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뉴스는 지난 20년 가까이 통일운동 현장의 일선에서 뛰어온 민경우 통일연대 사무처장이 직접 쓴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를 연재한다. 이 연재물은 간첩죄명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인 민경우 처장이 옥중에서 작성한 원고를 '옥중기고' 하는 방식으로 게재된다. 민경우 씨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범민련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범민련 공동사무국 박용 부총장에게 8.15 통일대축전 행사와 통일연대 결성 등의 '국가기밀'을 수집 전달했다"는 이유 등으로 지난 2003년 12월 1일 전격 연행된 후 올해 5월 24일 1심에서 징역 4년, 자격정지 3년 실형을 선고 받고 이어 10월 28일자로 3년 6월형이 확정되어 현재 서울구치소(186번)에 수감 중이다. '민경우의 통일운동사'는 매주 월요일에 연재된다. - 편집자 주 |
본 글에서는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군사전략에 대해 언급해 보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 초반 냉전 붕괴 이후 2001년 부시 행정부 출범 이전까지의 10년간은 일종의 과도기였던 것 같다.
따라서 부시 행정부의 군사전략의 특징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1990년대를 하나의 막간기로 설정하고 냉전시기의 군사 전략과 부시 행정부의 군사전략을 비교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90년대의 과도기를 거쳐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본격화된 미국의 군사전략의 특징과 한계에 대해 지적해 보겠다.
① 부시 행정부의 군사전략의 특징
㉠ 위협 요인에 대한 판단
냉전 시기 미 행정부는 미국의 안보 위협을 대체로 “소련과 그 동맹국”에서 온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미국은 소련과 그 동맹국들이 서방진영과 맞서는 경계선을 따라 방대한 봉쇄망을 구축했다. 이 봉쇄망 중 중요한 것이 동.서 유럽을 가르는 선과 한반도의 남북을 가르는 선이었다.
미국의 이러한 전략에 따라 독일이 동.서독으로 분단되고 유럽이 동.서로 분할되었다. 전통적으로 유럽을 지리적으로 구분할 때 쓰였던 중부 유럽은 미.소의 세력 범위에 따라 유럽이 재편되면서 사라졌다.
독일이 2차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만큼 동.서독의 분열은 나름대로 정당성이 있었지만 한반도의 분열은 어떠한 도덕적 근거도 갖고 있지 않았다. 2차대전 직후 중국의 국민당 정권이 패배하면서 한반도에서 좌우합작, 일본의 脫(탈)군국주의화의 가능성 또한 사라졌고 한반도도 전세계적인 범위에서 구축된 미국의 대소 봉쇄망을 따라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1990년대 초반 소련이 붕괴하면서 소련을 정점으로 구축된 안보전략의 변화는 불가피했다. 2001년 부시 행정부 출범 이전까지 과도기의 10년을 지배했던 미국의 생각은 소련과 같은 거대제국이 붕괴했지만 국지적 범위에서 작은 악당 국가들이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에 냉전 시기의 방대한 군사력이 해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1990년대를 분쟁과 대결로 몰아간 win-win 전략의 실체이다.
소련이 와해된 상황에서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 중동.아랍의 반미국가들, 북, 쿠바 등 동북아시아와 카리브해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슨 큰 위협이 되겠는가? 소련을 대신하는 국지적 범위의 악당국가란 미국의 체질화된 호전성이 만들어낸 일종의 가공물이었다.
국지적 범위의 악당 국가를 새로운 목표로 설정하면서 미국의 전략안에는 위험한 발상이 생겨나고 있었다. 주권.영토라는 근대 사회의 기본 원리를 뛰어 넘어 마음에 들지 않는 악당 국가의 내정에 개입할 수도 있지 않을까?
