쪽에서 오는 비행기만 내리는 공항의 한 쪽 귀퉁이인줄 알았는데 그게 전부 다였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7년 전 베이징을 통해 순안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 사다리 밑에서 우리 일행을 맞아주던 북녘의 안내원이, 오느라 수고 많았다면서 “우리 공항은 소박합네다”라고 건넨 말이 생각난다. 한 나라 중심부에 자리잡은 유일한 국제공항인데 자본주의 시각으로는 초라하다고 느낄 만큼 조그만 비행장이다. 평양에서 중국의 베이징 (北京)과 센양 (沈陽)까지 국제선 열차가 일주일에 두 차례씩 오간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북녘이 다른 나라들과의 인적 교류가 얼마나 적은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공항 청사 안에서 짐 검사는 싱거울 정도로 간단히 끝났다. 7년 전에 둘이 들어올 때는 가방을 열어보며 휴대하는 책들까지 깐깐하게 펼쳐보았다. 2년 전에 단체로 들어올 때는 몇 몇 사람들이 가방 깊숙이 휴대 전화를 넣어 오는 게 걸리는 바람에 좀 딱딱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엔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엑스레이 짐 검사로만 끝난 것이다.

청사를 막 나서려는데 남쪽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들어온다. 충남의 한 대학에서 ‘북한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도 섞여 있다. 10여년 전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같이 밟던 가까운 사람이다. ‘남이랑북이랑’ 평생회원이기도 하여 며칠 전 나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자고 전화했더니, 우리 일행보다 하루 앞서 학생들 30명과 함께 방북 계획이 잡혀 있다고 알려주었었다. 그러니까 어제 아침에 들어왔다가 오늘 아침에 나가는 ‘아리랑’ 방북단인 것이다.

청사 밖으로 나오니 2년 전 방북했을 때 우리 안내를 맡았던 사람이 눈에 띈다. 사회과학원 소속으로 나에게 꽤 부정적 인상을 남겼던 사람이다. 그도 나를 알아보기에, 이번에도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게 되었느냐고 묻자 지금 떠나는 방북단의 안내를 맡았단다. 그러나 나를 맞아주는 반가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2년 전 북녘에 머무르며 정을 나누고 그 인연으로 나중에 베이징에서 두어 차례 일부러 만났던 ‘동무’에게 며칠 전 팩스를 보내, 이번 방북 일정을 알려주며 평양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기 때문에 공항에서 나를 맞아 주리라는 기대를 품고 온 것이다. 참고로, 나는 ‘남이랑북이랑’ 사업을 위해 통일부로부터 ‘북한 주민 접촉’ 허가를 받아놓은 상태여서, 일정 기간 동안 정해진 범위 안에서, 북녘 사람들과 전화나 편지 또는 팩스를 주고받을 수도 있고 직접 만날 수도 있음을 밝힌다.

6. 눈에 익은 평양시내

이번 방북단은 모두 125명으로 4개조로 나뉘어 버스를 타는데, ‘남이랑북이랑’ 일행은 4호 버스에 배정되었다. 우리 4조 담당 안내는 민화협 소속 엄00라고 자기 소개를 한다. 40대 초반으로 첫인상이 참 좋다.

순안비행장에서 숙소인 양각도 호텔까지 가는 길은 이미 눈에 익어 대충 알 듯하다. 평양 시내로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중요한 건축물은 금수산기념궁전. 지금은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요, 지난날엔 그가 집무하던 주석궁으로 남쪽의 청와대에 해당되던 장소다. 북녘에서 ‘궁전’이란 이름이 붙은 건물은 이곳 말고도 평양시와 각 도에 하나씩 있다는 학생소년궁전이다. ‘주석’을 영어로는 ‘President’로 옮길 수 있고 남쪽 식으로는 ‘대통령’으로 바꿔 쓸 수 있는데, 이는 최고 지도자라는 뜻을 가진 수령과 같고, 수령은 왕이라는 인식이 담겨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학생 소년들이 주로 예체능 분야의 과외 활동을 하는 장소에 ‘궁전’이란 말을 붙인 데는 어린이들이 미래를 짊어지고 나가야 할 주역으로서 이들을 왕이나 임금처럼 모셔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듯하다. 그러나 봉건 왕조에 대해 몹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북녘에서 ‘궁전’이란 말을 긍정적으로 쓰는 것은 역설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금수산기념궁전을 지나치면서 안내를 맡은 엄 선생이 이 건축물의 크기가 길이 415m에 너비 216m라고 소개한다. 북녘에서는 4.15와 2.16 등의 숫자가 건축물의 규모에 영향을 미치고 무슨 단체들의 이름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4.15는 김일성 주석의 생일이고, 2.16은 김정일 위원장의 생일이다.

