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우(통일연대 사무처장,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중)

통일뉴스 연재물 ‘민경우의 통일운동사’ 필자인 민경우 통일연대 전 사무처장이 연재 1단계를 마치고 2단계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본사에 보내왔다. 편지에서 민경우 씨는 “필자가 의도했던 목표는 대체로 마무리되었다”면서 “사실 이 정도 했으면 징역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여전히 적지 않은 징역이 남아 있는 관계로 2단계 작업을 진척시키고자 한다”면서 새로운 작업에 들어가 통일운동사 2단계를 집필할 의욕을 보였다. - 편집자 주
필자가 본 연재물을 기고함에 있어 염두에 두었던 기조는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는 시기적으로는 1972년 7.4 공동성명에서 2002년 대선까지, 둘째 글의 주제는 조국통일 정세, 셋째 글을 쓰는 방식은 역사적 접근이다. 이 중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세 번째 부분일 듯싶다.

역사적 접근이란 운동적 접근과 대비한 개념이다. 그동안 필자가 써왔던 글은 대부분 당면 정세와 연관된 정세 글이거나 연설문.결의문 등이다. 이런 유형의 글들은 현재 또는 미래에 중심이 있고 서술하는 방식도 운동적 실천을 뒷받침하기 위해 함축적이고 선동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역사적 접근이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전후 맥락에 맞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필자는 우리 운동의 경험이 많아진 만큼 과거를 찬찬히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감옥에서 달리는 운동적인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필자와 같은 사람에게 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우리 운동이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현실의 문제이니 만큼 필자가 취한 역사적 과거 또한 현실의 통일운동과 접목되어 있는 1970년대 초반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위의 관점에서 보면 필자가 의도했던 목표는 대체로 마무리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감옥이라는 한계가 적지 않았지만 즐겁고 유익한 작업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아내와 통일뉴스 측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사실 이 정도 했으면 징역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여전히 적지 않은 징역이 남아 있는 관계로 2단계 작업을 진척시키고자 한다. 작업의 방향은, 첫째 1972~2002년의 기간 중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 또는 첨언하고 싶은 내용을 보강하는 것, 둘째 조국통일 정세보다 근본적인 문제 가령 민족 개념, 경제문제 등(이는 1단계 작업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진행했다), 셋째는 2002년 이후 정세인데, 이는 위에서 언급한 역사적 접근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운동적 실천의 대상이다. 어쨌든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해보기로 한다.

책보고 글쓰는 것밖에는 달리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반면 이런 식의 작업이라도 내가 세상과 동지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즐겁고 다행스럽다.

2005. 3. 27 민경우


본 글에서는 본 연재물 '① 조국통일 3대원칙을 둘러 싼 논쟁'에 이어 해당 주제에 관해 첨언하고 싶은 내용을 지적해 보겠다.

① 적대적 공생 관계에 대하여

1970년대 초반을 경계로 남북 관계는 크게 변화했다. 남의 경우, 이전 시기 조국통일 문제를 보는 기본 시각은 남이 UN이 승인하는 한반도 전체의 유일합법정부이고 북은 3.8선 이북을 불법 강점한 반국가단체라는 입장이었다. 이에 따르면 일체의 남북대화가 무의미하거나 불법이었다.

70년대 초반 남이 'UN이 승인한 유일합법정부 → 두개의 국가'로 입장을 선회하면서 남북대화가 가능했다. 북의 경우, 북 주도하의 하나의 Korea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른 연방제 논리를 수용하면서 일정한 변화를 보였다. (남의 변화에 비해 북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작은 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언급하겠다.)

70년대 초반 7.4 남북공동성명이 가능했던 것은 위와 같은 남북의 입장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70년대 초반을 경계로 2005년 현재까지 남북대화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남북대화가 진척됨에 따라 남북대화의 양상은 보다 다변화되고 심화되고 있다. 30년 이상의 일관된 추세를 거슬렀던 흐름이 두 번 있었는데 한번은 73년 DJ 납치사건이후 79.10.26까지의 기간과 94년 7월 김 주석 서거 이후 97년까지의 기간이다.

