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마오쩌둥의 지론이었다고 합니다. 마오쩌둥이 아니라고 해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누구의 말이든 분명한 사실은 군대만큼 권력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힘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당, 인민위원회, 대중동원…. 이것으로 북한의 국가 건설 기반은 잘 정비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군대였습니다. 국가가 국가로서 제대로 구실하자면 국가를 보위할 무장력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점에서 군대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징표 가운데 하나인지도 모릅니다.

인민군대 창건 작업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유격대 출신들이 가장 중점을 둔 분야였습니다.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은 초기부터 무장력을 장악하는데 무엇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마지막까지 군대와 총대를 중시하는 자세를 견지합니다. 군대가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이 북한에서 권력을 확고히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45년 10월 12일 소련군 제25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해방 후 자생적으로 생겨난 치안대, 자위대, 적위대와 같은 조직들이 해산되고, 새로이 보안대가 조직됩니다. 그해 10월 21일 진남포에서 공산주의 사상이 투철한 기본계급 출신 2천명을 선발하여 `보안대`가 처음으로 창설되고 각 도에서 `도 보안대`가 조직됩니다. 보안대는 김일성의 정권 장악과 정규 무장력 구축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1946년 1월 11일에는 소련군이 철도 경비를 위해 조직했던 철도경비대를 철도보안대로 개칭하였으며, 그해 7월에는 각도에 설치된 철도보안대를 통합하여 `북조선철도경비대`로 개편합니다. 한편 1946년 중반 38선 경비를 위해 `38경비보안대`가 조직되었으며, 국공내전 중인 중국국경 수비를 위해 `국경경비보안대`가 조직되었습니다.  

북한 건군을 말할 때 그 초석이 되었던 `평양학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김일성은 1945년 11월 17일 현대적 정규군대를 창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간부가 필요하므로 학원을 창설하고 여기에서 현대적 정규무력의 골간이 될 군사·정치 간부들 키우라고 했고, 그에 따라 준비에 들어가 1946년 1월 3일 정식으로 개교했습니다.

평양 학원은 처음에는 4개월의 단기 코스로 출발했고, 정치반과 군사반을 두었습니다. 정치반은 북조선공산당 중앙당학교로, 군사반은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로 분화 발전됨으로써 북한 정치·군사 분야의 새로운 간부을 양성하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평양학원 출신자들은 이후 북한 인민군의 핵심이 되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항일유격대 출신들이 핵심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초대 평양학원 원장은 항일빨치산 출신의 김책이 맡았고, 김일성은 명예원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평양학원 창설을 주도한 것은 역시 안길과 정치부교장 조정철, 교무주임 심태산, 김증동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항일빨치산 출신이었지요. 거기다가 김일성의 부관이었던 주도일, 김일성 유격대에서 의료를 담당했던 군의 출신의 류한종, 북만 유격대 출신의 최용진 등이 모두 평양학원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조카 김원주와 그의 부인, 외삼촌 강용석, 할머니 리보익의 조카 김병렬을 비롯한 일가친척들을 대거 평양학원 1기로 입학시켰습니다. 평양학원 출신으로는 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인민무력부장인 김일철을 비롯, 노동당 중앙위원(1984년)의 강석숭, 평양시당 책임비서와 노동당 중앙위원(1970년)의 강현수, 정무원 부총리(1981년) 홍시학 등이 있고, 남로당에서 반 박헌영의 선봉에 섰으며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에서 전사한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도 평양학원을 거쳤습니다.(김광운, 앞의 논문, 274∼275쪽)

1946년 5월부터 북한의 무장력이 보안대 수준에서 군조직의 형태로 본격적으로 바뀌면서 정규군 창건을 위한 2단계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도 미소관계와 남북관계를 고려하면서 정규군 창설준비를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첫 시도로 1946년 6월 평남 개천에 보안간부훈련소를 설치해 보안대원의 모집과 훈련을 담당합니다. 이어 신의주에 보안간부훈련소 제1소, 나남에 제2소, 강계에 제3소를 각각 설치 운영하였습니다.

