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뉴스는 지난 20년 가까이 통일운동 현장의 일선에서 뛰어온 민경우 통일연대 전사무처장이 직접 쓴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를 연재한다. 이 연재물은 민경우 처장이 옥중에서 작성한 원고를 '옥중기고' 하는 방식으로 게재된다. 민경우 씨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범민련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범민련 공동사무국 박용 부총장에게 8.15 통일대축전 행사와 통일연대 결성 등의 '국가기밀'을 수집 전달했다"는 이유 등으로 지난 2003년 12월 1일 전격 연행된 후 3년 6월형이 확정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2005년 4월 11일 전주교도소로 이감됐다. 민경우 전 처장의 새로운 주소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 3가 99 전북 전주우체국 사서함 72호 전주교도소'이며 수인번호는 2500번이다.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는 매주 월요일에 연재된다. - 편집자 주 |
서론
본 글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애초의 의도보다 길어지고 복잡해졌다. 덕분에 논란의 여지가 많은 개념.논리들이 포함되어 있고 더 진척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적지 않다. 어떻게 할까 하다 <주> 또는 <보론>으로 첨삭하기보다는 아예 본문에 앞서 이러한 문제들을 개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감옥에서 쓰는 글의 어려움은 한번 무언가를 쓰고 나면 이를 본 취지에 맞게 함축적으로 정리하고 수정하는 게 여의치 않은 점이다. 덕분에 이런 식의 편법을 취하게 되었다.
1) 역사 이론의 문제
신채호처럼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라는 뚜렷한 주체를 설정해 두고(이때의 我는 민족이다) 역사이론을 전개할 수 있다. 신채호의 역사 연구는 민족독립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실천하기 위한 방도와 같았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일반적으로 보면 그렇게 만만치 않다.
역사의 주체를 맑스처럼 계급으로 볼 수도 있고 1970년대 초반 이후 ‘시민사회론’에서 구상하는 것처럼 ‘개인 또는 시민사회’로 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민족이란 일정 시기에만 존재하는 가변적인 존재이며 민족자주의 가치도 현격히 떨어진다.
후자의 경우에는 민족 또는 민족주의란 일제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역사적 환경 하에서는 이해가 되지만 현재의 관점에서는 민감하거나 위험한 주제로 보는 듯 하다. 이러한 입장의 연장선에서 통일을 민족자주의 완성으로 보지 않고 남의 시민사회를 북으로 확장하는 문제로 보거나 한중일 사이의 역사 논쟁을 민족사이의 문제보다는 아예 동북아시아라는 ‘지역’의 관점에서 보자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 물론 동북아시아라는 지역 단위 역사의 주체는 한중일 또는 북까지 포함하는 국가와 민족 내부의 시민사회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역사에서 주체를 설정해야 한다는 시각 자체가 하나의 견해일 뿐이다. 가령 불교에서는 ‘인간 - 세계’라는 관계에서 인간이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변화.발전.개조의 관점보다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바꾸어야만 해탈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수준에 이르면 역사 이론이라기보다는 철학과 종교의 영역인데 역사 이론과 철학.종교도 모두 인간의 관념 체계의 일종이므로 이를 명확히 구분하기도 어렵다.
2)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문제는 대단히 여러 관점에서 논할 수 있다. 필자가 여기서 중심에 두었던 문제는, 첫째 선진 자본주의체제가 근대적 성과인 자본, 기술, 근대적 문물과 제도를 선점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근대적 성과의 주체는 자본가계급이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비서구사회는 위의 근대적 성과라는 점에서 뒤져 있었다는 점이고, 셋째는 비서구사회가 반제투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근대적 기준에 비하면 후진적인 요소를 민족이라는 이름 하에 강력히 통합했다는 점이며, 넷째는 그러한 후진적 요소로는 전통과 민중 그리고 사회주의가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세 번째, 네 번째 문제가 논란이 될 것이다. 아래에서는 이에 대해 언급해 보겠다.