두 번의 정체기 또는 악화기는 긴 역사의 궤적에서 보면 예외적인 일탈기에 속한다. 역사란 우여곡절을 겪으며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나타난 역류 현상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주목할만한 점은 광주사태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하에서도 남북대화가 이어지고 발전한 점, 98년 DJ 정부 출범 이후 남에서 보수강경파의 입지가 경향적으로 축소된 점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남북관계의 개선이 DJ-노무현 정부 집권에 결정적, 직접적 요소는 아닐지라도 그것을 가능케 했던 간접적 배경이 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97, 2002년 두 번의 대통령선거에서 남북이 적대하거나 충돌했다면 남에서 DJ-노무현 정부가 집권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남북관계, 조국통일 역사를 위와 같이 개괄해 놓고 몇 가지 논란을 검토해 보도록 하자. 남북관계를 다루는 전문가들 사이에 회자되는 개념으로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것이 있다. 「적대적 공생관계」란 남북의 집권자가 서로를 적대함으로써 집권 기반을 안정화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통일이란 누구나 원하고 동의하는 문제이므로 생각보다 쉬운 문제인데 분단 유지에 기득권을 가진 집권자들이 필요에 따라 남북관계를 경색시킴으로써 통일에 발목을 잡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분단 유지에 기득권을 가진 집권자들이 존재하는 한 사실상 통일은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 생각, 발상은 일반인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는데 7.4공동성명도 「적대적 공생관계」를 입증하는 하나의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위와 같은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

첫째 객관 현실에 부합하지 않고, 둘째 미시적인 현상에 집착하여 전체 흐름, 맥락을 놓치고 있으며, 셋째 결과적으로 7.4남북공동성명이 갖는 역사적 지위를 은연중에 훼손하고 있는 점이다.

박정희 정부가 7.4공동성명을 10월 유신에 악용한 점은 분명해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은 70년대 초반의 국제 정세가 자신의 집권 기반에 위협이 된다고 본 것 같다. 미-중 화해에 따른 긴장완화 추세가 반공이라는 집권 기반을 흔들고, 점증하는 민심이반과 야당의 도전에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에 대한 박정희 정부의 반응이 10월 유신을 통한 강권 통치였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7.4공동성명은 새로운 환경(긴장완화, 민심이반, 남북화해)에 대한 강권체제 구축이라는 반응 사이에 존재하는 돌출적인 행동이었다.

남북대화를 강요했던 국제적 추세에 순응하여 7.4공동성명에 합의한 뒤 이를 이용하여 10월유신이라는 목적을 추구한 것이다. 이러한 괴리가 생겼던 원인은 남북대화를 강제했던 힘이 남 내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강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정희 정부가 퇴장한 후 군부에서 정권을 잡았음에도 남북 관계에 관한 한 유화적인 흐름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70년대 초반을 경계로 하여 구획된 남에서의 통일 정책의 변화의 진원지는 두개의 Korea를 합법화함으로써 상황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미국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박정희 정부는 긴장완화를 요구하는 외부의 힘에 저항하다 내부에서 모순이 축적되어 내폭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긴장 완화, 남북관계 개선 흐름에 역류했던 또 하나의 사례인 94~97년의 YS 대통령도 비슷한 경우이다. 이들 사례는 대북 강경책을 구사하여 집권기반을 안정화시키기는커녕 남 내부로 위기를 증폭시켜 스스로 자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적대적 공생관계가 가정하는 대북 적대감을 부추겨 집권 기반을 안정화한 정권.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30여 년의 역사에서 보면 대북 강경파는 강화.발전하기는커녕 점진적으로 축소.와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대남 적대감을 부추겨 이를 통해 집권 기반을 강화하려는 북 정권의 존재는 더더욱 황당한 발상이다. 북의 경우 오히려 통일 의지와 담론이 과잉화 된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어느 정권이든지 경제성장 등 실용적인 문제와 민족통일.반외세 등 도덕적.이념적인 문제를 함께 혼합하여 정권 기반을 구성한다.