1999년 3월 NATO는 밀로세비치의 세르비아가 코소보를 탄압한다는 이유로 세르비아에 대한 공격을 단행했다. 코소보는 당시 유고연방의 자치주로 중국으로 치면 조선족 자치주와 유사했다. 미국과 유럽은 코소보에서 자행되는 인권 유린을 명분으로 유고 연방(세르비아)과의 전쟁에 돌입했는데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미국의 내정 개입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게릴라에게 CIA가 무기와 정보를 제공한다든가 중남미 군부 실력자들에게 고문 기술을 제공한다든가하는 공작의 수준이었다. 나라의 이름을 건 노골적인 침략은 베트남전 이후 유례없는 일이었고 소련 붕괴에 따라 국제 역관계의 공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부시 행정부의 선제공격 전략, 자유의 확산 전략은 90년대 10년간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명분 아래 진행된 침략 전쟁의 논리적 계승이라 할 만 했다.
2001년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안보 위협을 설정하는 관점 자체가 변화했다. 미국의 전통적인 안보전략은 소련이라는 적, 또는 이라크라는 대상 등 명확한 실체가 있는 목표를 기초로 짜여졌다. 소련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이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미국의 전략은 어떠해야한다는 식이었다.
부시 행정부의 군사전략을 입안한 럼스펠트 국방장관은 위와 같은 방식을 “위협”에 기초한 생각이라고 규정하고 발상의 전환을 주문한다. 즉 향후의 안보위협은 대상이 명확한 적으로부터, 소요 경비와 군사력을 계산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라 언제, 어떤 형태로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므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 군사력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럼스펠트 국방장관이 이러한 전략을 구상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대상은 아마도 알-카에다와 같은 국제 테러조직과 북.이란 등의 “악당국가”였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형태’의 위협이라도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의 군사력이라는 발상은 위협이 발생했을 때 이에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위협을 제거하겠다는 보다 호전적인 발상 즉 선제공격, 자유의 확산 정책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 동맹 정책
냉전 시기 미국의 적이 소련과 그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동맹에 편입시켰다. 서유럽과 일본은 1,2차 대전 이전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강국으로 미국은 소련 봉쇄를 위해 당시로 보면 세계 최강의 연합군을 조직한 것이다.
냉전시기 소련과 동유럽, 중국과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를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이탈리아.일본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명확하다.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은 독일 혼자만으로도 유럽 전체를 상대했던 군사.경제 강국이었던 반면 소련은 경제적으로는 터무니없이 약했고 군사적으로도 미국의 핵독점을 무너뜨리기 위해 필사의 사투를 벌였던 후발 주자에 가까웠다. 필자는 미국이 냉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이 현격한 힘의 격차, 즉 미국의 동맹 정책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동맹 정책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미국은 냉전이 붕괴되었지만 미국의 동맹 정책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보고 서유럽과 일본과의 동맹 정책을 세심하게 유지했다. 서유럽의 경우에는 NATO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물론 폴란드.체코.헝가리 등 구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던 나라들로 확장되었다.
소련이 없어지고 그 계승자인 러시아의 힘이 약화된 조건에서 NATO가 존립할 이유가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지만 미국이 NATO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승리라 할 만 했다.
한편 동북아시아에서는 1990년대 중반 미.일 동맹이 재구축되었다. 냉전 시기의 미.일 동맹이 소련의 남하저지라는데 목표가 있었다면 90년대 중반의 미.일 동맹은 일본 주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안보 위협을 근거로 재구축되었다. 미.일 동맹의 목표가 한반도와 중국이라는 점은 명확했지만 중국을 자극하는 행동을 삼감으로써 분쟁을 피해갈 수 있었다.
부시 행정부의 출범 이후 미국의 동맹 정책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파란의 진원지는 이라크 침략을 둘러 싼 유럽과의 갈등이고 향후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중국이다.
이라크 침략은 2002년 하반기에서 2003년 상반기에 이르는 기간 UN 안보리를 둘러 싼 숨가쁜 외교전이 미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미국이 영국과 함께 감행한 것이다. UN 안보리를 노골적으로 무시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행동은 충격적이었다. 이로부터 일반 대중의 차원에서는 유럽 대륙 전체와 미국, 정부 차원에서는 독일.프랑스와 영국.폴란드.이탈리아 등으로 양분되었다.