한편 1998년 금수산기념궁전을 방문한 뒤 쓴 1차 방북기에서 김 주석이 “생전에 집무하던 방에” 반듯하게 누워있다고 묘사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었다. 이번 방북 이튿날 금수산기념궁전을 다시 찾아 그곳 관리들에게 확인해보니 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곳은 생전의 집무실이 아니라 접견실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번 방북을 통해 북녘 제1의 국립묘지라고 할 수 있는 ‘혁명렬사릉’ 자리가 금수산기념궁전의 위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혁명렬사릉은 흔히 ‘혁명 제1세대’라 불리는 항일 빨치산 100여명이 묻혀있는 곳으로, 금수산기념궁전 앞 대성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김 주석이 1930년대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일본군에 맞서 함께 싸우던 동료들을 회상하면서 일할 수 있도록 그들을 주석궁 앞산에 묻었다는 뜻이다.

김 주석은 생전에 한편으로는 지난날의 항일 빨치산 동료들을 회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앞날을 이끌어갈 대학생들을 바라보면서 집무실을 지킨 모양이다. 평양 시내로 들어가면서 금수산기념궁전 다음으로 지나치게 되는 곳은 김일성종합대학인데, 그가 해방 직후 자신의 이름을 딴 대학을 세워놓고 뒷날 나라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이 밤늦도록 공부하는 것을 주석궁에서 흐뭇하게 지켜보았다는 얘기를 7년 전에 들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지나면 잠시 뒤에 동양 최대 규모라는 개선문 아래를 통과하게 된다. 개선문이 세워진 자리는 모란봉 기슭으로 김 주석이 20여 년 동안 나라 밖에서 일제에 맞서 싸우다 1945년 9월 평양에 돌아와 10월 14일 평양시민들에게 “력사적인 개선 연설”을 했다는 곳이다. 개선문 머리 부분에 1925와 1945라는 숫자가 대문짝만하게 새겨져 있는데, 1925는 그가 항일 운동을 벌이기 위해 만주로 떠나던 연도를 가리키고, 1945는 조국으로 돌아온 해를 나타낸다. 그의 70회 생일을 기념하여 세운다는 뜻에서 문 테두리에 70송이의 진달래꽃을 새겨놓았다.

개선문을 지나치면서 왼쪽으로 10만 명의 수용 능력을 갖추었다는 김일성경기장을 볼 수 있다. 이 역시 개선문처럼 모란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 처음에는 모란봉경기장으로 불렸지만, 1982년 김 주석의 70회 생일을 맞아 확장 공사가 이루어진 뒤부터 김일성경기장으로 불리고 있다.

개선문을 뒤로 하니 오른쪽으로 천리마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6.25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김 주석이 1950년대 중반 “천리마를 탄 기세로 달리자”는 구호를 제시하면서 시작된 천리마운동의 상징으로, 1961년 그의 49회 생일을 맞아 세워졌다고 한다. 이곳을 스칠 때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1960년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물론 197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도덕’이나 ‘바른 생활’ 과목의 핵심은 반공이었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게 덕을 쌓는 일이요 바르게 생활하는 길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부산의 한 초등학교 6학년일 때 매주 시험을 봤는데, ‘도덕’인가 ‘바른 생활’ 시험에 “북한에서는 말이 천리를 달리듯이 열심히 뛰라는 뜻으로 강제로 중노동을 시키는데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라는 문제가 나왔다. 대부분 ‘천리마운동’이라고 썼는데 공부를 꽤 잘하던 한 친구는 ‘소위 천리마운동’이라고 써서 웃음을 산 적이 있었다. 교과서에 “북한에서는 소위 천리마운동이라고 해서 말이 천리를 달리듯이 ....”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 친구는 ‘소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 채 통째로 외어 적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연을 떠올리게 하는 천리마동상을 지나면 곧바로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동상을 만나게 된다. 1972년 김 주석의 60회 생일을 맞아 세워졌다는데, 왼손은 허리에 올리고 오른손을 들어 “인민들이 나아갈 앞길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의 엄청나게 큰 ‘기념비’다. 대개 적은 수의 사람들이 평양을 찾으면 가장 먼저 이곳으로 안내하여 ‘수령님께’ 인사드리기를 권하기 마련인데 100명이 넘는 단체로 방북하니 그냥 지나친다.

곧 북녘에서 1919년 3.1 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이라는 장대재 언덕에 자리잡은 평양학생소년궁전을 스치고, 바로 이어 남쪽의 국립도서관에 해당되는 인민대학습당과 중요한 야외 행사가 가장 많이 펼쳐지는 김일성광장에 이른다. 광장 왼쪽 대동강 건너로는 주체사상탑이 높이 솟아 있는데, 인민대학습당에 앉아 강 건너 주체사상탑을 바라보며 공부하라는 취지로 두 건축물이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칭을 이루게 한 것이란다.

