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4년만에 기본조약 및 부속협정 등 체결
피해보상 보다 '정치논리' 우선 졸속협정 비판

한일협정은 1965년 6월 22일 당시 이동원(李東元) 외무장관과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이 도쿄에서 조인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과 4개의 부속협정 등을 말한다.

체결까지 총 14년이 걸린 한일협정은 '경제문제 해결'이라는 한국의 필요와 '식민지 피해청산'의 부채를 해소하려는 일본의 요구가 맞아 떨어진 결과물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한일 양국은 1972년 11월 12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간의 이른 바 '김-오히라' 메모를 기초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상업차관 3억달러'에 최종 합의를 보았다.

박정희 정권은 '청구권 자금' 중 무상자금 3억달러를 활용, 70년대 중반에 징용사망자 8천552명에게 1인당 30만원씩 총 23억6천560만원을 지급하고 대부분은 포항제철, 고속도로 건설 등 경제개발 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최근 한일회담 문서공개를 계기로 당시 협정이 일제강점기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정치 논리'를 우선시 한 졸속협정이었음이 드러났다.

청구권 협정 2항의 '(개인 청구권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해결됐다'는 조항과 합의 의사록의 '(한국측은) 앞으로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는 조문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을 사실상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일합방조약 무효화 시비나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동포, 재일교포 법적지위, 문화재반환 등을 숙제로 남겼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특히 일본측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나 배상을 아예 배제한 채 한국에 제공할 자금 명목을 '독립 축하금' 또는 '경제협력자금' 등으로 고집했다.

수 백만명의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해 숨지게 하거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피해를 입힌데 대한 최소한의 책임의식이나 배려도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일 청구권 협정은 '종자돈'을 받아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실리에 급급한 나머지 역사부채 청산의 명분과 기회를 희생시켰다는 부정적 평가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엇갈리고 있다.

또 '개인청구권이 완전히 해결됐다'는 한일 청구권 협정 조항에도 불구하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의 도의적, 인도적 책임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개인청구권 법적 책임에 대해서는 '국가간의 협정인 만큼 소멸됐다'는 주장과 '일본이 경제협력 자금 명목으로 지원했고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는 점 등을 근거로 여전히 살아있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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