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뉴스는 지난 20년 가까이 통일운동 현장의 일선에서 뛰어온 민경우 통일연대 전사무처장이 직접 쓴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를 연재한다. 이 연재물은 민경우 처장이 옥중에서 작성한 원고를 '옥중기고' 하는 방식으로 게재된다. 민경우 씨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범민련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범민련 공동사무국 박용 부총장에게 8.15 통일대축전 행사와 통일연대 결성 등의 '국가기밀'을 수집 전달했다"는 이유 등으로 지난 2003년 12월 1일 전격 연행된 후 3년 6월형이 확정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2005년 4월 11일 전주교도소로 이감됐다. 민경우 전 처장의 새로운 주소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 3가 99 전북 전주우체국 사서함 72호 전주교도소'이며 수인번호는 2500번이다.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는 매주 월요일에 연재된다. - 편집자 주 |
필자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86~88년 무렵이다. 통일 문제에는 상대가 있었던 만큼 자연스럽게 북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요즈음에는 많아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북에 대한 자료 자체가 귀했다.
1991~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가 그랬다. 플루토늄이니 NPT(핵확산금지조약)니 하는 용어 자체도 생소했지만 신문기사 자체가 비전문인이 이해하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 전쟁 위기 어쩌고 하다가 북미제네바 합의가 체결되면서 1차 북핵 위기가 마무리되었다.
필자와 같은 일선 운동가들로써는 “어어”하다 끝난 셈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고 나름대로 경험이 쌓이면서 남북관계, 북미관계에 어떤 유형, 특징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 글에서는 필자가 경험을 통해 느낀 북의 통일, 외교 정책의 특징에 대해 지적해 보려고 한다.
① 투명성
북의 협상 태도와 기조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대단히 투명하다. 투명하다는 것은 북의 공식 문서를 보면 북이 말하고자 하는 바,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는 지를 대체로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가령 통일 정책의 경우 매년 초에 발표되는 (정부)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문서, 북미관계의 경우 외무성의 성명만 주의 깊게 보면 북이 원하는 바, 하고자 하는 바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위의 사실은 북의 체제 특성상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다. 북은 당 우위의 통합적이고 일원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평가와 계획이 대단히 치밀하고 정교하게 짜여진다. 따라서 남북관계, 북미관계, 북중관계 등 여러 방면의 대화와 협상이 하나의 중심에서 일관된 기조에 따라 움직인다. 또한 그것은 애초에 설정했던 기조, 계획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위와 같은 특성은 남이나 서방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남이나 서방의 경우 사회체제, 권력 구조가 다원화되어 있기 때문에 부처간 조율과정이 복잡하게 이루어진다. 여기에 주변국과의 관계, 여론 동향도 살펴야 하는 만큼 어떤 정책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는 수많은 변수가 따른다. 따라서 통일부가 어떤 정책을 발표했다고 해서 그것이 실행될 것이라고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정책 조율 과정에서 조정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북과 남.서방의 통일.외교 정책의 투명도를 좌우하는 또 다른 척도는 대중과의 관계이다. 북의 경우 정책 입안자와 대중 사이의 신임도가 높기 때문에 정책 입안자가 대중에 대한 염려 없이 “자유롭게” 정책을 구사하는 데 반해 남이나 서방의 경우 여론에 좌우되는 경향이 크다. 남의 경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북 강경노선이 인기였다. 따라서 사실에 대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접근보다는 여론몰이식 선동이 세를 얻었다.
반면 최근에는 대북 화해노선이 주류가 되면서 극단적인 대북 강경노선은 여론으로부터 고립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에 비하면 너무 느리고 완만하다. 이전 시기 남의 정책 입안자들은 정세와 여론 사이에서 소모적인 줄타기를 했다. 남의 여론이 느리기는 하지만 합리적인 수준으로 조정되었다면 미국과 일본의 경우 사회전체가 보수반동화하면서 정세와 여론 사이의 괴리가 커지고 있다.