1946년 7월 8일 평양학원 군사반과 보안간부훈련소를 통합해 군 초급간부 양성기관인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를 강서군에 엽니다. 이 학교는 항일유격대 출신 30여명과 평양학원 단기수료생 10여명이 핵심 창설멤버가 되었습니다. 이 중앙보안간부학교는 1948년 12월 평양으로 이동하면서 제1군관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50년 10월에는 다시 강건종합군관학교로 개칭돼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중앙보안간부학교의 정원은 500명이었고, 수업기간은 12개월이었습니다. 입학 자격은 각급 인민위의 추천을 받은 신체 건강한 30세 이하의 자로서 중등학교 1학년 수료 이상의 학력자로 제한되었습니다. 중앙보안간부학교는 보병·포병·통신병·공병을 비롯한 다양한 병종의 지휘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북한 정규군 창설의 속도를 더해주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 중·하급 장교의 거의 대부분이 이 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중앙보안간부학교가 문을 연 1946년 7월 8일 정규군 창설을 위한 준비회의가 열렸고, 8월 10일에는 김일성·김책·안길·강건·최용건·최춘국·박영순·오백룡·무정·박일우 등이 회동해 군 창건 준비를 결정합니다. 여기에 참석한 대다수는 항일빨치산 출신이었음을 볼 때 이들이 얼마나 군사 부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지요.

1946년 8월 15일 무장력을 통합하여 지휘할 기구로 `보안간부훈련대대부`를 설치합니다. 실제로는 정규군으로 가는 첫 걸음이었습니다. 다만 외형상 그렇게 포장을 한 것일 뿐이지요. 사령관 최용건, 부사령관 겸 문화부사령관 김일, 포병부사령관 무정, 총참모장 안길, 후방부사령관 최홍극, 작전부장 유신, 간부부장 이림, 통신부장 박영순, 통신부부장 이청송, 공병부장 황호림, 공병부부장 박길남, 정찰부장 최원 등이었습니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창설을 주도한 것은 김책이었으며, 항일빨치산 출신으로는 최용건, 김일, 안길, 박영순 등이 요직을 맡습니다.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계열은 정규무력을 장악하기 위해 새로운 역량들을 대거 투입합니다. 김일성은 보안간부훈련소 제1소 문화부소장에 서철을 임명했고, 1946년 초 가을에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최광을 소환해 참모장에 임명했습니다. 최광은 중국에서 귀환할 때 200명 가량의 인원을 선발해 북한에 함께 들어옵니다. 간부훈련소 제2소 소장은 강건이 맡았고, 최용진은 제5분소를 지휘합니다.

이렇게 정규군을 창설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한 결과 병력이 급격히 늘어납니다. 보안간부훈련소가 신병을 대거 모집하여 각 지역별로 사단 및 여단으로 확장되면서 북한 정규군의 원형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북한에서 군 창설의 세 번째 단계에 들어서는 것은 1947년 5월입니다. 1947년 5월 17일 보안간부훈련대대부를 북조선인민집단군사령부로 개칭해 모든 물리력을 하나로 통합했던 것입니다.

이와 함께 계급제를 도입하며 예하 각 부대에도 부대 고유명칭을 부여합니다. 이로써 군관과 하전사가 구별되었고, 군관계급은 14계급으로 구분됩니다. 14계급은 원수·차수·대장·상장·중장·소장·대좌·상좌·중좌·소좌·대위·상위·중위·소위 등이었습니다.

`인민집단군`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그 산하에는 개천의 훈련제1분소는 경보병 제1사단으로, 나남의 훈련제1분소는 경보병 제2사단으로, 원산의 훈련 제3분소는 제3혼성여단으로, 경비대는 경비연대로 개칭되었습니다. 북한의 무력은 1947년 말에는 6∼7개 사단으로 확대되면서 2개 집단군으로 확대 재편됩니다. 

해를 넘긴 1948년 2월 4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제58차 회의는 군을 통제하기 위해 `민족보위국`을 신설하고 초대 보위국장에 김책을 임명합니다. `혁명무력`으로서의 조선인민군이 창군을 공식 선포한 것은 1948년 2월 8일입니다. 조선인민군 초대 사령관에는 최용건이 임명되었습니다.

이로써 정부수립 준비는 사실상 끝났습니다. 이제 그것을 공식화하는 과정이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북한은 정규군을 창설함으로써 국가 건설의 마지막 방점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에서는 새로운 국가 건설이겠지만 한반도 전체로 볼 때는 남한의 국가 건설과 더불어 새로운 두 개의 분단 정부가 탄생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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