7. 북적대는 평양역전

잠시 뒤 평양역이 보인다. 역 광장에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무슨 행사에 동원된 사람들을 빼고는 아마 북녘에서 가장 큰 인파를 볼 수 있는 장소일 것이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평양시내 곳곳에 팔짱낀 부부를 포함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거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여기엔 사람들이 넘친다는 표현을 써도 좋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런데 평양역을 지나면서 역을 소개하는 북녘 안내원의 말이 귀에 거슬린다. “저 건물이 평양역전입네다.” 건물을 역앞이라니.... 북녘에서는 한자를 잘 쓰지 않아서 ‘전(前)’자의 뜻을 모르는 걸까, 알면서도 잘못된 언어 습관으로 그렇게 쓰는 걸까. 어법에 어긋나는 말을 듣거나 맞춤법이 잘못된 글을 보면 때와 장소 그리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시비를 가려야 직성이 풀리는 터여서, 그의 말을 바로잡아줄까 생각하다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사람에게 쓸데없는 긴장감이나 부담감을 줄까봐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남쪽에서는 ‘역전앞’이라는 잘못된 말이 많이 쓰여지고 있으니, 북녘에서나 남쪽에서나 ‘역전’이란 말이 문젯거리인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버스는 어느새 대동강 양각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양각도호텔. 2년 전처럼 이번에도 숙소로 정해진 곳이다. 정오 무렵 호텔에 도착하자 방 확인과 점심 식사를 빨리 마치고 1시까지 모이란다. 오후엔 김 주석이 태어났다는 만경대생가, 주체사상탑, 개선문, 고구려 시조 동명왕릉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 잡혀있는 것이다.

8. 돈맛을 본 평양 사람들: 안마실 문은 24시간 열고 요금은 두 배로 올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일본에서 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 선생과 호텔 지하의 건강 센터로 달려갔다. 안마 예약을 하기 위해서다. 새벽 잠자리에서부터 목구멍이 따끔거리다가 10시경 비행기에 오를 때엔 콧물이 흐르기 시작하기에,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그녀에게 오늘 저녁 고려의사(한의사)가 해주는 건강 안마를 같이 받아보자고 꼬드겼던 것이다.

김 선생은 ‘남이랑북이랑’ 평생회원으로, 교토에서 정치학교수 겸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미국인 남편과 일본 언론인 친구까지 평생회원으로 이끈 미술가 겸 평화 운동가다. 그녀의 딸은 미국의 대학원에서 평화학 공부를 하고 싶다며 2주전쯤 한국을 방문하는 길에 날 찾아오기도 했다. 김 선생은 앞으로 1-2년 사이에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평화 미술 전시회를 구상하고 있어서 내가 이번 평양 방문을 주선한 것인데 안마실까지 안내하는 셈이다.

안마실 접수대에 이르니 여성 접대원 2명이 반긴다. 몇 시까지 봉사하느냐고 묻자 24시간 한단다. 지난번엔 12시까지 밖에 하지 않았는데 자정이 지난 뒤에도 하느냐고 거듭 물어보니 분명히 그렇다고 확인해준다. 봉사료를 물으니 1시간에 25유로 또는 30달러란다. 남쪽 돈으로 약 3만원. 2년 전엔 30분에 7유로 1시간에 13.5유로였는데, 그 동안 왜 이렇게 많이 올랐냐고 따지듯 묻자 자신들은 잘 모르겠단다.

지난번엔 이발료가 7,000원 정도, 1시간 안마 요금이 18,000원 정도여서, 사치스러운 게 아니라는 생각으로 머리도 깎고 안마도 받고 했는데, 2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오른 안마 요금이 조금 부담스럽다. 김 선생도 하지 않겠단다. 아쉬운 맘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콧물이 줄줄 새는 묵직한 몸으로 오후에 평양시내를 돌고나면 더욱 피곤해질 것 같아 호텔에 돌아와 저녁 식사 마치자마자 안마 받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는 달콤한 생각을 품고 예약하러 왔는데 말이다.

왠지 모르게 언짢은 기분도 들고 얄밉다는 생각도 든다. 믿는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는 듯한 느낌도 생긴다. 그까짓 돈 만원 정도 더 내고 아름다운 여성으로부터 안마를 받으며 북녘 생활에 관한 얘기도 나누고 피로를 풀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심보가 고약한 걸까, 사람 마음이란 게 참 묘하다.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라면, 이번 방북에 앞서서도 ‘어깨동무’를 통해 천만 원을 선뜻 내놓았듯, 몇 백만 원이든 몇 천만 원이든 기꺼이 ‘퍼’ 주겠는데, 천원이든 만원이든 바가지 쓰는 기분으로는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속된 말로 북녘 사람들이 돈맛을 좀 본 모양이다. 날 포함한 남쪽 사람들이 그렇게 이끌었을 것이다. 2년 전 방북했을 때 거의 매일 일정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면 밤 9-10시였는데, 안마실은 밤 12시에 문을 닫는 바람에 일찌감치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마를 받을 수 없었다. 이렇듯 남쪽 사람들에게 안마의 인기가 치솟게 되자, 문은 24시간 열고 요금은 거의 배로 올리지 않았을까.

아무튼 좀 씁쓸한 맘으로 건강 센터를 빠져 나오며 옆의 당구장을 들여다보니 대여섯 사람이 당구를 즐기고 있다. 지금까지 낮에든 저녁에든 당구장에 사람 없는 것은 본 적이 없으니 도대체 대낮에도 호텔 지하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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