근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전통이 해체되는 과정과 동일하게 민중이 분해된다. 영국의 인클로저 과정에서 농민으로 통칭되던 거대한 집단은 농토를 상실하고 도시 노동자, 빈민으로 전락하는 프롤레타리아층과 농토를 목초지로 바꾸는 과정에서 부를 독식하는 근대적 지주 계급으로 양분된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휘한 거대한 생산력의 주역은 민중 일반이 아니라 민중에서 분화된 근대적 지주, 산업자본가들이었다. 이 과정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과정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전통을 해체되고 민중이 분해되었다. 이것이 합리화, 근대화, 자본주의화의 본질이었다. 세계 전역에서 낙후하지만 평온했던 농촌 공동체가 분해 되는 과정은 생살을 뜯어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역사라는 것이 그다지 인간적 도덕적이 아닌 것을!’ 인간보다는 경제논리를 우선하는 냉혹한 자본의 논리를 어떤 사람들은 합리화, 근대화로 미화한 반면 맑스는 이러한 냉혹한 자본의 진행과정을 수용한 후 이를 사회주의와 결합시켰다. 맑스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냉혹한 자본의 논리에 의해 전통과 민중이 충분히 그리고 완전히 해체된 이후의 과제였다.
한편 반제, 민족해방 투쟁의 과정에서는 민족이라는 이름 하에 전통과 민중을 유지했다. 근대적 성과물이 취약했던 비서구사회에서 민중은 전통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고 충분히 분화되지 않은 한 덩어리로 묶여 있었다. 여기에 다시 유토피아적이고 도덕적 이념인 사회주의가 결합되었다.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의 붕괴 과정은 전통, 민중의 분화 과정에서 출현한 근대적 자본 계급의 생산력이 전통과 민중의 기반 위에서 수립된 사회주의보다 우월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이 현상을 앞에 두고 중국, 베트남과 북이 갈라지는데 중국, 베트남은 생산력을 확대하기 위해 전통과 민중을 해체하는 길로 접어든 반면 북은 전통과 민중적 지반을 사회주의와 결합시키는 전통적인 길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북이 위의 과정에서 동원했던 이념이 주체사상이고 이를 관철하는데 발휘했던 힘의 진원지가 민족과 민족주의였다.
북 현대사를 보면 농업협동화를 둘러 싼 흥미있는 논쟁이 나온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농업 사회의 변천은 ‘전근대 사회의 농촌 공동체 → 양극화, 산업화의 토대 마련’로 변화한다. 농촌공동체가 분화되면서 산업화의 토대가 되는 과정이 워낙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농촌 공동체의 양극화라는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농업협동화로 연결시키는 발상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레닌은 러시아 초기 ‘인민주의자’들의 이러한 생각을 맑스의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농촌 공동체의 해체가 불가피한 과정임을 역설했다. 이때 레닌이 동원했던 철학은 맑스의 유물론이다. 유물론에서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경제가 발전하는데 이에 따르면 ‘농촌공동체 → 양극화’는 필연의 수순으로 이를 거부하겠다는 발상은 순리를 거부하는 공상이었던 것이다.
반면 북은 인간의 조직화된 힘이 있으면 객관 조건이 구비되지 않더라도 ‘농촌 공동체 → 농업협동화’(중간에 토지 개혁과정을 잠깐 거쳤지만)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은 양극화라는 고통을 덜었지만 역사의 굴레를 체제 전체가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굴레를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이 다름 아닌 민족과 민족주의였다는 것이 본 글의 논지이다.
비서구사회가 독립 자주한 이후 이를 기반으로 추진했던 국유화, 수입대체공업화, 자력에 의한 산업화 등은 생산력의 견지에서 서구사회를 넘어서지 못했다. 즉 ‘전근대사회 → 식민지 반봉건(또는 半자본) → 사회주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북 유형의 사회주의는 서구 사회가 이룩한 생산력 수준을 따라서지 못했다.
거대 역사 이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역사 발전 단계가 도덕적 인간적이면서도 생산적인 체제라야 하는데 식민지 ‘반봉건 → 독립자주’한 이후 수립된 사회주의가 비생산적이었기 때문에 그 후진성만큼 역사적 한계를 체제 내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3) 민족과 자주의 문제
21세기 초반의 시점에서 민족과 자주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서론 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사 이론이 갖는 복잡성을 염두에 두고 민족 자주의 관점에서 여러 가지 관점을 개괄해 보자.
