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뉴스는 지난 20년 가까이 통일운동 현장의 일선에서 뛰어온 민경우 통일연대 전사무처장이 직접 쓴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를 연재한다. 이 연재물은 민경우 처장이 옥중에서 작성한 원고를 '옥중기고' 하는 방식으로 게재된다. 민경우 씨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범민련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범민련 공동사무국 박용 부총장에게 8.15 통일대축전 행사와 통일연대 결성 등의 '국가기밀'을 수집 전달했다"는 이유 등으로 지난 2003년 12월 1일 전격 연행된 후 3년 6월형이 확정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2005년 4월 11일 전주교도소로 이감됐다. 민경우 전 처장의 새로운 주소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 3가 99 전북 전주우체국 사서함 72호 전주교도소'이며 수인번호는 2500번이다.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는 매주 월요일에 연재된다. - 편집자 주 |
6.15 공동선언 5돌을 맞이하여 진행된 6.15 민족통일대축전과 6.17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 사이의 면담은 6.15 공동선언과 그것을 둘러싼 제반 정세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6.15 5돌을 계기로 조성된 새로운 정세를 개괄해 본다면, 첫째 북미 대결이 대단히 극적인 단계로 접어들고 있고, 둘째 남북관계가 남북 정부급 대화를 축으로 공세적인 전진을 예고하고 있으며, 셋째 민간급 통일운동이 6.15 공동위원회를 거점으로 새롭게 재편되고 있는 점이 아닐까 싶다.
본 글에서는 위의 문제의식에 따라 6.15 공동선언 합의 이후 지난 5년을 돌아보고 6.15 공동선언의 완성을 위한 과제를 명확히 해보겠다.
① 6.15 공동선언을 둘러 싼 간극
6.15 공동선언은 7.4 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계승한 정치적 합의이다. 그러나 지난 5년간 6.15 선언의 그러한 의미가 정확히 확인되고 공유되고 있지는 않았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간극이 생겨난 원인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 서술해 보겠다.
㉠ 대중정서와 6.15 공동선언 사이의 간극
6.15 공동선언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로 출현한 것이다. 대중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남북의 정상이 만나고 거기서 분출된 민족 정서가 깊이 공유된 반면 6.15 공동선언에 대한 이미지(특히 자주적 성격)는 약한 듯 하다.
위와 같은 간극이 발생한 이유는 대중의 의식 속에 선점되어 있는 정치의식을 토대로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2000년 시점에서 보면 대중의식은 남북이 「적대.대결」하지 않고 「화해.공존」해야 한다는 의식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었다.
점차 후자가 우세해지고 있었지만 그러한 의식이 확고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남북 정상회담은 대중운동, 대중의식 발전에 발맞추어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 아니라 남북 정상의 정치력에 의해 전격적으로 합의되어 갑작스럽게 출현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점진적으로 강화되고 있던 「화해.공존」의식은 남북 정상회담으로 극적으로 분출되었다가 다시금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고 남북관계는 이 조건에서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거치며 완만하게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15 이후 수년 동안 있었던 극적인 정치적 사건들, 가령 2002년 대선, 2004년 탄핵과 4.15 총선 등은 위와 같은 의식 변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대중 의식이 남북의 적대.대결에서 화해.공존 사이에서 묶여 있었기 때문에 남북 화해를 상징하는 정상회담이 적극적으로 수용된 반면 6.15 선언의 자주적 성격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지난 5년간 6.15 공동선언과 6.15 공동선언의 지지.이행을 목표로 하는 조국통일운동은 진취적으로(?) 발전하기 어려웠다.
한편 대중 정서가 남북 적대.대결에서 화해.공존으로 변하는 상황과 맞물려 민족자주, 공조 의식도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데 이는 최근의 각종 여론 조사에서 뚜렷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대중 의식이 변화하는 속도에 맞게 6.15 공동선언에 대한 태도 또한 달라질 것이다.
㉡ 정치세력과 6.15 공동선언 사이의 간극
6.15 선언은 민족화해, 평화의 관점을 중심으로 통일문제에 접근했던 DJ 정부 하에서 그리고 민주노동당이 제도권에 진입하던 초입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6.15 공동선언은 DJ 정부와 그 계승자인 노무현 정부의 구미에 맞게 자주적 성격이 거세되거나 변질되어 수용되었다.