그런데 북의 경우 민족통일.반외세 등의 도덕적.이념적인 지표가 실용적인 목표를 압도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가 긴장 완화추세라는 객관적 조류에 대해 일차적으로 남북대화, 7.4공동성명이라는 순응적 태도로 정반응했다가 곧바로 10월유신으로 역반응하면서 안으로 모순을 끌고 들어갔다면 북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이념적 목표를 집요하고 끈질기게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과 안목의 차이가 남북이 동원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원의 현격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북이 대미 관계 또는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힘이다. GDP로만 보면 북미 또는 남북의 역량 차이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이다.(거칠게 개괄하면 미국:10조 달러, 남:5~6천 달러, 북:200억 달러 수준이다.)

그럼에도 북은 위축되거나 수세적이기는커녕 시종 적극적이고 공세적이었다. 적대적 공생관계가 가정하는 북의 모습, 가령 얼마 안되는 자원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대남(또는 대미) 적대감을 부추겨 정권을 안정화하려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2000년 남북 정상회담 같은 것이 가능했겠는가? 2002년 2차 서해교전 발생 이후 2002년 10월 부산 아시안게임에 선수단과 대학생 응원단을 파견한 목적은 결국 이회창 후보와 같은 대북 강경파가 아니라 노무현 후보와 같은 대북 온건파가 집권하기를 바라는 우회적인 의사 표시였다고 볼 수 있다.

② 7.4공동성명과 국제 역학

제도권의 문헌을 보면 70년대 초반의 긴장완화 흐름과 동.서독 관계 개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7.4공동성명은 미완의 단절된 노력으로 격하하는 경향이 있다. ①에서 지적한 적대적 공생관계와 같은 생각도 결국은 객관현실을 호도하거나 일시적인 역류현상에 집착하여 7.4공동성명을 폄하하는 기조로 빠져 들고 있다.

아래에서는 국제적 긴장 완화 추세와 남북과 동서독의 대응에 대해 언급해 보겠다.

남북과 동서독 관계의 차이는 무엇보다 동서독과 남북은 통일문제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달랐다는 점이다.

동독 또는 동유럽은 크게 보면 자력으로 민족해방투쟁을 성공시키고 사회주의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유고와 알바니아 등은 예외) 소련의 진군에 의해 사회주의가 이식되었다. 또한 동유럽 특히 동독,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은 전통적으로 가톨릭 문명권이었다. 동.서독 관계는 동유럽의 이러한 특징이 집약된 곳이다.

1945년 독일 패전 이후 동.서독은 미국.영국.프랑스 점령지가 서독으로, 소련 점령지가 동독으로 분단되었다. 동독의 경우 애초부터 민족해방 투쟁에 의한 민중적 토대가 약했고 역사적으로 보면 낙후했던 러시아보다는 부유하고 선진적이었던 서유럽에 대한 친화력이 높았다. 덕분에 역대의 서독 정권은 서독이 전 독일을 대표하는 정권임을 자신감 있게 내세웠고 동독은 동.서독이 서로 다른 국가임을 강변했다.

동독은 경제적 자원에서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서독에 비해 열세였다. 72년 동.서독 관계 정상화는 사민당의 브란트 정권이 추진한 ‘서독의 전독일 대표성-동.서독 교류의 단절’ 기조를 ‘동.서독 두개의 국가관계 인정-동.서독 교류 증진’이라는 기조로 정책을 변화시킨 결과이다.

브란트 정권의 동방 정책이 이전의 서독 정부에 비해 진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또한 통일 독일을 먼 미래의 일로 돌리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2차대전의 전범국, 중부 유럽의 강국으로서 통일독일이 가져 올 파란을 고려하면 이해할만한 대응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대응이었다고 과찬하는 것은 과도한 평가이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독일 통일로 귀결된 것은 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지 동방 정책과 독일 통일 사이에는 내적 필연성, 독일 민족의 진취적인 노력은 크지 않았다.