투명도가 가장 낮은 것은 오히려 미국이다. 그것은 먼저 미국의 지위 때문이다. 미국은 빈번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약속을 어긴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미국이 하는 약속 위반은 국제 사회에서 별로 문제를 삼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북의 경우 국제 사회의 지지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문구 하나하나에 세심한 배려를 하는 편이다. 따라서 국제 사회에서 북을 성토하더라도 막상 법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별 문제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국이 투명도가 낮은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의 경우 외교를 다분히 공작적인 수준에서 진행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세계를 경영하는 초강대국의 입장에서 여론을 통제하고 조정하며 이해가 각축하는 제 세력을 규합 또는 분열시키는데 유능하다.
필자가 보기에는 미국의 진짜 핵심부가 생각하고 목표하는 바와 미국의 정책을 대외적으로 대변하고 표방하는 고위 관리들의 입장과 언술은 일상적으로 다르다. 더구나 미국은 국제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몰아갈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가는 큰 코를 다치기 십상이다. 이라크 침공의 원인이 되었던 대량살상무기 문제도 워낙 여론이 나빴기 때문이지 예전 같았으면 대충 넘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② 협상 방식
북의 공식 문서가 투명도가 높음에도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입관, 편견 그리고 국가보안법 때문일 수 있지만 현실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것은 북 특유의 협상 방식이다.
㉠ 미국의 입장에서 가장 난감한 것은 아마도 북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다는 점일 것이다.
북은 장기간 대북 정보를 철저하게 통제.은폐해 왔다.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해야 하는 북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2003년 3월 2차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손쉽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정보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 정보요원들이 주요 군사시설, 요인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고 미국의 정규군은 그렇게 사전에 집적된 정보를 길잡이 삼아 이라크 영토 안으로 손쉽게 진입할 수 있었다. 특히 국제기구나 중립을 표방하는 사회단체도 결과적으로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IAEA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구호.의료단체의 선의의 활동조차도 해당 단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국 정보기관의 자료철에 축적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축적된 자료는 당연히 미국의 협상력을 강화한다.
반면 북미 협상에서 북의 강점은 미국의 대북 정보 자체가 너무 없다는 사실이다. 북은 그러한 “폐쇄성”을 바탕으로 협상의 시기, 내용을 조절.통제해 왔다. 북과 같은 중간 규모의 국가가 미국을 상대로 대등한 협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분히 북 정보의 그러한 은폐성 때문이다.
위와 같은 현상이 일반인에게는 당연히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필자가 그랬던 것처럼 일반 국민들도 북의 폐쇄성이 일종의 협상 전술임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과거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이미지는 호색한, 영화광 무능한 왕위 세습자 등등이었다. 필자는 전에도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다만 김정일 위원장이 외교 무대에 나서지 않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대인기피증과 같은 어떤 결함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이후 북의 전방위 외교는 놀라웠다. 그리고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풀리코프스키 러시아 극동연방지구 전권대사 (2001년 김 위원장의 방러 수행), 고이즈미 총리 등이 전하는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평가는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이전 시기 그렇게 장기간 외교 무대에 나서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가 추정하기에는 그러한 “은폐” 자체가 고도의 정치력인 듯 하다. 결국 남이나 서방은 북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 그렇다면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다. 북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대북 정보를 체계적으로 은폐해 왔는데 이러한 모습이 일반적으로는 불투명하고 폐쇄적인 것으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98년 가을 금창리 사태라는 것이 있었다. 북이 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어기고 평양 서북방 금창리에 지하 핵시설을 건설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것 때문에 98년 가을에서 99년 상반기까지 한반도는 한바탕 전쟁 공포에 시달렸다. 그런데 99년 5월 미국 방문단이 금창리에 가보니 그냥 텅빈 동굴이었다. 이 대가로 미국은 식량 60만톤을 북에 주었다.
세계 최첨단을 자랑하는 미국의 정보력이라는 것이 어떤 수준인가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미국의 대북 정보력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취약했던 것이다. 98년에 그랬다면 7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그 정도라면 미국의 정보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남이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다.
㉡ 북 협상 방식의 또 다른 특징은 파격.변칙.주도권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북은 협상과정에서 빈번하게 약속을 위반한다. 남이나 서방의 경우 가령 1차 회담에서 2차 회담의 시간과 의제를 미리 확정하고 별 일 없으면 이를 지키는 것이 상식이다. 반면 북은 이를 가볍게 무시한다. 이것은 국제관례에 어두운 비신사적인 행동일 수 있지만 자신이 유리한 시간, 상황에서 주도권을 갖고 협상을 이끌려는 일종의 전술이다.