정부차원에서 보면 유럽대륙이 양분된 것처럼 보이지만 냉전 시기 유럽을 지탱시켰던 기본 원리인 미국과 동맹하여 소련을 막자는 생각이 무너진 점을 고려하면 유럽 전체가 미국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사실 냉전 해체 이후 유럽의 탈미 조류는 점진적으로 강화되었다. NATO가 유지되었지만 유럽에게 보다 중요했던 것은 유로화 출범과 유럽통합 움직임이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경향적으로 강화되었던 유럽의 탈미 조류를 뚜렷한 하나의 계선으로 갈라놓았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달리 미국의 대중국 봉쇄론은 아직은 일부의 주장이지 미국의 정책은 아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중요성, 중국의 경제적 부상 등은 80~90년대 세계적인 의의를 가진 기본 추세였다.
문제는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다. 1990년대만 해도 미국의 대응은 나름대로 온건하고 합리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메리카 대륙과 동아시아를 묶는 APEC를 추진하며 경제를 중시했고 군사적으로는 미.일 동맹을 재구축하면서도 중국의 반발을 세심하게 고려했다.
1990년대 미.중 관계는 나름대로 건설적이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2001년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이다. 중국의 부상이 보다 극적인 양상으로 발전하고 미국의 조야에서 중국 위협론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른바 네오콘으로 불리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중국봉쇄론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부시 대통령은 신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이라크 침략 과정에서 신보수주의자들의 견해를 채택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미.중 관계는 전환적 국면, 임계점에 접어들고 있다. 미.중 관계를 가름하는 핵심적인 열쇠는 미.일 동맹이 중국 봉쇄를 현실화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2005년 2.19 미.일 신안보선언에서 미.일 동맹의 목표를 중국과 북으로 확장한 것은 우려할만한 사태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중 봉쇄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미국의 대중 봉쇄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크게 보아 동북아시아에서 일본, 유럽, 인도와 러시아 등 강대국 작게 보면 한반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에서 전세계적인 포위망을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는 미국 자신의 경제적인 이해와도 연관되어 있다.
필자는 소련을 미국, 일본, 서유럽이라는 세계 일류의 경제 지역으로부터 인위적으로 격리하여 유라시아대륙의 동.서쪽으로부터 압박할 수 있었던 냉전 시절의 힘을 2005년의 미국이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다.
㉢ 전략무기
냉전시기 미국의 군사력은 전략무기와 재래식 무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략무기의 관점에서, 미국은 소련.중국.영국.프랑스 등이 핵을 보유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와 함께 공동의 독점체제를 구축했다.
반면 이들 5대 강국이외의 나라로 전략무기가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에 NPT와 같은 가혹한 비확산체제를 구축했다. 냉전 시기의 대치구도가 ‘소련과 동맹국↔미국.서유럽, 미국.일본’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핵무기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미국의 핵무기 사용은 소련의 대응을 불러 올 것인 바 이는 상호 감당할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라면 미.소의 동맹국들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할 이유는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술 수준이 낮은 조건에서 핵무기의 확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황을 고려하면 NPT 체제는 나름대로 효과적으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재래식 무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의 한계는 뚜렷했다.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조건에서 미국의 재래식 무기는 민족주의로 무장한 베트남 민중의 힘을 넘어 설 수 없었다. 이것은 예외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베트남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60~70년대 미국의 재래식 무기로는 넘을 수 없었던 역사적인 한계이다. 따라서 냉전 시기 미국의 군사 행동은 CIA를 동원한 정치공작이거나 파나마.그라나다 등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약소국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의 과도기를 거치면서 부시 행정부는 미국을 옥죄었던 군사적.기술적 한계를 넘어서려고 하는 것 같다. 이는 전략무기라는 측면과 재래식 무기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고 있다.
전략 무기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MD와 소형 핵폭탄 개발 등이다. MD는 냉전시절 미국에게 힘의 한계를 설정했던 족쇄인 중.소의 미국 보복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없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발상은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의 오랜 꿈이었을 것이다. MD는 꿈에 그리던 구상을 냉전이 해체된 국제환경을 틈타 강행하려는 호전적인 망상이다.