6.15 공동선언과 이를 체현하는 정치세력 사이의 이러한 간극이 2000년 이후 6.15 선언이 의미있는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이다.
제도권의 정치세력은 대중 정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도 독자적인 힘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제도권 정치 세력은 대중 정서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지만 역으로 제도권의 정치세력이 정치적 쟁점으로 삼느냐의 여부가 대중의식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양자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대중의식 발전에 조응하는 정치세력이 실질적인 힘을 가졌을 때 어떤 정치적 의제는 비로소 완성되게 된다.
대중의식과 정치세력(대체로 노무현 정부)이 남북 화해.공존에 묶여 있는 조건에서 6.15 공동선언은 의미있는 정치적 주제로 부상하지 못했다. 6.15 공동선언의 자주적 성격을 대변하는 민주노동당과 통일연대(범민련.한총련)의 경우 전자는 미약했고 통일연대는 비제도권 또는 반(半)합법의 틀을 넘지 못했다. 6.15 공동선언은 지난 5년간 자신의 위력있는 대변자를 갖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6.15 선언의 자주적 성격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이를 화해.공존으로 해석한 대중의식을 배경으로 반미자주화, 반한나라당 운동이 예민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했다.
반미자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단위는 여중생범대위와 무정형의 대중이었다. 여중생범대위는 민족민주세력과 시민단체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통일연대는 여중생범대위를 구성하는 유력한 두 개의 단위 중 하나와 유사했다. 노무현 후보는 촛불시위가 정점에 이르던 2002년 하반기 촛불시위의 동력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음에도 이를 정면에서 대변하려 하지 않았다.
여중생범대위를 구성했던 민족민주세력은 6.15 공동선언 지지.이행을 명확히 했던 통일연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양자는 동일한 집단이기는 하지만 전자는 진보와 자주를 표방했던 비제도권의 정치세력을 통칭하여 부르는 추상적인 명칭이고 후자는 구체적인 목표에 기초하여 건설된 통일운동조직이었다. 또한 민족민주세력 전체가 6.15 공동선언과 통일연대의 기조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 차이로 인해 여중생범대위는 6.15 공동선언으로 집중.수렴되지 못하고 해소되었다. 여중생범대위와 유사한 구성을 보였던 ‘이라크 파병반대 국민행동’, ‘탄핵반대 대책위’, ‘국보법 철폐 국민운동본부’ 등도 6.15 공동선언과는 대체로 무관하게 움직였다.
6.15 공동선언 이후 각종 반미 자주화운동은 6.15 선언을 배경으로 벌어졌음에도 그 성과가 명확히 6.15 공동선언 그 자체로 집중되지 못하는 양상이 계속되었다. 돌이켜보면 6.15 이후 5년을 하나의 단락으로 하여 평가한다면 이 시기는 또 다른 질적 도약을 준비하는 점진적인 성장의 과정이었던 것 같다.
반한나라당의 경우 노무현 정부나 열린우리당이라는 명확한 정치적 실체가 있었던 만큼 그 한계는 더욱 뚜렷했다. 노무현 정부나 열린우리당이 통일문제를 「화해와 공존」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반한나라당의 정치적 성과는 「화해와 공존」의 틀을 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6.15 공동선언은 그저 막연한 과거의 문제였을 뿐이다.
㉢ 한반도 국제 정세와 6.15 선언 사이의 간극
6.15 선언은 2000년 10월 북미 공동성명과 맥을 같이하는 사건이다. 선후가 달라지긴 했지만 논리적으로는 북미관계 개선이라는 질서 재편을 선(先)으로 하여 6.15 공동선언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6.15 공동선언이 「화해와 공존」이 아니라 「자주와 대단결」선언이라는 성격규정과 동일한 맥락이다.
2000년 시점에서 대중은 남북 정상회담을 중심으로 남북사이의 「화해와 공존」이라는 관점에 묶여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북미 각축을 방관자.관찰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것이다. DJ-노무현 정부의 경우는 어떤 입장을 세우고 이에 개입하려 했다. 이것은 책임있는 정치세력으로서의 당연한 태도이다.