북은 시간과 의제뿐만 아니라 발언 수위, 성명서의 기조도 국제관례와 대단히 다르다. 북에서 발표한 성명서는 살벌하고 호전적인 경우가 많다. 국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점잖은 외교적 수사 따위는 잘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뒤돌아 놓고 보면 이 또한 북 특유의 외교적 수사인 경우가 많다. 위에서 예로 든 98년 금창리 사태 당시에도 그랬는데 북에서 발표한 성명서에는 “쓸어버리겠다”느니 “날려 버리겠다”느니 하는 살벌한 용어로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날 뿐이다. “텅빈 동굴”을 보는 방문료의 액수를 키우기 위한 바람잡이 같은 것이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남과 서방과 비교하여 사물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북의 협상 방식이 이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요 회담은 의제가 미리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북은 이런 식의 회담에 대단히 능한 듯 하다.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 남북 관계의 경우 7.4 공동성명, 6.15 공동선언 등이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의제를 두고 정치 지도자들 간의 전격적인 합의로 타결되었다. 북미, 북일 관계의 경우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방북, 2002년 9.17 북일 정상회담 등이 유사했다.
많은 경우 체류일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백화원 초대소”를 불시에 방문한 김정일 위원장과의 급작스러운 회담이 벌어지곤 한다. 따라서 회담은 대체로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시작되어 어느 순간 극적으로 타결되는데 이것은 애초에 상황이 불투명했던 것이 아니라 일종의 협상 전술이다.
북의 입장에서 보면 살벌한 언사로 분위기를 잡고 상대방이 예측할 수 없는 시점에서 전격적으로 협상을 타결하여 유리한 결과를 얻곤 했다. 북의 협상 자원이 열악했던 것에 비하면 협상 전술에서 득을 많이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만 첨부한다. 98년 하반기 금창리 사태 당시 필자는 감옥에 있었다. 신문에서는 금창리 문제로 난리였고 한총련 학생들은 전쟁 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고도의 협상기술, 심리전이었다는 생각이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 정치가들은 흔히 대외적으로는 강경 발언을 하면서도 이면에서는 협상을 하곤 하는데 98년 하반기에도 그랬다.
북이야 “텅빈 동굴”을 두고 허풍을 치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랬고 클린턴 행정부의 태도도 유사했다. 의회에서는 대통령을 탄핵한다고 난리였고, 공화당 강경파는 금창리로 건수 잡았다고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의 전폭기는 이라크를 폭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페리 전 국방장관이 대북정책 조정관에 임명되면서(11/23)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98년 하반기는 전쟁 국면이 아니라 북미 타협 국면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 북의 협상 방식의 또 다른 특징은 정교함이다.
남북, 북미 합의 문건이나 북의 공식 성명 등을 보면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독특한 표현이 적지 않다. 6.15 선언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96년 2월의 잠정협정 등이 그것이다. 93년 3.11 NPT를 탈퇴한 후 6.2~6.11 북미 1차 고위급 회담 이후 북이 NPT에 복귀하면서 NPT 탈퇴를 “일시 유보”한다고 밝힌 점도 그렇다.
연합제면 연합제이고, 연방제면 연방제지 낮은 단계의 연방제란 무엇인가? 비슷한 맥락에서 정전협정이나 평화협정이 아닌 잠정협정이란 무엇인가? NPT에 탈퇴했다 북미 협상을 통해서 NPT에 복귀하면 그만이지 “일시 유보”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남북 정상회담 당시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신개념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면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NPT에 복귀한 것이 아니라 NPT 탈퇴를 일시 유보함으로써 94년 북핵 위기 당시 북은 이른바 “특수 지위”를 내세워 IAEA 사찰을 제한하고 상황을 북미관계로 몰아 갈 수 있었다.
물론 일시 유보, 특수 지위 따위의 주장은 억지이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틀린 것은 없다.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구사하는 일종의 정교한 협상전술이다. 이런 점이 북의 장기이다. 함정이 있는 듯한데 딱히 흠잡을 데는 없고 합의하고 도장 찍자니 찜찜하고, 문제를 삼으려고 하면 빠져 나갈 구멍이 마련되어 있다. 미국의 협상가들이 북과 협상을 하고 나서 “진을 뺐다”는 소감을 밝히는 것은 북의 이런 전술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전술이 전형적인 유격전술이다. 모택동의 유격전법에 따르면 적이 공격하면 후퇴하고 적이 멈추어 서면 교란하고 적이 후퇴하면 공격한다고 되어 있다.
