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태 (이병태치과의원 원장)

개성을 한번밖에 가보지 못한, 그것도 10시간 정도 머물렀던 치과의사 이병태 박사의 개성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한다. 필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개성관광이 실현되면 “이 글이 개성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특히 필자도 첫팀으로 가서 북측 안내원 리정수 兄을 또 만나면 좋겠다”고 밝혔다.

필자는 2003년 10월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식에 참석차 평양에서 행사를 치른 뒤 귀환길에 개성을 들렀으며, 이때 ‘방북기’를 네 차례에 걸쳐 통일뉴스에 연재한 바 있다. 필자가 열렬히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리정수 兄은 당시 북측 안내원이다. <이병태의 개성이야기>는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연재된다. - 편집자 주

(‘6. 이병태의 개성 기행’ 편은 필자가 2003년 10월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식 참관차 평양에 갔다가 오는 길에 개성을 둘렀는데, 특히 당시 북측 안내원이었던 리정수 선생과의 인연을 생각하며 몇 시간 동안 짧게 머물렀던 개성에 관한 소감을 현재형으로 정리한 것이다 - 필자 주)


☞ 말에서 내려라! 下馬碑

“선죽교를 관람하시겠습니다.”
안내 리정수 선생이 말을 했다.

선죽교 근방은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1천명이 방북 했고 그 일부가 몰렸으니 오죽했을까.

나는 조금 한가해질 때를 기다렸다. 그러자 일행들은 ‘시간이 없으니 빨리 보아야지 뭘 하냐’식으로 나를 끌고 밀치고 갔다.

그 때 내 눈에는 한 비석이 눈에 뜨였다. 下馬碑라고 쓰여있다. 아주 오래되어 보였다.

우선 사진을 찍었다. 내가 사진을 찍는 것을 보더니 그냥 무심코 지나던 사람들도 되돌아 와 막 찍었다. 그들은 대부분 비디오카메라나 디지털카메라를 들이댔다.

일찍이 대원군이 자기 하인과 안내 선비, 모두 셋이서 선죽교에 당도하였을 때 안내선비가 말했다.
“여기서 말을 내리셔야 합니다.”

“알았네. 여기는 하마비가 둘이나 서 있군 그래.”
“그렇습니다. 작은 하마비는 정몽주가 순절한 선죽교 앞에서 내리라는 것이고 큰 하마비는 영조 대왕께서, 비록 이성계 태조에게는 불응했으나 그 충절을 높이 기리기 위해 표충비(表忠碑)를 세우고 그 앞에 세운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대원군이지만 선비의 설명에 끄덕거렸다.
“으음. 그러하군. 그리고 ‘선죽교’ 그 글이 명필이렸다.”
“대감께서 글을 알아보시니 고맙습니다.”

“이사람, 고맙기는…. 나도 늘 연습중이라네.”
“그러시군요. 안평대군, 한석봉, 양사언이 조선의 3대 명필이지요.”

“3대 명필. 나도 아네. 한석봉 서체가 어디 있나.”
“저기 보고 계신 비석의 ‘善竹橋’ 글씨와 화담 서경덕 선생의 비문(碑文)을 한석봉이 쓰셨다고 합니다.”

☞ 두 개의 표충비(表忠碑)

대원군이 본 표충비는 영조대왕이 1740년에 세운 것 하나 뿐이었으나 내가 본 표충비는 두 개인데 왼쪽(北)은 영조대왕이 세운 것이고 오른쪽(南)은 1892년 고종황제가 세운 것이다.

‘대원군’이라는 이름은 조선왕조에 셋이 있는데 살아서 대원군이 된 사람은 이하응뿐이고 흥선대원군이라고도 한다. 이 대원군은 22대 정조대왕의 동생인 은신군의 손자이고 26대 고종황제의 아버지이다.

대원군이 되기 전 이하응이 표충사에 들러보면서 개성의 정황을 보아, 아들이 즉위하면서 또 하나의 표충비를 세운 것 같다.

21세기를 맞아 두 표충비 옆에 또 하나의 표충비가 세워질 수는 없을까. 마음속으로 ‘표충비’를 세울 위인이 이 하늘아래 어디에 있을까.

☞ 萬壽山이 이화원(이<傾에서 化를 빼고 臣을 붙임 자>和園)에 있구나* (이글은 필자가 펴낸 ≪北京ㆍ延邊 그리고 白頭山≫ (1992년 再판, 307쪽)의 ‘중국땅을 밟다’(25, 26쪽)에 있는 내용이다. 만수산, 만수산하고 찾았지만 주변의 누구도 만수산이 개성에 있다고 말해 준 사람이 없었다.)

이화원의 곤명호(昆明湖)는 인공호수라더니 호수 북쪽에 萬壽山(완셔우산)도 인공산이란다.

萬壽山.

조선조 태조의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鄭夢周)를 회유할 때, 읊은시에 나오는 산이 이 산인가. 당시 실세인 이방원(太宗)은 정몽주를 찾아 시를 주고받으며 협조를 당부했고 한 편에서는 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며 거절했음은 당시 정치사의 일면이다.

먼저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를 보자.

이런들 엇더하며 저런들 엇더하료
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하료
우리도 이갓치 얼거져 百年ㅅ가 누리리라.

이 시조는 <청구영언>에 실려 전하고 <포은집>과 <해동악부>에는 한역시(漢譯詩)가 수록되어 있다.

단심가(丹心歌)는 이렇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이 몸이 주거주거 일백번 고쳐주거
백골이 진토되여 넉시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포은집(圃隱集)에는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

필자는 등산지도를 펴거나, 우리나라와 중국지도에서 萬壽山을 몇 번씩 찾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찾지 못했다.

萬壽山, 昆明湖가 있는 이화원의 내력을 보자.

- 1153년 : 金朝황제가 궁전을 조성한 것이 처음.
- 明朝 : 궁을 몇 개 더 짓고 好山園(하오산유엔)이라 개칭.
-1750년 : 淸의 乾隆帝(첸릉띠)는 昆明湖를 확대하고 어머니의 壽를 기리기 위하여 萬壽山이라 이름을 붙이고 여기에 여러 건물을 지었다.
- 1860년 : 제2차 아편전쟁으로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게 점령돼 많이 파괴됨.
- 1888년 : 西太后(시타이허우)는 해군의 군함건조비를 유용해서 이 별궁을 재건. 이로 인해 중국의 군함이 적어 청일전쟁(1894년)에서 대패하는 결과를 초래함. 그 후, 수리할 때 이화원(이허유엔)으로 개칭
- 1900년 : 의화단 사건 때, 8개국 연합군에게 점령되어 일부가 폐허로 되자, 서태후는 다시 재건함.
- 1914년 : 일반사람에게 공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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