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을 하다 사형당한 분들을 생각하니 살아있는 사람으로써 부끄러울 뿐입니다"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년여의 옥고 끝에 1982년 12월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강창덕(78.대구시 북구 동변동)씨는 오랜 수형생활과 고문 후유증으로 지금도 진통제를 일상적으로 복용하고 있다.

인혁당 사건이 발표된 직후 대대적인 검거령이 내려지자 본능적으로 도피생활을 하고 있던 강씨는 1974년 5월 부산에서 체포돼 당시 남대구경찰서(현 남부경찰서)로 끌려가 거짓자백을 강요당하면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당시 취조하던 수사관은 강씨의 몸을 나무 벤치 위에 묶어두고 몽둥이로 손바닥과 발바닥을 사정없이 구타했고 이때문에 강씨의 손바닥에서 팔꿈치까지와 발바닥부터 무릎까지가 시커먼 피멍이 들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실신을 수차례 거듭한 강씨는 그러나 수사관들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물고문까지 수차례 했다고 주장했다.

고문을 이기다 못한 강씨는 수사관들이 미리 작성해놓은 진술조서에 자신도 모르게 도장을 찍게 됐고 이것이 나중에 중앙정보부 소속 검사에 의해 기소장으로 그대로 변했다고 말했다.

재판 과정에서도 강씨는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이었다면서 수차례 항변을 했지만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결국은 무기수가 됐다는 것.

강씨는 "조사 과정에는 '인혁당'이란 말도 나오지 않았는데 나중에 공소장을 보니 인혁당 재건을 위해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돼 있었다"면서 허탈해 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인에게 생계를 맡기고 본인은 특별한 직업 없이 민주화운동에만 매달렸던 강씨는 그러나 출소 후 5년여 만에 부인이 교통사고로 숨지는 바람에 생활이 크게 어려워져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근근이 생계를 이어왔다.

강씨는 "사형당한 동료들을 생각하니 살아있다는 것조차 부끄럽다"면서 "인혁당 사건은 '사법 살인'으로 불릴 정도였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강씨와 함께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던 나경일(76.대구 수성구 범어동)씨는 아직도 수시로 인혁당 사건 때 고문을 당했던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는 고통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나씨는 인혁당 사건이 있기전 이 사건으로 희생된 대부분의 다른 인사들과 함께 '민주수호경북협의회'에 가입해 '3선 개헌 반대 운동'과 '6.3 굴욕 한.일 수교 반대 운동'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다 74년 5월 2일 외출하다 집 앞에서 연행됐다.

이후 남대구경찰서로 끌려간 나씨는 물고문과 몽둥이 찜질 등 심한 고문을 받았고 이후 중앙정보부 대구분실과 서울의 중앙정보부로 끌려 다니며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듬 해인 74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무기형을 받고 8년 8개월을 복역하다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나씨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빨갱이', '간첩'이라는 누명만 쓴 채 반겨주는 곳이 없었고, 이후에도 경찰의 감시는 9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고 술회했다.

제대로 취직도 되지 않아 인혁당 사건 당시 초.중.고에 재학 중이었던 1남 3녀의 자녀들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도 겨우 마쳤고 취업도 할 수 없어 어려운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지금도 아파트 수위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나씨는 "당시 피해자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이 들어 이번에 진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영원히 묻히고 만다"며 "꼭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져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는 것과 함께 죽음을 당한 이들의 한도 풀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대구=연합뉴스) 이덕기.이강일 기자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