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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2004 국보법 폐지투쟁의 교훈2004년 국보법 폐지 투쟁이 남긴 성과를 돌아보며
이강호 기자  |  leekh@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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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5.01.03  1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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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30일 국회 앞 골목.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국가보안법의 대체입법안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오자 농성단의 분노는 국회로 향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남은 것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이라는 판단으로 아침, 저녁으로 ‘출근투쟁’과 ‘퇴근투쟁’이 이어지던 상황이었다.

경찰의 방패와 곤봉에 이들은 힘없이 무너졌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물과 소금’도 거부했던 ‘결사단식’ 농성단이었다. 국회 앞 대로에 누워 구급차를 기다리던 농성단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11월 2일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의 여의도 농성과 함께 시작된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송현석 정책위원장의 단식이 60일에 달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송현석 정책위원장과 한총련 중앙상임위원회 소속 8명의 학생이 시작한 단식이 12월 6일 ‘300인 국민단식농성단’과 12월 13일 ‘560인 국민단식단’을 거쳐 ‘릴레이’, ‘1일 단식참여자’까지 합해 1300여명으로 불어나리라는 것 또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들의 목숨을 내건 자발적인 참여는 국민들의 가슴속에 국가보안법이 당연히 폐지돼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각인시켰다.

국민단식단의 면모도 다양했다. 신혼의 단꿈을 농성장에서 보내야 하는 신혼부부, 젖먹이 아기를 떼어놓고 상경해 단식으로 인해 말라가는 젖을 보며 눈물을 흘려야 했던 어머니, 물과 소금을 거부하고 ‘결사단식’에 돌입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두 딸이 아버지에게 불러주었던 노래 ‘아빠 힘내세요’ 등 가슴 아픈 사연이 줄을 이었다. 이들 모두에게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된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꿈이 있었다.

국가보안법의 연내폐지는 좌절됐지만, 국민단식단의 얼굴에는 결코 ‘좌절’의 빛을 볼 수 없었다. 12월 31일 아침, 여의도 농성장에서 오전 농성을 진행 중이던 단식농성자들은 국가보안법 연내폐지 여부가 중요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단식농성을 벌이며 얻었던 ‘집단체험’으로 각자의 활동 영역으로 돌아간 뒤,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때는 ‘대중’과 함께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국민의 힘’ 앞에서는 당리와 당략도 소용없다는 것이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1000인 단식단’ 국보법 폐지 운동의 전국 확산

11월 3일부터 시작된 국가보안법 폐지 촛불문화제는 농성 초반만 하더라도 30-50여명이 모여 벌이는 조촐한 행사였다. 이에 11월 18일에 열렸던 국보연대 주최의 ‘비상시국회의’에서는 305개 소속 단체의 결집력이 약화되지 않았느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다. 국보연대는 전열을 가다듬어 12월 1일부터 9일까지 총력투쟁 기간으로 설정하고 하고 12월 1일 ‘56인 삭발식’을 필두로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12월 6일 ‘300인 단식농성단’, 13일 ‘560인 단식농성단’, 20일 ‘1000인 단식농성단’ 출범을 계기로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대중적 동력을 얻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조촐했던 촛불행사’는 드디어 광화문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특히 ‘1000인 단식농성단’은 각 지역별, 각 부문별로 흩어져 있던 ‘통일민주운동세력’을 여의도로 결집시킴으로써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계기였다.

12월 18일 광화문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 촛불대행진’ 행사에는 1만여 명이 모였다. 12월 22일에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광화문까지의 ‘침묵행진’으로 곳곳에서 환자가 속출해 응급 후송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은 12월 29-30일에도 여의도 칼바람을 맞아가며 밤샘농성을 이어나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바라는 촛불을 끄지 않았다.

이는 매일 오전과 오후 지하철을 누비며 대 국민 홍보활동을 벌인 ‘국가보안법 폐지 실천단원’들의 소리 없는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공할아버지’의 욕설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알린 국가보안법 폐지의 정당성은 국가보안법 고수 여론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12월 6일 국회 법사위에서는 열린우리당의 최재천 의원이 국가보안법 폐지안 및 형법보완안을 손바닥을 두드리며 상정시킨 일이 있었다. 이후 열린우리당 이른바 ‘개혁파’라고 불리는 국회의원들이 ‘240시간’ 의원총회를 벌였지만, 결과적으로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 폐지 당론은 ‘정치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2005년 1월 1일 새벽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가 정치적 책임을 지고 원내대표직을 사퇴했다. 새해 벽두부터 양당 지도부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균열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불발로 그쳤지만 당의 명운을 걸고 국가보안법을 지키겠다는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가 국가보안법의 대체입법안을 가지고 열린우리당과 협상에 나섰다. 진보세력으로부터 ‘수구꼴통’이라 불리는 한나라당도 국가보안법에 있어서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자신의 놓은 덫에 스스로 걸린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의 ‘간첩암약’ 발언 또한 변화된 정치권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국가보안법이 제정 57년을 넘어가고 있다. 올 2월에 예정된 정기국회에서 국가보안법 문제는 반드시 넘어가야 할 산이다. 현재의 상황으로는 국가보안법 문제가 대체입법으로 후퇴할 가능성이 높다. 비록 몸을 추스르기에도 급박한 시간이지만 국회에서 남은 법적 절차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000인 단식단’은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남은 것은 ‘실패’의 경험이다. 이제 ‘실패'의 경험을 면밀히 검토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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