㉠ 세계사적으로 보면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의 제국주의-식민지 강점시기에서 독립자주를 목표로 한 민족해방 투쟁이 세계 전역에서 벌어지다가 1960~70년대를 계기로 이를 완성했다. 1970년대 이후 독립자주를 기초로 ‘자원의 국유화, 토착산업의 육성’ 등과 같은 민족적 시도가 좌절되고 다시금 외자 주도의 경제로 전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1970년대 이후 다시금 외자 주도의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는 민족과 자주라는 문제의식은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 북의 경우 1970년대 이후 주체사상과 민족주의를 고리로 이전 시기의 문제의식인 독립 자주의 근본적인(?) 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러 특이한 요소를 체제 내에 끌어안고 있다. 고도의 군사체제가 그런 것이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이러한 발상은 전세계적으로 폭넓게 용인되었다. 베트남은 독립자주를 위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희생을 감내했는데 베트남이 독립자주를 관철하는 과정에서 치렀던 여러 문제를 불필요했던 것, 기형.기이한 것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결국 이는 궁극적으로 제국주의가 무엇인가라는 역사적 평가와 연관되어 있다.
㉢ 남의 경우 세계사의 일반적인 흐름과 다소 다르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강점과 반일 투쟁은 세계사의 흐름과 유사하다면 분단 이후 60~70년대까지 전세계는 민족해방 투쟁의 여세를 몰아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경제적으로 국유화, 수입대체공업화와 같은 민족적 시도를 했지만 한국은 미국은 제국주의가 아닌 것으로 보고 민족 문제를 의제에서 제외했고 이의 연장선에서 경제적으로도 외자 주도의 경제 전략을 구사했다. 이는 세계사의 일반 흐름과 한국 내부의 일반 감정이 상당히 다른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치적으로 ‘친일 세력의 집권 - 경제적으로 일본과 유착 - 정서적으로는 강력한 반일 - 군사적으로 미국 주도의 한미일 동맹체제’라는 구도는 대단히 기이한 것이다. 정치경제적으로는 친일이면서 대중 정서는 반일이고 일본은 싫어하면서 미국에는 우호적인 태도는 민족적인 잣대로 보면 이율배반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1970년대 초반 이후 전후 세대가 민주화 국면을 주도하면서 민족 문제도 새로운 양상을 띠는데 간략히 개괄하면, 첫째 친일.친미 세력이 주도했던 산업화 세력과 1970년대 초반 이후 성장한 민주화 세력이 연합하자는 발상(이른바 산업화 세력+민주화 세력론), 둘째는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사고하면서 자본의 논리를 중심으로 민족문제를 포함시키려는 발상(삼성 등이 이럴 것이다), 셋째는 민족 대신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민족문제를 바라보려는 생각(시민단체나 노무현 정부의 일부) 등이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을 통해 언급하겠다.
① 원초적, 근본적, 비합리적
민족은 역사적 개념이다. 역사적 개념이란 의미는 사회역사 발전 과정의 특정 시기에 출현하여 사회역사발전 과정과 함께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논리적으로만 본다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민족은 사라질 수도 있다.
민족의 출현 시기에 대한 이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자본주의의 출현 과정에서,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다분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 즉 근대의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생각, 둘째는 언어와 혈통을 같이하는 느슨한 인간 공동체가 근대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정치 사회적 힘에 의해 민족으로 발전했다는 생각이다.
위 두 가지 견해 중 제도권 학계의 일반적인 생각은 전자인 듯 하다. 민족에 대한 정의를 엄밀하게 하기 시작하면 대단히 복잡해지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 보면 언어, 혈연, 문화를 공유하는 인간 집단을 의미한다. 우리 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언어와 혈통을 같이하는 인간 집단이 근대에 이르러서야 만들어졌다는 주장은 대단히 황당한 생각이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폭넓게 유포된 이유는 민족 이론 자체가 서구사회에서 수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서구에서 수입된 이론과 현실사이에서 나타난 명백한 괴리를 조정하기 위해 민족 이전의 어떤 단계를 가정하기도 한다. 이른바 준민족, 민족체 따위의 개념이 그것인데 이런 발상은 이론의 현실 적합성을 맞추기 위해 또다시 개념을 끌어 들인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이유는 제도권 지식인 사회의 “자기 정체성” 때문이다. 정체성의 뿌리가 “서구에서 수입된 이론”에 있었기 때문에(현실이 아니라) 이론이 무너지면 제도권 지식인 사회의 존립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이 세상을 객관적, 중립적으로 바라본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지식인들 또한 어떤 사회의 정치사회적 질서 안에 편입된 존재이므로 주류 질서와 일정한 갈등 관계를 갖고 있다.