말이 나온 김에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짚고 넘어 가자.

필자는 2차 대전 이후 독일 민족의 진로로 가장 바람직했던 모델은 비무장-중립화된 통일독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것이 수용되었다면 유럽에서 동서독 분단선을 정점으로 서방과 사회주의권이 대립하는 무익한 대결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성립되지 않은 이유는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미국이 동서독분단선을 계선으로 대소 봉쇄망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열세에 있었던 스탈린은 여러 경로로 위와 같은 제안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제안의 연장선에서 소련과 동독은 동.서독을 두개의 국가로 합법화하자는 제안을 계속하게 된다. 소련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동독 공산주의자들의 대응은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위 독일 사례가 중요한 것은 남북과 일본 문제 때문이다.

최근 보수우익세력 주도하는 근.현대사 재평가 바람이 불면서 희한한 논리가 세를 얻고 있다. 해방 정국에 대한 대응에서 김규식.여운형 선생이 주도했던 좌우합작, 김구.김규식 선생 등이 참여 했던 남북협상 노선을 낭만적으로 치부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확실한 단선.단정 노선이 옳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전후 서독이 중립화 노선을 받아들이지 않고 미국 주도의 서방 진영에 확실히 편입된 것이 결과적으로 통독을 이룬 힘이었다는 생각과 맥을 같이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독이 미국 주도의 냉전 구도를 받아들이면서 유럽에서 역사적으로 불필요한 냉전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미국의 동.서독 구도를 받아들여 동.서독 분단선을 계선으로 독일 민족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을 국제적 충돌의 무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를 취할 것인가 사회주의를 취할 것인가의 문제는 민족 내부의 단결과 평화를 이룩한 뒤에 나오는 문제이다.

위와 같은 역사 인식이 현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 때문이다. 일본은 2차대전의 전범국이면서도 미국의 단독 점령으로 분단되지 않고 미.소 냉전의 첨병으로 재발탁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궤적이 2차대전의 책임이 있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체질과 인맥을 2005년 현재의 일본에 고스란히 이식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덕분에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을 고리로 하는 미국의 대중 압박이 서서히 현실화되고 있다. 결국 냉전이란 1,2차 대전 이후 부상하는 약체 소련을 초강대국 미국이 압박했던 무익한 대결이었지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응하는 미국의 수세적인 봉쇄 정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소련이 아니더라도 국지적 군사강국, 그것도 아니면 중국과 인도로 대상을 바꾸어가며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를 위한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냉전의 본질이 그러했기 때문에 정작 전쟁의 책임이 있는 일본의 체질 변화는 은폐되었다. 그 후과를 2005년 현재 일본의 군사대국화 경향에서 목도하고 있다.

만약 2차대전 직후 이승만 대통령처럼 미국 주도의 냉전 질서에 확실히 편입되는 것이 옳았다면 미국 주도의 냉전 질서의 하위 구도에서 벌어졌던 문제 한일협정, 일본의 군국주의적 잔재의 온존, 독도 영유권 주장 등도 용인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나아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략도 결국은 2차 대전 직후의 미국의 정책이 평화적, 다자적 지향을 띄지 않고 소련을 희생양으로 한 군사적.일방적 색채를 띠었던 점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다시금 본론으로 돌아 와 이번에는 동서독과 구분되는 남북관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동독.동유럽과 비교하여 북.동아시아의 공산주의 세력이 대단히 달랐던 점은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서남부 오지, 베트남의 정글, 만주의 산악지대에서 민중적 민족해방투쟁을 실제로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베트남.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과 대립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주체성과 독립성이 높았다.

또한 이들 사회는 잘 발달된 유교 질서가 성립되었던 지역으로 전통과 역사에 대한 뿌리와 긍지가 컸다. 반대로 이들에 대립했던 정치세력은 미국으로부터 이식된 정권이거나 민중적 기반이 취약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미국은 1950년대 한반도에서 조-중 연합군에 고전했고 60년대 베트남에서는 끝내 지고 말았다. 미국의 국력에 비추어 보면 한반도와 베트남에서 고전하거나 패배한 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결과였다.