비슷한 수준의 망상이 소형 핵폭탄 개발이다. 북.유고와 같은 중간 규모의 군사 강국과 전쟁을 할 경우 미국에게 장애가 되었던 것은 산악 깊숙이 들어앉은 전략지도부와 무기였다. 산악지대의 지하 깊숙이 건설된 요새는 재래식 무기는 물론 핵무기로도 파괴가 불가능했다.
소형핵폭탄은 그러한 지하 요새를 파괴하기 위해 핵무기의 속성을 기술적으로 발전시킨 살인병기이다. 무기의 위험성은 무기의 파괴력과 함께 무기가 지향하는 정치적 목표에 있다. 일견 방어용인 듯한 MD가 위험한 것처럼 적대국의 핵심 역량만 솎아 내겠다는 발상도 전쟁의 가능성과 위험성을 높이는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1991년 1차 이라크전쟁 이후 미국의 첨단 무기 개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MD나 소형 핵폭탄 그리고 이후에 거론한 재래식 무기의 정보화.첨단화 경향을 군사기술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정치적 측면을 중심으로 기술해 보겠다.
소형 정찰기, 사람이 타지 않는 항공기, 정보산업에 의해 뒷받침되는 고도의 전술지휘체계, 짧은 시간에 전 세계를 누빌 수 있는 기동력 등 미국이 추진하는 군사혁신은 놀랄만하다. 현재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볼 때 한편으로는 망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쨌든 점차적으로 현실화될 것이다.
미국이 군사 혁신을 통해 의도하는 바는 군사력 사용의 정치적 한계를 돌파하려는 것이다. 미군이 희생되지 않는다면 미국 내에서 반전운동과 같은 정치적 문제를 고민할 필요도 없고, 고도의 기동력을 갖춘다면 중무장한 보병부대의 주둔에 따른 현지 국가.대중의 반발을 고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또 정확한 정보 포착으로 적의 핵심부를 정확히 제거할 수 있다면 국제사회의 개입 이전에 전쟁을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의 의도가 그렇다면 당연히 “적”들도 그에 대응하는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소련은 MD를 무력화할 신형 미사일 개발을 공언하고 있고 북.이란은 핵무기 개발을 통해 상황을 돌파하려하고 있다. 9.11 또한 중동, 아랍에 주둔한 현지 미군이 아니라 미 본토 민간인을 겨냥해야만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발상의 산물이다.
미국의 군사력이 최첨단을 구가할 수 있지만 미국이 세계 최고를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쓸 때 미국의 잠재적인 적들은 훨씬 적은 비용으로 그에 대한 대응 체제를 만들 수 있다. 즉 미국의 군사력은 어떤 한계를 뛰어 넘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 군사전략
냉전시기 미국의 전략은 상호확증파괴(MAD), 중무장보병.전술핵무기의 전진 배치, 저강도 전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호확증파괴전략이란 소련이 전략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소련도 공멸할 것이라는 공포의 균형을 통해 미.소간의 전략 무기에 의한 전쟁을 방지하는 전략이다.
미국은 냉전 시기 서유럽과 한.일 등에 중무장한 미군과 전술 핵무기를 배치했는데 이는 소련의 동맹국이 팽창하는 최일선에서 이를 조기에 격파하겠다는 발상이다. 저강도 전략이란 CIA나 정보기관이 관여하는 일종의 정치공작으로 아프리카, 중남미 등 미국이 나라 이름을 걸고 노골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냉전 시기의 미국 전략 중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대목은 중강도전략(중간 규모의 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국제 정세가 미.소라는 커다란 두 개의 세력권으로 양분된 조건에서 중강도 전략은 자칫하면 미.소간의 전면전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1990년대 미국이 채택한 win-win 전략 즉 중동아랍과 동북아시아에서 두 개의 중간규모 국가를 상대로 하여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전략은 중간 규모의 국가와 전쟁을 하더라도 소련이 개입하지 않고 핵전쟁으로 비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중강도 전략은 소련이 와해된 이후 국제적 힘 관계가 변화하면서 발생한 90년대라는 시대의 산물이다.