더욱 위험한 것은 지식인은 경험적, 상식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개념적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잣대가 무너지면 세상 자체가 기묘하게 보이게 된다. 우리 민족이 근대에 와서야 형성되었다는 “기이한” 주장을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는 것도 위와 같은 착시 현상 때문이다.
민족 형성의 시점은 민족의식의 공고함 정도와 관련되어 있다. 만약 민족이 자본주의 형성기에 민족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근대의 산물이라면 민족의식은 견고함이 현격히 떨어지는 인간의 여러 관념의 하나일 뿐이다. 또한 그것은 보다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다른 관념에 의해 쉽사리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민족의 시원이 대단히 오랜 것이라면 민족의식은 대단히 공고할 것이고 다른 관념에 의해 쉽사리 대체될 수 없다.
인류 역사는 인간이 자연에 대한 개입력을 확대해 온 과정이다. 따라서 초기 인류 역사는 자연 지리적 요소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원시 인간 무리는 그 무리가 정주했던 자연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발전했다. 강 하류의 농경 지역, 열대우림지역, 사막지역, 혹한 지대에 거주하는 원시 인간 무리는 해당 지역의 특성에 맞게 독특하게 발전해 왔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 문화이고 해당 지역의 자연 환경의 특성에 맞게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며 발전해 온 인간 집단 즉 문화의 주체가 민족이다.
그리고 문화의 핵심 요소가 바로 언어이다. 따라서 민족문화, 민족의식은 대단히 원초적이고 본능적이며 근본적인 것이다. 민족과 민족의식 속에는 고향, 대지,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 애향심, 애국심과 같은 감정이 강렬하게 결합되어 있다.
근대로 접어들어 자연에 대한 개입력이 비약적으로 강화되면서 인간 집단이 자연환경과 결합되어 유지되었던 원초적이고 시원적인 결합관계도 대단히 느슨해지고 있다. 인류의 과학기술 발전은 유전자를 통제하고 인간의 감정 자체를 생리적으로 조절하며 사이버 공간을 현실화할 정도로 발전했지만 이것은 최근의 일이거나 혹은 미래의 일이다.
인류 역사의 전 과정을(주1) ‘대단히 장구한 원시 인간 무리 → 1만 년 전쯤 시작된 인류 문명 단계’로 크게 구분했을 때 민족은 적어도 인류 문명 단계 전체와 연관된 문제이다.
민족의식의 뿌리가 이처럼 깊기 때문에 민족의식은 때때로 대단히 비합리적으로 반응할 때가 있다. 심지어는 민족의식을 대체하고자 하는 다른 관념 체계가 객관적으로 합리적, 진보적이라고 해도 그렇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회제도에 비해 사회의식의 변화가 느리다는 현상과도 일치한다. 사회제도에 비해 변화가 느린 사회의식 중에서도 민족과 결합된 의식은 특히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의식을 다룸에 있어 중요한 것은 “누가” 또는 주체의 문제이다. 즉 민족 자신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면 객관적으로는 진보적이고 우수한 것이라고 해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상투를 자르겠다는 일제의 정책은 “전통”이냐 “근대”냐의 관점에서 평가된 것이 아니라 민족적인 잣대로 재구성되어 수용되었다.
조선 민중의 입장에서 상투와 단발의 문제는 위생이나 생활의 편리함의 관점에서 사고된 것이 아니라 조선 민족과 일제라는 주체와 주체 사이의 문제 즉 침략과 자주의 문제로 해석된 것이다. 이때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상투라는 전근대적 비합리적 전통을 지탱시켰던 힘의 원천으로 작동했다.(예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필자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전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으리라 본다)
물론 일반적으로도 어떤 개인 또는 인간집단이 사물 또는 정책을 단순히 합리화라는 관점에서 사고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의 경우에는 그런 경향이 유달리 강하다고 볼 수 있다.
② 민족이라는 주체와 근대화라는 관점
서구사회가 비서구사회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들이 내민 잣대는 주로 합리화, 수량화와 같은 양적인 지표이다. 서론에서 지적한 바에 따르면 생산력 발전에 유리한가의 문제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모든 문제는 단선적인 발전 과정에서 선진적인 것과 후진적인 것으로 서열화될 뿐 양자 사이의 질적 차이와 주체의 문제가 사라진다.