70년대 초반의 긴장 완화 추세 또한 유럽과 아시아에서 다른 양상을 띠었다.

유럽에서 긴장완화 추세는 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60년대 꾸준히 확장되었던 해빙 기류가 계승.발전한 것이다. 유럽에서 긴장 완화를 구성했던 요소는 ‘SALT(전략무기제한협정)-동서독 관계 개선’ 등이다.

SALT와 쌍을 이루는 현상이 70년 발효된 NPT이다. 결국 SALT란 미국이 소련의 핵역량을 인정하여 소련을 미국과 핵 능력에 관한 한 동급에 올려놓는 대신 NPT를 통해 여타의 나라들로 핵 능력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는 미국 주도의 미.소 핵 독점 체제였다. 이런 타협이 가능했던 것은 동유럽이 소련의 위성체제였기 때문이다.

한편 동서독 관계 개선은 소련과 동독의 오랜 숙원인 동독의 주권 보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소련과 동유럽 체제를 흔들었던 국경의 불안정은 사라졌지만 이후에는 인권과 동.서간 교류가 밀려들면서 소련.동유럽 체제가 해체되는 단초가 되었다. 그 만큼 동유럽 체제는 허약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종합하면 유럽에서의 긴장 완화는 2차 대전 이후 수세에 몰렸던 소련과 동유럽이 전후의 역사를 소극적으로 추인.합법화하는 과정이면서 미국과 서유럽의 대소.대동유럽 공세가 인권과 교류의 확대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동아시아에서의 긴장 완화는 이와는 사뭇 달랐다. 동아시아에서의 긴장완화는 미.중 화해, 73년 파리 평화협정, 남북대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중 화해란 역량 쇠퇴에 직면한 미국이 중.소 분열을 이용하여 60년대의 대중 봉쇄를 후퇴시키면서 이루어졌다. 중.소 분열과 미.중 화해과정에서 중국이 보여 준 무원칙한 대응이 문제였지만 동아시아에 국한해 보면 미국의 후퇴하는 양상은 뚜렷했다.

68년 1월 민족해방전선이 주도한 테트 공세 이후 수세에 몰렸던 미국은 73년 파리 평화 협정으로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된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군하면서 베트남이 유지될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는 미군 철수 2년만인 75년에 무너졌다.

70년대 초반의 남북 대화도 미국의 후퇴-중국과 베트남의 공세와 맥을 같이하는 사건이다. 북은 70년대 초반 형성된 긴장 완화 추세를 활용하여 한반도에서 미국의 후퇴를 강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결과물이 72년 7.4공동성명이다.

민족의 자주는 여러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7.4공동성명에서 확인된 자주의 원칙은 명백한 반외세 즉 반미였다. 반대로 미국이 기대했던 것은 동.서독과 같이 남북이 두개의 국가로 공인된 조건에서 교류협력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70년대 초반 충돌했던 것은 북의 one korea 전략과 미국의 two korea(s) 전략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이 강요한 two korea(s) 전략이 집권기반을 흔든다고 판단한 나머지 초반에는 이에 순응하다 10월 유신으로 이를 뒤집었는데 이 역방향의 대응이 정권의 몰락을 자초한 것이다. 결국 박정희 정부가 거부했던 two korea(s) 정책은 박정희 정부의 아류라 볼 수 있는 전-노태우 정부에서 실현된다.

동독, 동유럽과 북, 동아시아의 차이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사건이 NPT에 대한 대응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SALT는 미.소의 핵독점체제의 완성과 함께 핵무기의 확산을 막는 NPT체제와 쌍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미.소의 위성체제였던 NATO와 일본, 동유럽 등은 미.소의 핵우산을 수용하거나 독자적인 핵 개발 시도를 감행하지 못했다.