일제침략기, 유생이 지도하는 농민군은 일본군과 정면 대결하여 무참히 희생되었다면 유격전술은 중국의 서남부, 유고의 산악지대, 조선의 동만주 등지에서 수백.수천배의 적군을 괴롭혔다. 유격전술은 강대한 적과 맞서 싸우는 유서 깊은 약자의 전술인데 북의 협상기술은 이와 유사하다.
위와 관련하여 흥미있는 대목이 있다. 2005년 3월31일 북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6자회담이 비핵화를 위한 핵군축회담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군축과 관련해 중요한 개념은 비핵화와 비핵지대화이다. 1980년대 중반 북은 비핵지대화를 줄기차게 주장하다 결국 비핵화에 동의했다.
비핵화는 91년 1차 북핵위기 당시 남에 주둔했던 미국의 지상 핵무기를 철수하는 대신 북의 핵무기는 근원적으로 봉쇄한다는 불평등한 암묵적 동의 하에 출현했다. 당시의 역관계에서 비핵화라는 단어 속에는 일본의 잠재적인 핵무장력, 미국의 핵 잠수함의 입항, 미 전략폭격기의 군사연습 등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신문 발표를 보면 북이 비핵화라는 용어를 쓰면서 군사훈련, 진해항의 핵잠수함 입항까지를 문제 삼고 있다.
3.31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 밝힌 핵군축회담이란 북의 핵무기를 제거하기 위한 91년도의 문제의식인 비핵화가 아니라 91년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북이 제기했던 비핵지대화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3.31담화 또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 잠정협정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오랜 연구의 산물인 듯 하다.
③ 글을 마치며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2.10 외무성 성명을 TV 속보를 통해 보았다. 때가 되면 외무성 성명이나 외무성 대변인 담화 등이 발표되는데 대부분 원문 그대로 신문에 실린다. 또 적당한 때에 한겨레신문, 연합뉴스 등에서 한성렬 유엔 주재 북대사 등 북의 외교관과 인터뷰를 하고 이를 게재한다. 덕분에 상황은 분명 투명하게 전달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외무성에서 발표하는 문건이나 한성렬 대사의 대답에 모호한 부분은 없다. 특히 의지나 의사는 간결하고 명확하다. 미지의 영역이 있다면 이후 수순 정도이다. 반면 신문 해설기사나 남 또는 미국 관리들의 발언은 대체로 모호하고 애매하다. 이들은 북의 주장을 애써 아니라고 하거나 본래 의도는 그것이 아닐 거라고 주장한다.
북의 주장과 요구는 91~94년이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70년대 초반 문건 또는 분단 직후의 문건과 비교해도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문제는 이를 대하는 남이나 서방의 태도가 때에 따라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91~94만 해도 일반적으로 북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보았다. 그리고 당시는 무엇보다 사실 자체가 투명하게 전달되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지금은 사실 자체는 투명하게 전달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또 다른 색안경을 통해 걸러지고 있다.
지금은 북의 강경한 주장이 본심이 아닐 것이라는 또 다른 유형의 각색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각색은 정부 관리들이나 미국 외교관들 사이에서 특히 심하다. 2005년 4월 초 현재 상황은 북의 강경한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한.미 당국자들의 난감한 처지가 문제인 듯싶다.
그렇다면 일반 대중의 생각은 어떨까?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인과 논리를 먹고사는 지식인,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 당국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의 경우 경험과 사실을 중시하는 반면 후자는 자신의 논리, 자기의 처지에 따라 사실을 희망에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일반인들의 경우 오랜 경험을 겪으면서 북핵 위기, 북미 갈등의 현 주소를 점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보내는 냉소적인 반응 또는 조선일보가 훈계하는 어투로 북핵 문제의 심각성을 강변하는 상황은 위와 같은 양자 사이의 괴리 때문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보는 것, 이런 태도와 자세가 많은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