부시 행정부의 군사 전략에서 새로운 요소는 선제공격, 자유의 확산 정책 등이 추가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강도 전략(또는 win-win 전략) 또한 전략의 기본은 중간 규모의 국가와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기조로 짜여져 있다. 그런 면에서 90년대의 중강도 전략은 럼스펠트 국방 장관이 지적한 특정한 대상이 존재하는 “위협”에 근거한 전략이다.
부시 행정부가 군사 전략을 기획하는 기본 요소가 위협이 언제, 어디로부터 올지 모르는 “불특정성”이었기 때문에 부시 행정부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에 대처하는 것보다는 상황을 미연에 차단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측면 즉 언제, 어디로부터 올지 모르는 뜻밖의 위협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는 발상으로부터 선제공격, 적대국의 정치체제의 교체(자유의 확산)이라는 전략이 출현했다. 위협 자체가 불특정하다면 중무장한 군대가 특정 군사기지에 붙박이 할 필요는 없다.
특정 지역에 고착되어, 특정한 임무를 부여받은, 무거운 군대로부터 전세계를 무대로 자유롭게 기동하며 보다 다양한 임무를 폭넓게 수행하는 첨단기동군으로의 변화가 미국이 추진하는 GPR의 실체이다. GPR에 따라 2002~2004년까지 한미간에는 FOTA가 2004년 이후에는 SPI가 진행되고 있다.
② 평가
필자는 지금까지 부시 행정부의 군사 전략을 네 가지로 나누어 그 특징을 살펴보았다. 아래에서는 이를 종합적으로 평가해 보겠다.
첫째, 언제, 어디서 닥쳐올지 모르는 위협에 꼭 맞는 대상은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조직의 미 본토 공격이나 자연재해이다. 이것은 결국 전통적인 안보 위협이 큰 틀에서는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알-카에다의 미 본토 공격은 국방, 안보, 전쟁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경제적인 문제였다. 1960년대 후반 서유럽과 일본의 진보적 인텔리 일부가 테러 공격을 기획했던 것과 유사하게 테러를 낳은 사회적 근원을 제거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였다. 더구나 영토와 조직적 실체가 불분명한 테러조직을 상대로 전통적인 전쟁의 개념을 들이미는 것은 아귀가 맞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21세기의 세계사는 전통적인 전쟁의 위협이 약화된 대신 자연재해나 빈부격차 등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의 전략에는 전통적인 전쟁위협과 테러, 자연재해와 같은 신종 위협이 뒤범벅이 되어 지구가 곧 망해버릴 것 같은 공포로 가득 차 있다.
돌이켜보면 미국민의 이러한 우물 안 개구리식의 공포는 냉전 초기 소련에 대해 느꼈던 감정, 탈냉전 초기 일본이나 세계 도처에 우글거린다는 악당 국가에 대한 이미지에서도 동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둘째, 미국이 동원할 수 있는 현실적 힘의 한계와 미국이 표방하는 전략 사이의 괴리이다. 미국의 힘이 경향적으로 약화되고 있음은 명백하다. 미국의 힘은 45~60년대 말까지 정점을 이룬 뒤 꾸준히 약화되었다. 소련의 해체로 미국의 힘이 강하게 보였던 것은 긴 역사의 궤적에서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착각으로 미국은 터무니없는 과욕을 부리고 말았다. 이라크 침공은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은 UN 안보리라는 도덕적.정치적 명분, 유럽과 중.러라는 외교적 자산도 무시하고 미국의 힘만을 믿고 이라크를 침공했는데 그 대가는 생각보다 참혹하다. 이라크에서 저 수준이라면 북과 이란에서는 더욱 심각할 것이다.
미국의 국력이라는 객관적 지표와 미국이 표방하는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지역이 바로 한반도이다. 초강대국 미국의 이미지는 현실보다 과대포장 되어있고 굶주리고 낙후한 북이라는 이미지는 현실을 너무 모르는 것이다.
2005년에 접어들면서 입으로만 으르렁대던 북미가 서서히 총칼을 빼어 들고 있다. 양상은 예상보다도 우습게 나타나고 있다. 세상을 날려버릴 것 같던 세계 최강대국 미국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기껏 ‘중국 역할론’이나 읊조릴 수준이라면 결과는 뻔한 것이다.
