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간첩혐의로 보안사에 검거된 서승ㆍ서준석 형제를 구명하려는 운동이 이들 형제가 체포된 지 3년 뒤 일본에서 활발히 전개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20일 공개한 외교문서에 의하면 서승 형제가 체포되고 난 3년 후인 1974년 5월에 이들 형제를 구명하려는 운동이 일본 학생단체와 정치인, 문화인 등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특히 일본 지식인들은 한국정부가 두 사람을 고문했다고 주장하며 주일 한국대사관과 오사카 총영사관 등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74년 5월 15일에는 '서승형제 구하는 회'라는 이름의 7개 연합단체의 혼다 게이치 대표 등 13명이 오사카 총영사관 앞으로 몰려와 항의했다.
이들은 총영사관측에 "서준식씨에 대한 고문과 학대행위 중지 보증 방안 및 학대행위의 책임 소재 등이 담긴 3개항의 질의에 대한 답변을 5월 22일까지 문서로 회신해 달라"고 요구했다.
같은 날 릿쿄대 조교수 등 15명도 총영사관 앞에서 서승 형제를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낭독하고 돌아갔다.
이어 16일 오후에는 '마르크스주의 청년동맹'이라는 단체 소속 100여 명이 히노키초 공원에서 '박정희 쿠데타 규탄 및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저지'를 명목으로 집회를 열고 거리를 행진했다.
같은 날 주일 한국대사관 정문에서는 '베트콩 그룹'을 자칭하는 '재일한국학생동맹 모국유학생 구제위원회' 소속 학생 40명이 '서준식군 고문에 대한 항의'라는 제목의 항의문을 경비실에 뿌리고 구호를 외쳤다고 문서는 기록하고 있다.
앞서 5월 3일에는 사회당의 니시무라 간기치(西村關一) 참의원이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서준식을 면회한 결과, 고문사실이 드러났다면서 인도적인 처우를 요구하기도 했다.
또 5월 23일에는 국회의원과 문화인 등이 중의원 회의실에서 모여 고문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자민, 사회, 공산, 공명, 민사당 의원 등 220명이 서명했다. 75명의 학자와 문인 등도 고문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법무부는 1974년 5월 28일 주일 한국대사관에 보낸 회신에서 서준식을 고문하거나 학대한 사실이 없으며 정부는 그를 "학대한 사실이 없으므로 책임문제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아사히신문의 고문 보도(5.24)에 대해서도 "고문이나 학대한 사실이 없으며 일본 니시무라 간기치 참의원도 접견을 통해 서준식의 건강을 확인했다"며 "특히 간기치 의원은 서준식을 접견한 후 '모국에 와서는 모국의 법에 따라야하고 어린 학생이라서 철없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고 적극 해명했다는 사실도 기록돼 있다.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