위에서 언급한 상투와 단발의 문제도 상투하는 것 또는 단발하는 것이 위생이나, 생활의 편리함이란 관점에서 더 나은가하는 양적인 문제와 함께 누가 제기하는가하는 주체의 문제가 결합되어 있다. 단발이 일제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조선 민중의 주체적인 결단에 의해, 하다못해 조선 지배층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저항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상투와 단발의 문제를 보는 감성적인 측면이 아니다. 어떤 사물, 정책을 평가함에 있어 본질적으로 주체의 문제가 결합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조선민족인가 일제인가 하는 주체와 상투인가 단발인가 하는 정책에 대한 판단은 상호 결합되어 있다. 즉 일제라는 주체의 내적 요구에 의해 단발이라는 정책이 나온 것이다. 일제라는 주체를 빼버리면 “단발”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구체성과 현실성을 잃어버리고 대단히 공허해진다.
비슷한 사례가 자유무역과 보호주의의 관계이다. 아담스미스나 리카도류의 자유주의, 비교우위론에 대항하는 독일 리스트의 유치산업보호론이 세를 얻은 것은 건국 초기의 미국이었다. 미국에서 보호무역주의, 사회경제사와 같은 진보적인 학풍이 사라지고 자유주의, 수량 경제학이 득세한 것은 미국 산업계가 충분한 국제 경쟁력을 가진 다음인데 이러한 정책 변화를 강제한 것은 미국의 산업자본가들이다.
이 경우에도 미국의 산업자본가들이라는 주체의 요구에 의해 미국의 무역 정책이 시기시기마다 어떻게 변화해 나갔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주2)
역사나 사회라는 것 자체가 살아있는 구체적인 인간이 없이는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사의 견지에서 보면 민족이라는 확연한 역사적 실체가 있고 이 실체가 일제에 대항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단발과 상투, 토지조사사업 따위를 어떻게 평가하고 대처할 것인가 하는 대응이 나오게 된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은 민족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거세하고 근대화, 경제성장의 양적 지표를 거론한다는 점에서 방법론 자체가 제국주의적이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뿌리 끝까지 밀고 나가면 결국에 가서는 일제의 조선 강점 전체를 합법화하게 된다. 상투보다 단발이 좋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사적 소유권을 명확히 하는 것이 보다 근대적이라면 순차적으로 언어와 정치권력의 통합까지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역사와 사회를 대하는 관점, 방법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역사를 ‘아(我)와 비아’로 명확히 놓고 민족 독립을 염원했던 신채호의 역사관이 시공을 초월하여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민족사의 견지에서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역사적 시기라면 위와 같은 논리가 대체로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거대한 것이다. 역사와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를 민족으로 두는 것도 하나의 사관이다. 계급, 개인 또는 시민 그것도 아니라 아예 ‘지역’으로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고 침략과 자주의 문제가 민감하게 부상하는 역사적 환경을 벗어나면 모든 문제를 민족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③ 민족의 역동성
①에서 지적했던 것은 역사와 사회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인간 중에서 특별히 민족이 갖는 특징을 말한 것이다. 단발령이 다른 여타 사안에 비해 폭발력을 가졌던 이유는 민족의식이 갖는 본초적이고 근본적인 속성 때문이다. 그리고 그 폭발력은 엄청난 위력과 생산력을 발휘했던 제국주의와 맞설 정도로 강력했다.
심지어는 민족의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후진적인 전통이라도 고수하도록 했다 민족이 갖는 특징에 비추어 압도적으로 우선된 것은 민족의 존엄과 자주였고 근대와 전통의 문제는 민족의 자주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나오는 다음 과제였다.