DJ와 노무현 정부가 달랐던 것은 DJ정부가 북미관계 개선을 적극 고무하고 남북관계 개선을 이와 무관한 또는 이를 촉진하는 지렛대로 삼은 반면 노무현 정부는 북미, 남북관계를 어중간한 입장에서 관리.통제하려 한 점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남북관계가 답보 또는 후퇴한 것은 노무현 정부의 이러한 태도 때문이었다.
3차 6자회담 이후 4차 회담 개최가 예상보다 늦어진 점, 2004년 11월 미 대선에서 부시 행정부가 승리하면서 북미대결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점, 2.10 북 외무성의 핵 보유선언을 기점으로 정세가 가파르게 발전한 점 등을 배경으로 정부의 태도가 보다 적극적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변화된 입장은 6.17 만남 등을 통해 구체화되었고 4차 6자회담, 남북관계 발전 등을 통해 가시화될 것이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지적할 것은, 첫째 그러한 변화가 남 내부로부터 적극적으로 촉발되었다기보다는 한반도 및 국제 정세의 변화에서 추동되었다는 점, 둘째 여전히 민족공조와 같은 적극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은 점이다.
가령 정동영 장관이 발표한 대북 중대제안(200만kw 전력의 대북 지원)은 그 자체로만 보면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어설픈 제안이다. 「북미 제네바 합의에서 약속한 경수로」를 「남이 지원하는 화력 발전소」로 바꾼다는 것인데 미국의 부담(200만kw 전기에 대한 경제적 부담, 경수로라는 핵 프로그램의 해소, 향후 북미 타협 과정에서 미국의 책임 약화 등)을 한국의 부담으로 대체하겠다는 발상으로 보인다.
민족적인 견지에서 보면 미국의 부담을 남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게 부담을 떠안기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어쨌든 북미 중간에 끼어 어떻게든 중재해 보려는 노력 자체는 가상해 보이지만 사고의 발상은 여전히 「민족 공조」라기보다는 「관리.통제→적극적 중재」에 머물러 있는 듯 하다.
한반도 정세 및 국제 정세와 6.15 선언 사이의 괴리, 즉 6.15 선언에 우선하여 발전해야할 북미관계가 악화되면서 남북관계가 위축된 것이 6.15 공동선언의 전진에 난관과 장애를 조성했다고 볼 수 있다.
② 6.15 공동선언의 완성을 위해
㉠ 주한미군의 지위 변경
통일은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민족문제의 핵심적인 지표는 주한미군이다. 주한미군이 민족의 반쪽을 적대하는 조건에서 민족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통일문제를 이러한 관점에서 보지 않고 남이 북을 흡수하는 문제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발상은 통일을 민족적 문제로 보지 않는 것인데 이런 식의 통일도 통일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 경우 주한미군 문제는 남이 북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해결되지 않는다면 설사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주한미군으로 대표되는 민족문제는 또다시 남는 것이다. 물론 역사가 이렇게 흘러갈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 과제는 올바로 제기하고 또 제기되었을 때 해결하고 가는 것이 옳다.
따라서 통일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에서 주한미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주한미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주한미군이 남북을 포괄하는 우리 민족 전체에 대해 적대적인 지위 또는 상태에 있지 않도록 철수시키거나 조정하는 것이다. 이때 조정이란 주한미군이 대북 억제력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평화유지군으로 남고 이에 대한 민족 차원의 통제력을 갖는 것이다.
6.15 공동선언만으로는 주한미군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반외세, 반미의 개념을 온전히 담은 문서는 7.4 공동성명이고 1991년 합의서와 2000년 6.15 선언은 7.4 공동성명에 기초하여 체결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합의서) 또는 「우리 민족끼리」 라는 우회적(?) 개념을 통해 이를 간접적으로 표현해 왔다.
따라서 6.15 공동선언의 완성을 위해서는 남북 사이의 작업과는 별도의 노력이 필요한데 이는 북미관계 정상화 또는 한미관계 조정을 통해 해결될 것이다. 현재 상황으로 보면 북미관계 정상화를 중심으로 한미관계 조정이 결합하는 양상이 될 것이다.
㉡ 다극화
통일이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면 그렇게 해서 통일된 민족과 다른 민족 또는 주변 열강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필자는 다극화가 핵심이라고 본다. 이는 세력 균형, 다자주의, 비동맹 중립 등과도 맥을 같이하는 개념이다.