셋째, 미국의 수준은 이라크에서 이미 확인되었다. 이라크의 결과는 미국의 전략이 우연적 요소에 의해 뒤틀린 결과가 아니라 필연적 수순에 의해 그렇게 될 상황이었다. 만약 미국의 군사력이 사담 후세인의 은신처를 정확히 찾아내어 일종의 조준 사격을 통해 이라크 지도부를 제거한 뒤 사후적으로라도 UN이나 여타 열강을 참여시킬 수 있었다면 이라크에서 이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력은 이라크를 제압하기 위해 이라크 전역을 초토화시키는 침략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이라크 민중의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군사혁신에 의해 뒷받침되는 환상적인 군사력은 아직은 꿈이다.
한편 UN이나 여타 열강을 참여시키는 이른바 다자적 해법은 주권국가 이라크에 대한 침략 전쟁과 양립할 수 없었다. 현재의 세계사는 미국의 일극 패권이 UN 또는 여타 열강에 의해 의미있게 제어되고 있는 것이 객관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객관적 힘과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이미지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또 미국이 9.11을 통해 조장했던 위협은 전통적인 성격의 전쟁이라기보다는 테러나 자연재해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도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는 자신의 힘을 과장하고 테러라는 새로운 유형의 도전을 전쟁과 군사력이라는 전통적인 방식과 결합하여 문제를 키웠다. 이러한 간극은 이라크에서 냉정하게 확인되었고 아마도 북핵 해결과정에서 잔인하게 드러날 것이다.
③ 북핵
여러 차례 지적했지만 부시 행정부의 군사전략에서 북핵 문제가 갖는 특징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겠다.
첫째, 핵을 가진 북의 존재는 부시 행정부의 군사전략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르는 위협에 대해 동맹국들과 협의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통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국제테러조직과 그 후견국가에나 어울리는 전략이다.
만약 9.11 직후 미국이 알 카에다와 아프가니스탄에 위 전략을 적용하고 거기에서 멈추었다면 옳고 그름을 떠나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위 전략을 이라크와 같은 주권국가에까지 적용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위 전략을 확대하더라도 그 최대치는 핵을 가지려는 악당국가를 사전에 제압한다는 수준이다.
이미 핵무기를 가진 북에게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미국에게는 달리 대안이 없다. 부시 행정부가 한편으로는 클린턴 행정부의 업적을 부정한다는 정략적 목적에 눈이 어두워 다른 한편으로는 이라크 침공이라는 당장의 탐욕에 의해 북핵이라는 보다 긴박한 정치적 현안을 미루어 둔 것에 불과하다.
둘째, 클린턴 행정부와 부시 행정부의 정책 기조, 철학의 차이가 문제 해결을 지체시키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는 북핵 문제를 국익이라는 잣대로 파악한 반면 부시 행정부는 북핵 문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는 듯 하다.
클린턴 행정부의 입장에서 북 체제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어떠하든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면 북미간의 직접 대화는 별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부시 행정부는 북과 같은 체제가 바뀌어야만 북핵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북 정권과 협상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북 체제를 변질시키기 위한 허망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생각보다 협상이 길어지고 있는 것은 결과가 뻔한 구도에서 미국의 방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강대국의 경우 한번 잘못 들어선 길을 시정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모양이다.
셋째, 북핵 해결의 충격은 생각보다 클 것이다.
부시 행정부로 보면 부시 행정부가 야심만만하게 추가했던 전략인 선제공격, 자유의 확산 정책 등의 뿌리가 흔들릴 것이다. 대량 살상무기가 없는 이라크는 침공을 당하고 핵무기가 있다고 공언한 북과는 수교한다면 미국 정책의 도덕적.정치적 정당성은 뿌리로부터 무너지는 것이다.
북핵 해결의 파장은 거기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는 북핵 문제와 상대적으로 무관하게 처리되고 있는 제(諸)문제 즉 미.일동맹, 주한미군 재배치 등도 연쇄적으로 제동이 걸리거나 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는 유럽에 이어 동북아시아 전체에서 미국의 지위가 재조정됨을 의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