이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 베트남류의 민족해방투쟁이다. 중국과 베트남은 민족 독립을 이룩할 때까지 정치구조의 견지에서 또 계급적, 이념적, 운동적으로 극한에 이르는 수준까지 급진화 되었다가 1970년대를 계기로 근대의 개념을 수용한다. 마오나 호치민 주석이 갖고 있었던 기본 정서는 공산주의보다는 민족주의였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민족이 발휘한 유별난 강인함은 동아시아뿐 만아니라 세계 모든 지역에서 공히 발생했고 이 도도한 물결이 1960~70년대 민족자주, 독립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민족의 자주를 위해 민족 내부의 자원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배태되었던 문제를 몇 가지로 나누어 서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정치구조는 일원적이고 통합적인 원리를 취한다. 중국, 베트남 모두 마오와 호지민이라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영도자의 지휘 아래 공산당 또는 노동당과 같은 일사분란한 조직형태를 취하는데 이는 서구 민주주의가 표방하는 다원적인 정치원리와는 다른 것이다.(주3)
계급적으로 보면 ‘전통사회의 지배계급 → 신흥 관료 또는 인텔리 → 민중’으로 이전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의 이념적 지반도 계급적 성격을 강화한다. 초기에는 민족주의에 서구 민주주의를 취하는 형태이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것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김구와 같은 우파 성향의 지도자들의 강령,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좌파적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운동적으로도 초기에는 청원이나 계몽과 같은 형태를 취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게릴라전, 민중항쟁, 무장투쟁의 양상으로 발전한다. 중국의 대장정이나 베트남의 장기간에 걸친 반제 항쟁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강인하고 완강한 것이었는데 ‘민중+민족주의’가 결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운동 양상은 오히려 일반적인 것이다.
1960~70년대를 계기로 비서구사회는 대부분 독립했다. 이 과정에서 민족은 강대한 제국주의를 격파하기 위해 민족 내부의 미발달된 요소 즉 전통, 민중을 광범위하게 동원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요소는 사회주의라는 도덕적, 유토피아적 요소와 강하게 결합되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독립과 자주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사회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걸맞는 자연스러운 체제라기보다는 인위적이고 도덕적인 이상이었고, 반제투쟁 과정에서 동원했던 전통과 민중적 요소는 독립과 자주한 이후 민족 사회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한계를 노정했다.
과학기술, 자본은 여전히 서방 선진국에 있었고(주4) 민족적이고 자주적인 정치세력에 대한 미국의 압박은 계속되었다. 중국과 베트남은 제국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독립과 자주를 위해 결합시켰던 여러 요소 중 민족자주독립의 정치적 주체인 공산당 영도만 두고 여타의 요소들을 “해빙”한 것이다. 반면 북은 반제 투쟁 과정에서 결합시켰던 요소들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는 또 한번 갈라진다. 1960~70년대의 독립 자주의 거대한 물결이 세계 전역을 휩쓴 이후 독립자주를 획득한 신생 독립국의 다수는 ‘독립자주’ 하는 과정에서 동원했던 민중적, 이념적, 도덕적 자원보다는 현실적으로 우세한 서방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이것이 중국, 베트남류의 개혁개방 또는 라틴아메리카, 동유럽, 아프리카, 이슬람 사회를 석권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이다.
반면 일부의 나라, 북, 쿠바 최근에는 베네주엘라 등지에서는 독립자주하는 과정에서 동원했던 민중적, 이념적 요소를 강화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위의 두 가지 방향 중 후자의 방향 특히 북에 대해 평가해 보자.
필자가 보기에 북의 정치체제를 비판하는 견해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서구민주주의의 잣대를 가지고 주로 혁명적 수령관, 일당체제를 비판하고 그러한 정치체제가 기형적이고 전근대적이며 비합리적인 특성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 하다.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있는 것, 고도의 군사체제, 세계화된 주류 질서와 대립하는 민족적 요소의 강조 등이 그러하다. 전근대적 전통의 강한 온존 문제는 그러한 각각의 요소를 하나로 통합해내는 역동성이다. 반제라는 목표 하에 여러 가지 요소를 통합해낼 수 있었던 역사적 실체가 민족과 민족주의이고 그것을 실현한 것은 북의 강점이지 약점이 아니다.