반면 북은 7.4공동성명이 무산되자 74년 2월 북미 평화협정을 제기하며 이를 강제할 수단으로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북의 입장에서 미국의 퇴장은 말로 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또한 북이 소련의 위성체제였다면 꿈도 꾸지 못할 사건이다. 여기서도 동유럽과 구분되는 북 또는 동아시아의 독자성과 주도성이 확인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72년에 동.서독과 남북에서 발생했던 두 가지 사건, 동서독 관계개선과 남북공동성명 중에서 보다 선진적이고 긍정적이었던 것은 후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독의 대응이 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90년대 초반 사외주의권이 붕괴되면서 이 결과로부터 연역하여 역사를 재해석하는 난폭한 역사 해석 때문이다. 역사란 현재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이지만 이 경우 문제는 과거를 재해석하는 현재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현재에 근거한 역사 해석도 도를 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둘째는 ①에서 언급한 적대적 공생관계류의 이상한 생각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③ 7.4공동성명 3원칙

아래에서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7.4 공동성명의 3원칙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명백히 해보겠다.

먼저 자주의 원칙에 대해 말해 보면, 민족 자주란 민족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자결의 의미와 민족이 자결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외세를 제거하는 반외세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7.4공동성명에서 확인한 자주의 원칙은 명백히 후자이다. 여기에 「열린」, 「개방적」 등등의 수사를 붙여 7.4공동성명의 원문 또는 본 정신을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다음으로 평화의 원칙에 대해 말해보면, ‘평화공존’이란 일반적으로 두 개의 주권 국가 사이에 적용되는 개념으로 하나의 국가를 지향하는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인 남북간에는 써서는 안될 용어이다. 당연히 ‘평화’는 통일을 지향하는 것으로 이러한 차원에서 평화의 원칙을 ‘평화통일’이라고 쓰는 것은 이해는 되지만 용어의 중복이다. 남이 평화를 주로 ‘평화공존’으로 기술하고 북이 평화를 굳이 ‘평화통일’이라고 명명하는 이유는 그러한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아마도 이러한 차이는 7.4공동성명 합의 이후 남북이 각기 자신의 입장대로 용어를 썼기 때문이다.

한편 함부로 써서는 안될 용어이기는 하지만 평화공존이라는 단어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측면이 있다. 현 상태에서 남북은 꽤 긴 시간의 공존 단계를 거쳐야만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통일 과정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북의 경우에도 이러한 현실 변화를 인정하고 있는 바 80년 고려민주연방제가 90년대 초반 이후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변한 과정이 그러하다.

평화공존이 객관현실을 반영하는 측면이 있지만 다른 용어를 쓰는 것이 나을 듯 하다. 가령 91년 합의서의 문구인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 줄여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가 그것이다. 이 경우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인만큼 평화 조항은 당연히 내부에 포함하는 것으로 처리하면 될 것이다.

남북관계는 민족문제이므로 중심에 두어야 할 대목은 어디까지나 통일이지 평화가 아니다.

끝으로, 민족대단결에 대해 말해 보겠다. 민족이 단결하는 방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상과 신념이 일치하는 높은 수준에서, 둘째는 서로 무력으로 대치하는 군사적 대치를 그만두는 평화 공존하는 방법, 셋째는 7천만 구성원 모두의 의사가 균형있게 반영되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차원, 네째는 남북에 각기 존재하는 제도와 사상의 차이를 인정하는 방법 등이 있다.

이중 첫째의 방법은 7.4공동성명의 민족대단결 원칙과 명백히 배치된다. 두 번째 무력대치 중단은 민족대단결하는 최소 기준이지만 7.4공동성명의 본 정신은 아니다. 7.4공동성명의 기본 정신은 단순한 군사적 대치의 중단뿐만 아니라 상호체제를 적극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민족대단결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이렇게 되면 세 번째 민주주의도 특정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가치로서의 민주주의를 의미하게 된다.

필자는 7.4공동성명을 지지한다. 그리고 그것은 30여년 전의 역사적 산물이라고 보기보다는 통일의 기본 지표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실현될 조국통일은 7.4공동성명의 3대원칙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보면 7.4공동성명을 적당히 왜곡하여 본 정신,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맞서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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