통일된 민족과 다른 민족과의 관계를 「평화」로 규정하고 평화 민족주의를 제창하는 경우가 있다. 상식적으로 보면 호소력이 높은 주장이긴 하지만 검토의 여지가 있다. 평화란 다분히 「시민사회」의 입장에서 대단히 근본적인 차원에서 제창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통일과정의 문턱을 과도하게 높이는 경향이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통일문제는 여러 다양한 주제 중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고 시민사회 보다는 정부와 국가가 중심이며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져야 하는 긴박한 과제이다. 이런 차원에서 평화를 과도하게 부각하면 통일과정의 교란이 있을 수 있다.
(근대 사회에서 정부와 국가는 물리적, 법적 강제력의 독점위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를 주변 열강에까지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평화민족주의란 비무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등과 같은 영세 중립국이 모델일 텐데 한미동맹 체제 아래서 이 자체가 적어도 탈미(脫美)와 같은 커다란 변화를 요구한다.)
북핵은 그것이 남으로 향하지 않는다면 통일의 관점에서는 절대선도, 절대악도 아니다. 평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고 그것을 근본적인 수준으로 확장하면 한반도뿐만 아니라 인류 공동체 전체의 핵폐기가 옳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의 각축이 진행되는 조건에서는 핵 자체보다는 핵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문제 삼아야 한다.
북핵은 남(南)을 적대시하고 주변 정세를 전쟁으로 몰아가지 않는 선까지는 도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 북핵의 방향이 남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反)민족적, 반통일적이라 볼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엔 그런 것 같지 않다.
한편, 또 다른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북핵과 주변 정세와의 관계인데 북핵이 다극화 또는 세력 균형을 위한 약자의 수단이라면 그것은 용인될 수 있다. 북핵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수준은 자체 안전이 보장되었음에도 이를 추구하는 경우이다.
군사적인 문제 중 남북을 포괄하는 민족 전체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지 않지만 다극화를 파괴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가령 주한미군이 한반도 전체의 평화 유지군으로 성격이 변하고, 즉 대북 적대정책의 물리적 기반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하더라도 그것이 가령 중국-대만 분쟁에 파견될 수 있는 신속기동군으로서의 성격이 유지된다면 그것은 용인될 수 없다. 이것은 주한미군이 우리민족에 적대적이지 않더라도 중.러.일.미 등과의 평화로운 공존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통일의 이념은 민족 또는 민족주의이다. 그런데 통일문제에 「시민적 가치」를 끼워 넣어 통일의 기초인 민족과 민족주의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또한 경계의 대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다극화」의 관점에서만 서술해 보겠다.
진보적인 정치세력은 현실의 과제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과제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그것대로 좋다. 이념과 이상이 사라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과정 특히 통일문제는 정부와 정부,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 각축하는 정치공간이다. 따라서 남북과 주변 열강의 내부 문제를 다룸에 있어 다극화라는 선에 맞추어 처리해야한다.
그것을 넘어서면 당면의, 초미의 과제인 통일문제를 지체시킬 수 있다.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 중.러의 권위적 정권, 북의 인권문제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7.4 공동성명에서 민족이 대단결하는 기준을 「사상과 이념」으로 두고 있는 이유도 동일한 맥락이다.
다극화, 다자주의, 세력균형, 비동맹 중립 따위의 개념은 시민사회나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근본적이고 이상적인 차원에서 주창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역 즉 현실의 집권 정부, 국가, 민족의 존재를 그대로 두고 이들 간의 공존을 추구하는 대단히 현실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필자가 6.15 선언 완성의 견지에서 이러한 현실적인 차원의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민족문제를 해결한다는 명확한 목표 아래 여타의 추상적인 대의를 젖혀 두고라도 통일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 one Korea
현 수준에서 보면 남북이 공존하고 다방면에서 대화.협력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체제와 이념을 합치는 문제는 후대의 과제이다. 그러나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는 그런 상태가 두개의 Korea가 아니라 하나의 Korea라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식은 통일이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공간이라는 문제의식과 일치한다.