자원과 역량이 취약한 나라가 근대, 합리화라는 잣대를 가지고 이것저것 떼어내다 보면 남는 것이 없게 된다. 따라서 북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이 공정하려면 반제라는 목표의 정당성부터 문제삼아야한다. 대부분의 제도권 학자들의 경우 반제 즉 반미라는 핵심을 빼버리고 반미의 기치 아래 중간 규모의 국가가 동원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기형적 요소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북의 역사인식에서 특별히 중요한 대복은 북의 경우 ‘제국주의-식민지’라는 관계가 여전히 온존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선차적이고 본질적인 것은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자주라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하에서는 민족자주가 지고지순의 절대가치이고 이 과제를 수행하는데서 비롯되는 부정적인 요소는 감내해야할 문제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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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대단히 오랜 기간의 원시 인간 무리 → 1만년 전 쯤 시작된 문명 단계 → 고도 산업.정보화 사회’로 구분하면, 첫째 단계는 수백만년 또는 수십만년에 이르고 둘째 단계는 1만년 내외이며 셋째 단계는 17세기또는 18세기 이후의 수백년 정도이다. 그 만큼 역사발전의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첫 번째 단계의 인류의 관념 체계를 설명할 수 있는 유용한 이론은 심리학자 ‘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이 아닐까 싶다. 가령 인간의 눈이 초록색을 편하게 느끼는 것은 조물주로부터 원래부터 주어진 선천적인 특성이 아니라 식물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서이다. 초록색은 태양을 에너지원으로 하는 식물의 광합성 작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류가 빛, 태양, 밝음을 선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보고 어둠, 지하를 악한 것,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인식 체계도 원시 인간 무리가 수백만년 또는 수십만년간 살아 왔던 자연 환경에 대한 의식이 자연스럽게 내면화된 것이다. 원시신앙, 신화 또는 종교에서 선과 악을 빛과 어둠, 하늘과 지하로 대치시키는 관념이 보편화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원시 인간 무리의 오랜 생활 조건이 빛, 태양, 밝음, 하늘 그리고 이들 모두를 간명하게 대변하는 조물주로 집약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첫 번째 단계에 비해 인류의 생활 조건이 보다 발전했다. 이 시기가 되면 농경과 유목이 중심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자연 전체가 불가항력적인 거대한 실체였다면 두 번째 단계가 되면 자연 환경 중 어떤 특별한 조건은 유리하고 다른 조건은 불리했다. 가령 농사에 유리한 환경, 양떼가 잘 자랄 수 있는 목초지 등이 그것인데 이로부터 구체적인 자연 환경에 대한 애정이 자연스럽게 자라났을 것이다. 이 단계의 표상이 대지, 다산(多産), 어머니 등일 것이고 이러한 표상은 고향, 민족과 잘 어울린다.
세 번째 단계는 자연으로부터의 구속력이 극적으로 해체되는 고도 산업.정보화 사회이다. 영화 매트릭스 등에 나오는 가상공간 등에는 아예 자연 자체가 누락되어 있다. 이 단계에서 인류의 관념 자체가 어떻게 변할지는 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문제이므로 생략한다.
(2) 이 부분은 장하준 교수의 저작, 신문 기고문 등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장하준 교수는 경제학에서 역사적 관점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역사적 관점이란 모든 경제적 문제는 어떤 역사적 시기에,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가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환경과 결부지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에서 역사와 주체를 제거하면 초역사적인 일반 이론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계량 경제학이다. 온통 수식과 그래프로 치장된 계량 경제학의 본질은 경제학의 신비화를 통해 미국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이다. 경제학뿐만 아니라 모든 인문사회과학에서도 역사와 주체의 문제는 학문의 당파성과 진보성을 가름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3) 일반적으로 역사의 주체를 민족과 같은 집단적인 존재로 놓고 민족의 통일 또는 자주와 같은 역동적인 역사 과정을 상정하게 되면 통합적이고 일원적인 정치원리는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령 독일, 이탈리아 통일과정은 비스마르크나 카브르(또는 가리발디)의 이름과 연관되어 있고 반제 투쟁 과정은 중국의 마오, 베트남의 호치민, 쿠바의 카스트로, 인도의 간디, 유고의 티토 등처럼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건국 지도자와 관련된다. 신채호의 민족사관이 ‘영웅’사관과 맥을 같이하는 것도 동일한 맥락일 것이다.
(4) 서방 선진국의 생산력은 전체 국민 또는 시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민간대기업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대중적이라기보다는 엘리트적인 체제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가 대중적인 체제로 인식되는 이유는 자본가 계급이 부의 분배를 통해 하층 계급을 위로부터 통합시켰기 때문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주장에서 특징적인 것은 우수한 몇 사람이 한국사회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기술과 지식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민족사관고, 평준화 폐지론 따위도 모두 비슷한 발상인데 민주주의라는 대중적 체제 밑에 숨쉬고 있었던 엘리트주의가 자본주의체제가 발전하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