one Korea 상태란 「남북정상회담-남북장관급회담-남북국회회담」 따위의 권한이 남북의 양 체제를 유지하면서 상호 협력.대화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지위는 남북 전체를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UN 의석을 단일화하고 남북전체를 대표하는 국호를 새롭게 제정하며 남북의 헌법을 그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의 핵심은 한반도 전체의 법적 지위를 변화시켜 남북간 적대와 대결, 종속과 분단을 가져왔던 장벽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이것만으로도 민족문제는 결정적으로 해결된다. 반면 또 다른 과제인 인권, 복지 따위의 문제는 별도의 영역이거나 민족문제 해결의 동력을 통해 순차적으로 처리해야할 후순위 과제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 두 개의 Korea 상태라면 주한미군의 주둔은 합법이고 북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다면 국제법 위반이다. 남의 나라에 주한미군이 있든 없든 간섭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one Korea 상태라면 주한미군 주둔은 북이 동의하지 않는 한 (또는 남북 모두를 대표하는 단일 정부가 동의하지 않는 한) 위법이 된다.
- 65년 6.22 한일 수교가 이루어졌는데 미래의 어느 시점엔가 북일 간의 수교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두개의 Korea 상태라면 한일, 북일 수교는 양립할 수 있지만 남북 모두를 대표하는 하나의 Korea가 구성되면 이 하나의 Korea와 일본과의 관계를 재조정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남북은 일본에 대한 국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에서 공조할 수 있다. 지금처럼 일본이 납치문제를 이유로 북일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가고 독도문제를 이슈로 내거는 일 등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 주한미군, 일본과의 관계 등과 유사한 문제들이 하나의 Korea와 국제 관계에도 공히 적용된다. 한국이 WTO에 가입했는데 한국이 하나의 Korea로 발전한다면 그 하나의 Korea와 WTO 관계를 재규정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근로 민중의 권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하나의 Korea 구성과정에서 분출될 민족적 에너지가 상당한 역할을 할 것이다.
위와 같은 문제가 국제적인 문제이고, 다음으로는 민족 내부의 문제를 살펴보겠다.
- 개성공단에 진출한 중소기업이 생산한 제품의 원산지는 남일까 북일까? 민족적 정서로는 우문에 속하지만 국제법적으로 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두 개의 Korea라면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의 원산지는 북이다. 이것을 남에서 생산한 제품과 동일하게 처리해 달라는 것은 민족 감정일 뿐이다. 얼마 전 미 국무부는 개성공단 제품의 원산지를 북으로 규정했다.
북을 원산지로 하는 제품은 판매는 물론 생산에서부터 엄격한 제재를 받는다. 가령 적대국인 북에 미국의 기술과 부품이 10% 이상 포함된 제품을 또 다른 주권국가인 남(南)에 수출할 수 없다. 수출하려면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각오해야 한다.
486 컴퓨터 등이 북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추세가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가까운 어느 시점 즈음에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또한 적대국을 원산지로 하는 제품은 수출이 불가능할 정도의 고율 관세를 매기도록 미국 국내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one Korea로 발전하지 않으면 개성공단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 남북의 교역.투자 등도 마찬가지이다. 남→북으로 쌀을 주고 북→남으로 지하자원이 왔을 때 두개의 Korea 상태이면 무역이고 하나의 Korea 상태라면 반입.반출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전자라면 어느 지점에선가 WTO 규정 등과 만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두 개의 Korea 상태에서는 남북이 호혜 협력하는 또 그것을 통해서 근로대중의 이익을 보장하는 다양한 정책적 수단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반면 하나의 Korea 상태가 되면 역으로 민족과 민중의 이익에 맞게 WTO와의 관계를 재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정치적으로 보면 남북은 헌법과 각종 법률.제도 등을 개정해야 한다. 남의 경우 헌법의 평화통일 조항과 영토 조항이 모순되고, 국가보안법과 남북교류협력법이 다르다. 이러한 모순이 온존된 것은 전통적인 보수수구 세력이 체제의 골간을 유지하면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전자와 모순되는 법률.제도 등을 양산한 때문인데 정상적이라면 전반적인 재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다.
두 개의 Korea가 하나의 Korea로 바뀌는 과정은 그러한 전반적인 재조정의 계기가 될 것이다. 법률과 제도의 정비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과 정치적 역관계의 변화를 수반하는 바 아마도 보수수구 세력의 상당한 퇴출이 불가피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